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Yokohama Glory Church

요한복음16장17-28절

2018.02.14 18:00


∼ 제자 중에서 서로 말하되 우리에게 말씀하신 바, 조금 있으면 나를 보지 못하겠고 또 조금 있으면 나를 보리라, 하시며 또, 내가 아버지께로 감이라, 하신 것이 무슨 말씀이냐 하고, 또 말하되, 조금 있으면, 이라 하신 말씀이 무슨 말씀이냐 무엇을 말씀하시는지 알지 못하노라 하거늘, 예수께서 그 묻고자 함을 아시고 이르시되, 내 말이 조금 있으면 나를 보지 못하겠고 또 조금 있으면 나를 보리라 하므로 서로 문의하느냐.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는 곡하고 애통하겠으나 세상은 기뻐하리라. 너희는 근심하겠으나 너희 근심이 도리어 기쁨이 되리라. 여자가 해산하게 되면 그때가 이르렀으므로 근심하나 아기를 낳으면 세상에 사람 난 기쁨으로 말미암아 그 고통을 다시 기억하지 아니하느니라. 지금은 너희가 근심하나 내가 다시 너희를 보리니 너희 마음이 기쁠 것이요. 너희 기쁨을 빼앗을 자가 없으리라. 그날에는 너희가 아무 것도 내게 묻지 아니하리라.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무엇이든지 아버지께 구하는 것을 내 이름으로 주시리라. 지금까지는 너희가 내 이름으로 아무 것도 구하지 아니하였으나 구하라. 그리하면 받으리니 너희 기쁨이 충만하리라. 이것을 비유로 너희에게 알렸거니와 때가 이르면 다시는 비유로 너희에게 이르지 않고 아버지에 대한 것을 밝히 이르리라. 그날에 너희가 내 이름으로 구할 것이요. 내가 너희를 위하여 아버지께 구하겠다, 하는 말이 아니니 이는 너희가 나를 사랑하고 또 내가 하나님께로부터 온 줄 믿었으므로 아버지께서 친히 너희를 사랑하심이라. 내가 아버지에게서 나와 세상에 왔고 다시 세상을 떠나 아버지께로 가노라, 하시니. ∼

예수님께서 하시는 긴 설교는 최후의 만찬의 저녁부터 아직 계속되어 있고, 그리고 이제까지도 그러했지만 제자들의 질문에 항상 예수님이 대답한다는 질의 응답 형식은 계속된다. 베드로가 묻고, 또 도마나 빌립, 가룟 사람이 아닌 다른 유다가 질문하고, 그리고 그것을 예수님이 대답해 간다. 그러나 예수님이 이렇게 말한다. 「내게는 아직 너희에게 할 말이 많이 있지만, 지금은 너희가 그 말을 도저히 이해할 수 없다.」이 말이 무서워서 지금 제자들 중 몇 사람은 마음 속에서 물어보고 싶어도 어쩔 수 없다. 왜냐하면 그 말하는 의미를 모른다. 그래서 물어보고 싶지만, 만일 들으면 견딜 수 없어질 지도 모른다. 듣지 않는 것이 낫지 않을까? 이런 불안 때문에 예수님에게 묻지도 못할 상황이다. 여태까지는 왜입니까? 하고 물어보던 제자들이, 「지금은 너희가 듣는 지에 못 견딘다.」라고 듣는 순간에, 이제 들으면 우리는 견딜 수 없어지는 것이 아닐까? 이제 예수님을 보지 못한다고 하는 것은 당연 죽는 다는 뜻이지만, 그리하면 그 박해가 어쩌면 자기에게 올 지도 모른다. 하는 공포로, 도저히 예수님에게 질문을 하지 못하게 되었다. 그렇게 제자들이 마음 속에서 중얼대고 있는 것을 보고, 예수님이 대답하신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이 자기에게 물어 보고 싶어한다는 것을 아시고, 그들에게 말씀하셨습니다.「내가 『 조금 있으면 너희가 나를 보지 못할 것이고, 또 조금 있으면 나를 다시 볼 것이다.』 라고 한 말 때문에 너희끼리 서로 묻느냐? 내가 너희에게 진리를 말한다. 너희는 울며 애통할 것이나 세상은 기뻐할 것이다. 너희가 슬퍼할 것이지만, 너희의 슬픔은 기쁨이 될 것이다. ∼

제자들의 소리 없는 마음 속을 알고 예수님께서 대답하신다. 너희는 내가 떠나면, 십자가로 죽으면, 애통하며 슬퍼하지만, 곧 기쁨이 될 것이다. 이것이 예수님의 대답입니다. 그러나 이 애통하며 슬퍼한다는 뜻은, 당시 상을 입는 중에 우는 것을 직업으로 하는 사람이 있었다. 특히 그것은 여자가 많다. 장례식의 날에 울고 일을 하는 사람. 그 사람들은 큰 소리로 외치면서 운다. 그래서 상을 입고 있다. 혹은 장례식에서 슬퍼한다는 의미이기 때문에, 이 것은 고별식에서 일어나는 일이다. 여기서 당연 예수님이 죽을 것이라는 예측은 모두가 하고 있다. 그 때에 너희는 장례식에서 우는 여자들처럼 큰 소리 내고 외치고 슬퍼하고 애통할 것이다. 그 슬픔은 예수님을 생각해서가 아니라, 예수님에게 왔던 박해가, 이번에는 자기들에게 미친다는 불안으로 운다는 뜻이다. 이것은 예수님에게서 지금 책망 받는 것입니다. 아까 마음으로 속삭이던 것은 듣고 싶고, 또 알고도 싶지만, 알면 얼마나 무거운 짐이 자기한테 올까 봐 생각했을 때, 망설여서 들을 수 없다. 또한 애통하며 슬퍼할 것이다. 이것도 예수님을 생각해서 애통하며 슬퍼하는 것이 아니라, 그 후에 미치는 자기의 박해. 자기의 고난과 슬픔, 자기에게 다가오는 문제. 이것으로 너희는 애통하며 슬퍼할 것이다, 하는 제자들의 본성, 본심을 드러내시는 것입니다. 단지 예수님과의 이별이나 결별 때문에 슬퍼하는 것이 아니고, 이제까지 각료가 되려고 하던 꿈도 무너지고, 예수님에 따라 가면, 뭔가 유익이 있고, 예수님을 이용해서 자기가 권력을 쥘 수 있을 지도 모른다. 하는 야망이 무너지고, 그리고 지금은 예수님에게 붙어 있으면, 예수의 제자라고 하는 것 때문에 죽음을 당할 지도 모른다. 쫓겨날지도 모른다. 더구나 사형으로 될 지도 모른다. 여러 망상이 시작되면, 제자들은 이제 예수님의 처지는 둘째 두고, 오로지 자기 문제만이 슬프고, 더구나 이제 생활도 어려워지고 직장을 잃고, 지금까지 가졌던 예수의 제자라는 자부심마저 잃은 것이다. 이제 고향으로 돌아갈 수밖에 없는, 자기에 대한 슬픔이다. 예수님께서 이제부터 십자가에서 죽으셔야 할, 그런 뜻의 슬픔이 아니다. 너희는 울며 애통한다. 그러나 너희 슬픔이 기쁨으로 변할 때가 온다고 예수님이 지금 소망을 주고 있습니다. 그 기쁨은 예수님께서 비유로 말씀하신다.

∼출산하는 여인에게는 출산할 때의 고통이 있다. 그러나 아이를 낳으면 여인은 아이가 세상에 태어난 것이 너무 기뻐서 그 고통을 잊어 버린다. ∼

아이를 낳는 비유를 통하여, 다시 기쁨이 회복된다는 뜻은 여자가 아이를 낳을 때와 같다는 것이다. 지금 너희는 내가 죽는 것으로, 함께 괴로움을 받고 있을 것이다. 그러나 아이가 태어나면, 그런 슬픔은 한 순간에 잊어버린다. 예수님은 그 슬픔이 기쁨으로 변한다는 비유를 지금 말씀하신다. 이 비유는 구약 때부터 말씀하셨다. 아들을 낳았다. 이것은 메시아가 오신다는 유대인만이, 이스라엘만이 받은 약속입니다. 너희에게 아들이 태어난다. 그것은 메시아, 이스라엘을 구원 하는 이스라엘의 왕이다. 특히 이사야66장6-14

∼성에서 나는 큰소리를 들어 보아라. 성전에서 나는 소리를 들어 보아라. 여호와께서 원수들을 심판하시며, 그들이 행한 대로 벌하시는 소리다. 「한 여자가 진통을 겪기도 전에 아기를 낳았다. 해산의 고통을 당하기도 전에 아들을 낳았다. 누가 이런 일을 들었느냐? 누가 이런 일을 보았느냐? 나라가 어떻게 하루 만에 생길 수 있겠느냐? 그러나 시온은 해산의 고통을 느끼자마자 자녀를 낳았다. 이처럼 어떤 고통이 있을 때, 내가 반드시 새 생명을 낳게 하겠다. 」 여호와의 말씀이다. 생명을 주는 이가 어찌 태를 닫겠느냐? 너희 하나님의 말씀이다. 예루살렘을 사랑하는 사람들아, 예루살렘과 함께 즐거워하여라. 예루살렘을 생각하며 슬퍼하던 사람은 예루살렘과 함께 기쁨의 노래를 불러라. 아기가 어머니 젖을 빨며 만족해하듯, 너희가 예루살렘의 좋은 것을 차지하고 기쁨을 누릴 것이다. 여호와께서 이렇게 말씀하셨다. 내가 예루살렘에 평화가 강물처럼 흐르게 하겠다. 민족들의 재물이 예루살렘으로 흘러 들어오게 하겠다. 너희는 아기처럼 젖을 빨며 내 품에 안길 것이고, 내 무릎 위에서 귀여움을 받을 것이다. 어머니가 자식을 위로하듯 내가 너희를 위로하겠다. 너희가 예루살렘에서 위로를 받을 것이다. 너희가 이것을 보고 기뻐할 것이며, 너희의 몸과 마음이 건강해질 것이다. 여호와의 종들은 여호와의 능력을 보겠으나, 여호와의 원수는 여호와의 진노를 볼 것이다. ∼

여기서 이사야는 메시아를 말했다. 반드시 구세주가 온다. 그 구세주가 오셨을 때, 이스라엘을 해방시킬 것이다. 그것과 동시에, 이스라엘 나라가 재건된다. 다시 한번 하나님의 나라가 선다. 그래서 아들을 낳았다고 하는 것은 메시아이기도 하고, 하나님의 나라 회복이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이스라엘의 예언자들은, 이 비유를 많이 사용합니다. 너희에게 아들이 태어난다. 그리하면 기쁨이 넘치며 위로를 받을 것이다. 왜냐하면 시온 성, 하나님 나라가 세워져, 예루살렘이 회복되며, 거기에 메시아가 오시기 때문이다. 이스라엘의 왕이 나타나기 때문이다. 이것이, 유대인에 있어서의 위로와 소망이었던 것이다. 예수님이 지금 제자에게 하는 말씀과 같다. 너희는 지금 자기 문제로, 자기에 닥쳐올 박해나 여러 고난 때문에 애통하며 슬퍼하고, 상을 입는 것 같은 심한 아픔을 겪을 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것은 아기를 낳기 전에 여자가 진통을 일으키는 것과 같다. 아기가 태어나면, 그 슬픔을 한 순간에 잊어서 위로 받을 것이다. 이것은 오순절에서 일어난 사건입니다. 여기서 예수님이 말씀을 하고 있는 것은, 세례 성령입니다. 예수님이 죽으시고 3일후 부활하시고 아버지께로 가신 후 마가 방에서 불 성령이 오십니다. 그 성령이 오실 때에, 너희는 기뻐할 것이다. 왜냐하면 아들을 낳기 때문이다. 그 때 무엇이 생깁니까? 초대교회가 세워졌다. 예수님께서 여기서 말씀을 하시는 것은, 내가 너희를 떠나가지만 다시 올 것이다. 어떠한 모습으로 옵니까? 불의 성령으로 오셔서 교회를 세운 것입니다. 그 교회를 세운다고 하는 것은, 건물을 세운다는 것과 차원이 다르다. 기독교가 존재하지 않는 시대, 예수그리스도 이름을 처음으로 듣는 시대, 지금까지 유대교나 혹은 다양한 신들을 빌고 있었던 시대, 「내가 다시 오면은 아들을 낳다.」 하나님의 나라가 세워진다. 이번에는 구약 때 같은 불안정한 예루살렘이 아니라, 원수에게 빼앗기는 시온이 아니다. 다시는 망할 일이 없는 진실의 하나님 나라가 태어난다. 그리고 그것은 이루어졌다. 정말로 인류 역사상 처음으로 기독교 교회가, 예루살렘의 작은 집에서 시작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오순절 날이었다. 육체적으로는 나는 보이지 않아진다. 그러나 너희가 일단은 슬퍼하지만, 곧 기뻐하게 된다. 왜? 「내가 다시 오기 때문이다.」라고 말씀을 하시고, 그리고 그것은 너희가 바라던, 기다리고 기다린 하나님의 나라가 임한다. 그것은 예루살렘도 아니고, 산도 아닌 너희 마음속에 하나님의 나라가 임하기 때문이다. 그것은 결코 사라지지 않다. 나가서 짐승의 피를 제단으로 가져 가지 않아도 좋다. 그러한 의식은 끝나고, 이제부터는 성령과 진리로 예배할 때가 이르렀다. 사마리아 여인에게 말씀하신 것이 성취되는 것입니다. 때가 오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제 왔습니다. 하늘의 아버지는 그러한 예배 자를 찾고 계신다고 한다. 그 일이 일어나는 것은 어디입니까? 마가 방에서 오순절 날에, 정말로 오는 것입니다. 하나님 나라가 도래합니다. 우리의 마음 한가운데 오신다. 그 때에 성령과 진리로 예수그리스도를 예배할 때가 오는 것이다. 베드로가 말했다. 「제 영도 증명하고, 성령도 함께 예수를 증명한다. 」

저렇게 불안정했던 베드로가, 또한 무서워하고 두려워했던 제자들이 오순절 날, 불의 성령을 받았을 때에는, 이제 두려움이 없습니다. 왜 두려움이 없습니까? 애통하며 슬퍼하고 자기 박해나 죽음에 대해서 걱정하던 고민을 극복하고, 공포를 멀리하고, 베드로는 감옥도 죽음도 두려워하지 않았다. 베드로는 대담하게 전도하기 시작한 것입니다. 이제 박해가 무섭지 않다기 보다 그 이상으로 예수그리스도가 구세주가 되셨다는 확신을 가졌기 때문입니다. 아들을 낳았다. 즉 하나님의 나라가 세워진 것입니다. 주기도문에도 있다. 너희는 이렇게 기도하라. 「하늘의 아버지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 나라가 임하옵시며. 」 나라가 임한다. 이렇게 기도하라고 명령하사 예수님께서 그 기도를 들으신 것입니다. 이것이 기독교의 시작입니다. 이 시대는 그리스의 철학이 유명합니다. 그러나 이집트에 있어서는 짐승과 인간이 연합하여 신이라 하며, 돌이나 벌레도 신이 되는 이집트의 철학은 세계에서 웃음거리가 되고 있었다. 그 당시, 그리스에서는 철학자들이 꽤 세력을 떨치고 있는 시대. 그런데 그리스의 철학자들은 결국 아무 것도 모른다. 철학에 있어서 하나님은 어떠한 존재인가 아무 확증을 가질 수 없었다. 종교를 하고 있어도, 철학적으로는 인간이 어떤 존재인지 결국 대답을 못한다. 그때 어부 출신이며 교육도 못 받은 제자들이 자신만만에 교회를 세워버렸다. 확신을 가지고, 강한 의지를 가지고, 교회를 세우기 시작했다. 그것은 무엇을 말하는가? 하나님의 나라이었던 것이다. 그 때 베드로들은 기뻐하고 찬양합니다. 금이나 은은 나에게 없지만, 예수의 이름을 전한다. 들은 사람들도 기뻐해 춤춘 것입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나라가 도래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예수그리스도가 다시 오셨다. 근심이 기쁨으로 변한 그 순간입니다. 여자가 그 전은 진통으로 고생하지만 아들을 낳은 후는, 생명이 탄생했기 때문에 기뻐할 것이다. 교회가 세워지고 하나님 나라가 임했기 때문입니다. 이번에는 영원히 예수님과 함께 살게 되기 때문에 그들은 고통이 기쁨으로 변했다. 그것을 예수님께서 약속하신 것이다.

그러나 교회가 세워진 후, 바울은 이렇게 말한다. 갈라디아서4장 19

∼내 자녀들이여, 여러분이 참으로 그리스도와 같이 되기까지 나는 여러분을 위해 다시 아기를 낳는 어머니의 고통을 느낍니다. ∼

바울은 디모데를 향해서 「 내 아들아.」라고 부른다. 갈라디아 성도를 향해도 「내 자녀들이여」라고 부릅니다. 바울은 아기를 낳고 있는 것이다. 그것은 영적인 아기입니다. 바울이 전도하고 씨를 뿌려 물을 쏟고, 그리고 성령님이 교회를 세워 주시고, 갈라디아에서 교회가 세워진 것입니다. 그 성도들을 향해서 바울이 「내 자녀들이여. 」이란 표현을 하고 있다. 그러나 이 갈라디아 교회에 바울이 편지를 보냈을 때는 벌써 복음으로부터 벗어나고 있었다. 바울이 전도한 복음이 아닌, 예수그리스도가 아닌 우상을 가져와서 분열이 일어나고, 교회가 분리하고, 참 복음을 바꾸려 하고 혼란스러워졌다. 바울이 가르쳤을 때의 교회와는 완전히 다른 교회가 되어버렸다. 그래서 바울이 「나는 너희를 위해서 다시 아기를 낳는 어머니의 고통을 느껴야 되냐? 다시 한번 더 너희를 가르쳐야 하느냐? 」 내가 복음을 전하고 예수그리스도의 신부로서 교육 시켰는데, 이렇게도 간단히 배반하는가? 이렇게도 간단히 예수에서 떠나가겠느냐? 이라고 한탄하고 있는 것입니다. 내가 여러분들을 전도하고, 그리고 성령이 여기에 교회를 세워 주셔서, 아들이 태어났다. 그러나 그 아들은 예수그리스도에서 간단히 멀어져, 다시 옛날 습관인 율법을 지켜 구원을 얻는다는 착각에 빠지는 것을 보아서, 바울이 꾸짖기 위해서 편지를 보냈다. 이때 거짓 형제들이 교회 안에 들어와서 바울이 가르치지 않았던 다른 복음을 이야기하고, 예수가 아닌 가르침이 들어왔다. 하기에 한번 더 처음부터 다시 교육하지 않으면 안되냐고 바울이 말하듯, 아들이 태어나서 기뻐했지만, 결국 이스라엘도 그렇고, 예루살렘도 그랬지만, 이 갈라디아 교회도 또 부패하기 시작한다. 그리고 바울은 한번 더 아들을 출산하는 고통을 해야 한다고 말하고 있다. 예수님이, 「아들을 낳았다.」하는 것은 이제 메시아가 오셨기 때문에 태어난 아들은 『교회』입니다. 그리스도의 몸입니다. 하나님의 나라입니다. 그것을 예수님이 이 제자들에게 「만약 하나님의 나라가 임하면 너희는 기뻐할 것이다.」고 하셨다.

∼너희도 지금은 근심하지만, 내가 너희를 다시 보게 되면 너희는 기뻐할 것이다. 그리고 아무도 너희에게서 그 기쁨을 빼앗지 못할 것이다. 그 날에는 너희가 아무것도 내게 묻지 아니하리라. 너희가 내 이름으로 아버지께 무엇이든지 구하면, 그 분이 너희에게 주실 것이다. ∼

그 날이 오면, 내가 너희를 다시 보게 되면, 너희는 이제 다시는 내게 질문을 하지 아니하리라고 말하신다. 여태까지는 이해 못하기에 질문을 할 수밖에 없었다. 하물며 비유로 이야기할 때는 전혀 알지 못했다. 그런 제자들이 오순절 이래 다시는 묻지 않는다. 보혜사 성령이 오면, 예수그리스도를 가르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이 눈으로 보이고 있었을 때에는 무슨 말을 하여도 깨닫지 못했다. 그러나 마음 속에 성령이 오셨다. 당시는 손으로 쥘 수 있는 작은 성경이 아니다. 양피지로 된 족자이었으며 특별한 사람만이 가질 수 있었다. 아직 신약 성경도 없고, 구약 성경마저 아무나 쉽게 가질 수 없는 그런 시대에, 아무도 질문하지 않게 된다는 것은 이제 배우지 않아도 알게 된다. 의문이 없어진다. 확신을 가져서 예수를 증거할 수 있었다. 누가 가르친 것입니까? 성령입니다. 그리스도의 증인으로서 서게 하고 감옥도, 죽음도 두려워하지 않고, 어떤 박해도 두려워하지 않을 만큼의, 강한 확신을 줍니다. 그래서 너희의 고민이나 괴로움이나 슬픔이, 기쁨으로 변한다고 하는 것은, 성령님의 일하심으로 그러했습니다. 그렇다고 박해가 없어졌다고 하면 아니다. 믿는 성도의 국적은 천국으로 옮겨졌기 때문에, 이 세상은 너희를 미워한다. 그러므로 핍박은 끝나지 않다. 오히려 많아지는 것이다. 그들은 왜, 자기 박해를 고민하고 슬퍼하며 애통하였는데도, 기쁨으로 변한 것인가? 환경이 바뀐 것이 아니고, 이해가 바뀐 것이다. 이제 같은 일이 일어나도, 혹은 그보다 더 지독한 일이 일어나도, 확신을 가질 수가 있었다. 육체적인 공포심이 없어진 것이 아니다. 이전과 변함없다. 그럼 무엇이 바뀌었습니까? 성령에게 힘을 받았습니다. 그래서 사고방식이 예수 중심이 된 것입니다. 그것은 성령이 예수를 가르쳐 주고 있기 때문이다. 인간이 변한 것이 아니다. 그러나 근심이 기쁨으로 변했다. 이것이 성령의 일입니다. 내 힘이 아니라 성령이 도와 준다. 그것이 오순절에서 내린 불의 성령이다. 그들이 일어서게 된 것은, 불의 성령이 들어갔기 때문입니다.

∼ 지금까지는 너희가 내 이름으로 아무것도 구하지 않았다. 그러나 구하라. 그러면 너희가 받을 것이요. 너희 기쁨이 가득 찰 것이다. 내가 지금까지는 이것을 비유적인 말로 너희에게 말하였지만, 더 이상 비유적인 말이 아니라 아버지에 관하여 명확한 말로 너희에게 말할 때가 올 것이다. ∼

기쁨으로 변했을 때는, 하늘의 아버지를 보여주십시오, 라고 하지 않습니다.

∼ 그 날에 너희가 내 이름으로 아버지께 구할 것이다. 내가 너희를 위하여 아버지께 구하겠다는 말이 아니다. 너희가 나를 사랑하고 내가 아버지께로부터 왔음을 믿었기 때문에. 아버지께서 친히 너희를 사랑하신다. ∼

여기에서 말하는, 「너희가 내 이름으로 구하라.」는 기도를 말한다. 이제부터는 예수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 해야 한다. 지금까지 너희를 위하여 하늘의 아버지에게 기도한다고 말해왔다. 그러나 너희들은 예수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하라. 그리하면 하늘의 아버지가 너희를 사랑하고 축복해 주신다. 그 기도에 응답해 주신다. 이제 나는 아버지에게 기도한다고 하지 않다. 내가 아버지께로 가기 때문이다. 이제까지와 다른 이야기를 하신다. 로마 8장 『누가 감히 죄가 있다고 판단하겠습니까? 예수그리스도가 나를 위하여 죽으시고 다시 살아나 하나님의 오른편에 앉아 계시면서 우리를 위해 중보 기도를 하고 계십니다. 』 여기를 육체적 예수님을 상상하고, 예수님이 무릎을 꿇고 아버지에게 기도하신다고 생각하면 안 된다. 이것은 단 한번 역사적으로 예수그리스도가 죽었다는 사실을 말한다. 예수그리스도가 죽으므로 인류의 죄가 사해 받고 하나님과 화해하고, 하늘의 아버지를 「아버지」라고 부르며, 하나님의 자녀가 되어, 천국의 상속자가 되었다는 뜻이다. 그 예수님의 의로 하늘의 아버지께서 너희를 사랑해 주신다고 예수님께서 말씀 하신다. 예수님께서 십자가 위에서 「다 이루었다.」라고 말씀 하셨다. 예수가 아버지에게 부탁하지 않아도 우리 죄가 용서받은 것입니다. 예수그리스도를 통하지 않으면, 하나님께서 죄인인 우리를 용서하실 수 없습니다. 예수그리스도의 십자가 없이 하나님이 우리를 자녀라고 부를 일은 없습니다. 예수그리스도가 중보 하신다는 말은 그 죽음 이외 어떤 것도 아니다. 그 밖에는 하나님의 분노와 심판밖에 없다. 예수의 십자가는 현재도, 그리고 미래에 있어서도 믿는 사람을 구하는 능력입니다.

이 예수그리스도가 십자가로 죽는다는 행위가, 얼마나 위대하며 영광이며 얼마나 큰 은혜이었던가? 그리고 이것은 하나님의 사랑이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절대로 자기에게 편리한 성경해석을 해서는 안됩니다.

우리는 구원 받은 후도 약하고 흔들며 불완전합니다. 그래서 필요한 것은 인내입니다. 예수님에게 기도하고 성령님의 도움 없이는 무너집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내 마음 안에 계셔, 이 성령님은 나를 결코 떨어지지 않습니다. 우리들은 최후까지 고아가 아닙니다.

이 은혜로운 약속을 믿고 감사합시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