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한복음 14장22-31절
~ 가룟인 아닌 유다가 이르되 '주여 어찌하여 자기를 우리에게는 나타내시고 세상에는 아니하려 하시나이까.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사람이 나를 사랑하면 내 말을 지키리니 내 아버지께서 그를 사랑하실 것이요 우리가 그에게 가서 거처를 그와 함께 하리라. 나를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는 내 말을 지키지 아니하나니, 너희가 듣는 말은 내 말이 아니요 나를 보내신 아버지의 말씀이니라. 내가 아직 너희와 함께 있어서 이 말을 너희에게 하였거니와, 보혜사 곧 아버지께서 내 이름으로 보내실 성령 그가 너희에게 모든 것을 가르치고 내가 너희에게 말한 모든 것을 생각나게 하리라. 평안을 너희에게 끼치노니 곧 나의 평안을 너희에게 주노라. 내가 너희에게 주는 것은 세상이 주는 것과 같지 아니하니라.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도 말고 두려워 하지도 말라. 내가 갔다가 너희에게로 온다는 하는 말을 너희가 들었나니 나를 사랑하였더라면 내가 아버지께로 감을 기뻐하였느리라. 아버지는 나보다 크심이라. 이제 일이 일어나기 전에 너희에게 말한 것은 일이 일어날 때에 너희로 믿게 하려 함이라. 이 후에는 내가 너희와 말을 많이 하지 아니 하리니 이 세상의 임금이 오겠음이라. 그러나 그는 내게 관계할 것이 없으니, 오직 내가 아버지를 사랑하는 것과 아버지께서 명하신 대로 행하는 것을 세상이 알게하려 함이로다. 일어나라 여기를 떠나자' 하시니라. ~
예수님이 최후의 만찬의 그 날로부터, 유언을 이야기 하시고 아직, 그 설교가 계속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이번에는 가룟 사람이 아닌 다른 유다가 예수님에게 질문했습니다. 「주님께서는 자신을 우리에게는 나타내시고, 세상에는 나타내시지 않으시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예수님께서 대답하셨다. 「나를 사랑하는 사람이라면, 나의 말을 지킬 것이다. 그리하면 내 아버지께서 그를 사랑하실 것이고, 우리가 그 사람에게 와서 함께 있을 것이다.」이 가룟 사람이 아닌 유다가 예수님에게, 왜 제자들에는 여러 이야기를 하시고, 스스로 그리스도이며 메시아라 말씀을 하시는데, 이 세상의 사람들에게는 그것을 공개하지 않습니까? 만일 선생님께서 【메시아】이시면, 공적으로 알려야 되는 것이 아닙니까? 왜 언제나 이 소수 사람 앞에서만 자신의 모습을 나타내시는 것입니까? 하는 질문을 했다. 그리고, 그 이유를 예수님이 대답할 것이라 생각하면, 그 이유는 말씀 안하셨다. 제자가 뭔가 물을 때마다, 예수님의 대답은 그 질문에 안 맞는, 다른 이야기를 하시는 것이다. 그래서 나를 사랑하는 사람은 내 명령을 따르는 사람이다. 지금, 유다가 한 질문과 전혀 다르다. 그것은, 예수님이 안 맞는 대답을 하신 것이 아니라, 예수님이 하신 말씀을 제자가 이해하지 못하는 것뿐이다. 왜냐 하면, 이 질문 자체가 「예수님이 메시아이시면, 더 공적으로 【메시아】 이름을 밝히시면 되지 않습니까? 」그러나 예수님의 생각은, 나를 사랑하고, 내 계명을 지키는 사람이, 나를 알고 있는 사람이라고 하기 때문입니다. 이때, 유다는 자기가 지금 예수님을 진실로 사랑하고, 예수님의 명령을 진지하게 지키고 있는지 자문자답 하지 않는다. 단지, 보이거나 들리거나 하는 것만을 걱정하고, 그것만이 의문인 것이다. 예수님에 있어서는, 지금 여기에 있는 사람 만이, 자신을 나타내시는 것이 아니다고 하고 있는 것입니다. 내가 나타낼 사람은, 내 말을 듣고, 내 계명을 지키고, 나를 사랑하는 사람이다. 그 사람에게 나는 나타내고 있다. 이것이 예수님의 대답입니다. 그러나, 지금 유다의 의문은 자기가 그런 사람인지 짐작하지 않고, 이미 제자로서 특별하게 선택 받고, 지금 예수님께서 눈 앞에서 직접 이야기하시니, 벌써 자기는 예수님을 사랑하고 있을 것이고, 예수님의 계명을 지키고 있다, 하는 착각에 빠져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예수님이 무슨 설교를 해도, 왜 다른 군중과 우리를 구별하시는지? 하는 사고방식밖에 할 수 없다. 우리도 생활에서 똑같은 일을 할 수 있는 것이다. 왜 나는 이렇습니까? 눈으로 보이는 것만 질문한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하시는 메시지는 그런 것이 아닙니다. 왜입니까? 하는 질문에 대답하시지 않을 것 같이 보여도, 마치 예수님이 아무 일도 안 하시고 침묵하시는 것처럼 느껴져도, 인간은 항상 불평불만이 있지만, 예수님께서는 더 숭고한 높은 차원에서 대답을 하시고, 침묵 하시지는 않다. 예수님께서는 예수님의 방법으로 대답하신다. 자기 뜻대로 되지 않을 때, 예수님은 아무 일도 안 해준다. 이 유다와 같은 판단밖에 할 수 없다. 예수님께서 이야기 하실 때에는, 예수님의 기준으로 말씀을 하고 있으므로, 그것을 들으려고 하지 않는 사람에게는 들리지 않습니다. 그것을 진지하게 따르려고 하는 사람만이 들린다고 하신다.
∼나를 사랑하지 않는 사람은 내 말을 지키지 않는다. 너희가 듣는 이 말은 내 것이 아니고, 나를 보내신 아버지의 말이다. ∼
예수님의 말을 모른다, 성경을 읽어도 모른다는 사람은, 결국 예수님을 사랑 못하기 때문입니다. 정말로 따르려고 하는 사람에게 예수님의 말은 들립니다.
이 모든 것을 내가 너희와 함께 있는 동안에 너희에게 말하였다. 그러나 내 아버지께서 나의 이름으로 보내실 진리의 성령이신 보혜사께서 너희에게 모든 것을 가르치시며, 내가 너희에게 말한 모든 것을 생각나게 하실 것이다. ∼
지금 내가 너희에게 남김 없이 모든 것을 말하였다. 그리고, 그 것을 가르치시며 도와주시는 성령이 오시면, 너희는 모든 것을 이해하며 상기할 것이다. 여기서 우리가 상기한다, 성령이 나를 가르치신다, 하는 의미에서 오해가 있어서는 안 된다. 제1번째가, 이 세상의 것을 모두 성령이 가르치는 것이 아니다. 이 세상에서 일어나는, 역사, 사건들 그리고 사고, 이것들을 알려면 공부하지 않으면 안 된다. 책을 읽고 뉴스를 보고 신문을 읽고, 그리고 지식을 얻기 위한 노력이 필요하다. 그것을 성령님이 전부 가르쳐 준다는 이야기가 아니다. 이 세상의 것은, 이 세상의 방법대로 공부하는 것이며, 성령님이 그 것을 가르치는 것은 아니다. 성령님이 갑자기 능력을 주는 것도 아니다. 지금까지 가지지 않았던 지식을 가지게 된다는 것이 아닙니다. 많은 크리스천이 오해하고 있다. 열심히 기도하면, 열심히 구하면, 하나님이 무엇이든지 알려 준다고 생각하고 있다. 그것은 틀리다. 그리고, 예수님이 생각나게 하신다는 것은, 성경의 지식, 복음입니다. 한정되어 있는 것입니다. 예수그리스도가 하신 말씀, 복음서에서 이야기되는 약속. 기독교의 교리. 그 것을 우리에게 가르쳐서 이끌어 주신다. 기적적인, 우상적인 것이 아닙니다. 알고 싶고, 보고 싶고, 듣고 싶은, 것을 다 가르치시지 않는다. 하나님을 아는 지식, 진리, 그리고 예수님의 복음입니다. 마태•마가•누가•요한, 그리고 바울이 그것을 설명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기대하는 욕심으로 성경에 안 씌어져 있는, 우주만물이 창조된 방법이라든가, 성경의 복음이 아닌 것까지, 하나님을 전부 알려고 하면, 오히려, 사탄의 유혹을 받는다. 복음을 알고, 그 복음 하나로, 이제 충분합니다. 왜냐하면 베드로가, 주님은 그리스도시며,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 하고 대답하면, 예수님은 하늘 나라의 열쇠, 그 권위를 준다고 하실 정도의 축복이었습니다. 그러나, 베드로는 하나님의 나라를 이해하고 있었던가? 그렇지 않습니다. 그 후의 행동을 보면 압니다. 그것은,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서 베드로에게 알려 주신 신앙 고백이었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복음 바로 그 하나를 아는 것이, 하늘의 대단한 축복을 베드로가 받은 것처럼 우리는 하늘의 많은 은혜를 받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복음은 잘 알지 못하면서 자기 욕망을 가져서 뭔가를 얻으려고 한다. 성령이 가르쳐 이끄신다고 하는 것은, 그러한 것이 아닙니다. 4복음서는 성령의 감화에 의해 씌어졌다. 그것은, 이 4명의 저자가 기억을 애매하게 해서, 잊어버렸던 부분을, 성경을 쓸 때에 성령이 틀림 없이, 그것을 상기시켜 생각나게 하는, 그런 뜻도 아닙니다. 보혜사가 오신다, 하는 것은 그것과는 다릅니다. 우리들도 경험상 처음은 그러한 착각에 빠집니다. 뭔가 과거에 일어난 것을 상기시키게 하거나, 옛날 들은 메시지를 기억나게 한다 등, 그러나 그것이 성령의 인도라고 생각하면, 그것도 다릅니다.
성령님이 내 안에서 상기시킨다고 하는 것은, 예수그리스도를 이해시킨다는 것입니다. 예수그리스도라고 하는 구세주가 누군가, 하는 것을 가르치기 위하여 오셨기 때문에, 기본은 성경의 지식에 근거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이 제자들이, 성경을 쓸 때에, 틀림 없이 기억을 생각나게 하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이 하신 말씀의 의미를 알게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에 대하여 씌어져 있는 성경이 무엇인가를 알게 된다는 것이다. 그것은 오히려 체험입니다. 요한은 누구보다도 오랜 시간을 성령님과 보내 왔습니다. 예수님의 제자 속에서 항상 가까운 곳에서, 예수님의 바로 옆에서, 3∼4년 함께 지내며 그 말씀을 듣고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때에는 몰랐습니다. 그 때에는 제자들은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이, 무슨 뜻인지 전혀 몰랐다. 그리고 진리의 성령이 오셔서, 그들은 복음을 전했지만, 한번으로 다 알았던 것도 아니다. 그 후 몇 번이나 체험하고, 예수님과 함께 같이 동행하는 사이에, 성령님이 인도하셔서, 성령님의 일하심을 보고, 그리고 상기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이 어떤 뜻인지를 생각나게 시키는 분이 성령님입니다. 나 양심에 예수님을 배반하는 죄가 있으면, 말씀을 거역할 때, 그리고 예수님이 바라지 않은 일, 불순종 할 때 성령님이 여러 방법으로 우리에게 상기시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문자를 상기시키고 말씀 구절을 암기시키고, 과거를 기억나게 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니까 요한은 그 때 몰랐지만, 지금 알았다. 하는 말은 성령님을 받은 후 깨달았어도, 많은 훈련을 받고, 예수님에 의해, 자아를 부수는 과정, 자기를 드러내려고 하는, 그 모든 교만과 탐욕을 부술 때에, 드디어 예수님께서 하신 일들을 알고, 예수님이 그 때, 이웃을 섬기라 하신 참 뜻을 이해하고, 서로 사랑하라, 한 의미를 이해해 가는 것입니다. 우리를 도우시는, 【파라쿠레토스】, 변호사로서 오신 성령님은, 예수그리스도가 누구신지를 가르치시는 분이시지, 우리의 욕심을 이루는 것과는 다르다. 우리의 능력이나, 기억을 불러 일으켜서 이 세상에서 성공시키는 것도 아닙니다. 인간이 기대하는 무엇인가가 아니고, 그 것을 위해서 성령이 일하시는 것이 아닌 것입니다.
∼내가 너희에게 평안을 남긴다. 곧 나의 평안을 너희에게 준다. 내가 너희에게 주는 평안은, 세상이 주는 것과 같지 않다.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도 말고, 두려워하지도 마라. ∼
예수님께서 드디어 유언 속에서, 이별을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히브리어로 평안은 【샬롬】입니다. 그러나, 【샬롬】 의미는 「안녕하세요. 」이라고 하는 의미도 있고, 「안녕히 가세요. 」도 있다. 「하나님의 평안이 있으리라. 」하는 기도이기도 한다. 이, 예수님께서 남기시는 평안. 그 평안이 무엇인가? 이것은 이 세상과는 같지 않다고 말하고 있다. 이 세상이 말하는 평안은, 내 욕심대로 소유할 때, 무엇이든지 가능하게 하고, 자신의 뜻대로 되었을 때에 평안이 있다고 말한다. 그리고 병이 나고, 힘든 일이 일어나고, 뭔가를 잃었을 때에 평안을 잃어버린다. 이 세상의 사람은 그러한 가치관이며 기준이다. 그러나, 내가 너희에게 주는 평안은 그런 가치기준이 아니다. 하고 말씀을 하신다. 이 평안은, 예수님의 유언입니다. 나는 너희를 떠나 보이지 않아져도, 반드시 너희에게 평안을 준다. 평화를 준다. 이것은, 「샬롬」, 「안녕히 가세요. 」하는 의미이기도 한다. 그러므로, 나는 떠나 갑니다. 영어는, 「Good Bye」인데, 원래 어원의 의미는, Good Bye, 「God be with you」라는 의미로, 「하나님께서 너희와 함께 있으리라. 」하는 기도입니다. 영어도 【샬롬】과 같습니다. 너희에게 평안이 있으리라, 하나님께서 너희와 함께 있으리라. 이것은 기도입니다. 인사이기도 하지만, 기도이며, 예수님의 최후의 유언이 이, Good Bye 이었던 것입니다. 「나는, 너희와 함께 있다」 【샬롬】. 「내가 남기는 것은, 평안이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마지막 유언을 하십니다.
너희는『 내가 갔다가 너희에게로 올 것이다. 』라고 말한 내 말을 들었다. 너희가 진정 나를 사랑했다면, 내가 아버지께로 가는 것을 기뻐했을 것이다. 이는 아버지가 나보다 더 크신 분이기 때문이다. ∼
여기서 「더 이상 나를 보지 못할 것이다. 그러나, 곧 너희에게로 올 것이다. 왜냐하면 아버지께서 나보다 더 위대하기 때문이다」이 말씀은, 이 위대하다는 뜻이, 삼위일체의 하나님이 우, 아래의 우열이 있는가? 하는 그런 말이 아니다. 하나님이 크다, 작다, 하는 비교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나를 보내신 분』 하늘의 아버지가 계시는 곳은, 영광 찬란한, 높은 곳입니다. 그 대단한 곳에, 이제 나는 하늘의 아버지 계시는 곳으로 돌아간다. 그러나 너희는 그것을 기뻐할 것이다. 왜냐하면, 나는 처음부터 그 곳에서 왔기 때문이다. 예수님께서 육신을 입으셨기에, 하늘의 아버지보다 아래 위치가 된 것은 아닙니다. 삼위일체의 하나님의 본질은 하나이다. 같은 하나님이시다. 그러므로 여기서, 나보다 아버지가 더 크고, 능력이 있다, 하는 비교가 아니라, 예수님께서 지금, 하나님의 영광을 숨겨 인자로 오셨으나, 그리고 하나님의 명예도 영광도 버리고 오셨지만, 사람의 눈에는 약하게 비치고, 죽어버리는 예수님은, 정말 인간 냄새가 날지도 모른다. 그러나, 예수님의 그 삼위일체 중 일 위격, 하나님의 본질이 바뀐 것은 아닙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이 여기서, 「하늘의 아버지께서 나 보다 더 위대하시다」라고 하는 것은, 하늘나라, 그 곳이 위대합니다. 왜냐하면, 하늘의 아버지께서는 형태를 안 가지십니다. 그러니까 하늘의 아버지께서 임재 하시는 곳이 위대한 곳입니다. 지금은 못 봅니다. 그리고, 그 곳에서 오셨던 예수님께서, 지금, 한번 더 거기로 돌아가신다. 원래 모습, 성질로 돌아가시는 것입니다. 너희는 이제 육신으로 온 나를 보는 것이 아니라, 완전한 나를 보게 된다. 내가 갔다가 곧 올 것이다. 라는 그런 뜻입니다.
∼ 내가 지금 이 일이 일어나기 전에 너희에게 말하는 것은, 이 일이 실재로 일어날 때, 너희로 하여금 믿게 하기 위해서이다. ∼
예수님의 유언이 잠시 동안 계속되지만, 그 전의, 예수님이 하신 설교도 그랬지만, 너희에게로 돌아 올 것이다. 몇 번이나 말하셨다. 「나는 한번 떠나 가지만, 다시 와서 내가 있는 곳에 너희도 함께 사는 것이다」이, 『산다』는 의미는, 14장 2절 에서 하신 말씀과 같습니다.
요한14장 2절∼내 아버지 집에는, 너희들이 있을 곳이 많이 있다. 만일 그렇지 않다면 내가 너희에게 이런 말을 하지 않았을 것이다. 내가 가서 너희를 위해 장소를 마련하러 간다. ∼
장소란,『거하는 집』 너희와 함께 있는 곳. 나는 떠나 가지만, 곧 돌아 와, 그리고 너희와 같이 있게 한다. 이것은, 「내 아버지 집에는, 집이 많이 있다」는 말이다. 히브리어로 말하면, 『세키나』이지만, 그 의미가, 「집을 만든다」란 뜻이다. 출애굽기에서, 모세가 계시 받고 지은 성전에서 영광의 구름이 나타냈을 때도, 이 【세키나】란 말이다. 그것은, 영광의 구름이 성전에 찼을 때에, 「살아계시는 하나님께서 거하시는 표적」이라고 하는 의미입니다. 그러므로, 출애굽기에서 성전에 영광의 구름이 낮에 나타나면, 하나님께서 임재 하셨다. 하나님께서 함께 계신다는 표로서 나타내신다, 솔로몬이 성전을 세웠을 때도 영광의 구름이 차고, 제사장들이 성소 안에 들어갈 수 없을 정도이었다. 그러나, 포로로 끌려간 백성들이 돌아와, 예루살렘 성전을 재건하고, 유다 총독【스룹바벨】의 마음을 움직이셔서 성전을 짓게 하셨을 때에는 영광의 구름이 나타나지 않았다. 그것을 유대인들은 【메시아】가 왔을 때, 영광의 구름이 나타날 것이라 믿고 생각하고, 그리고 【메시아】가 오기를 유대인들은 바라며 기다려 왔다. 왜냐하면 그 때, 장소를 마련하여 주실 것이다, 그런 생각을 가져 있었다. 예루살렘의 회복을 말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나라를 만들어 주신다. 하나님의 성전을 회복해 주신다. 그러므로, 여기서 말하는 『집』 「나는 떠나 간다. 그러나, 다시 너희에게 와서, 집을 세운다」. 집을 세운다는 것은, 내가 너희에게 와서 함께 있을 것이다, 하는 표입니다. 영광의 구름이 나타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보혜사 성령이 온다고 하신 것은, 내가 떠나 가서 다시 온다는 뜻이다.
이 『집』은, 천국으로 들어간다는 뜻이 아니라, 재림이 일어났을 때도 아닌, 우리가 죽었을 때에 예수님과 만나는 것도 아니다. 예수님이 내 마음에 들어오셔서, 성령님으로 오셔서, 예수님의 성전을, 내 안에 세우시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내 마음에 집을 만든다는 것이다. 내가 아닌, 예수님이 하나님 나라를 세우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집을 만든다, 하는 것은, 「너희는 내 계명을 지켜라」. 내가 이 곳에, 내 집을 세우니 너희는 나를 따르라. 그리고 새로운 계명을 줍니다.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나를 사랑한다면, 나의 명령을 지킬 것이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셨다. 내가 내 집을 너희 안에 세우니, 너희는 나를 따르라. 서로 사랑하라, 내가 한 것 같이, 너희도 이웃 사람을 섬겨라. 이 뜻은 복종을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냥 명령이 아닙니다. 너희가 내 성전이 된다면, 너희가 나를 따를 것이다.
그리고, 그 사람을 통하여 내 영광을 드러낼 것이다. 내 이름을 드러내고, 능력을 드러내고, 내가 하나님인 것을 나타내리라. 보혜사 성령님이 오신다. 그리고 하늘의 아버지 계시는 곳에 많이 있었던 집을 내 안에 세워주신다. 그리고 그것은, 평안이라 하신다. 「내가 너희 안에 들어와, 내 성전을 세울 때, 너희는 기뻐할 것이다. 평안해질 것이다. 행복해질 것이다. 내가 있는 곳에 너희도 있게 되기 때문이다.」
∼이 세상의 통치자가 오고 있으므로, 더 이상 너희와 많은 말을 나눌 수가 없다. 하지만 이 세상의 통치자는 나를 마음대로 할 권세가 없다. 그러나 내가 아버지를 사랑하고, 아버지께서 내게 명하신 대로 내가 행한다는 사실을 세상은 알아야 할 것이다. 일어나라, 그리고 이 곳을 떠나자. ∼
이 말씀은, 기본적으로 겟세마네의 기도와 같습니다. 내 뜻대로 하는 것이 아니라, 하늘의 아버지의 뜻이 이루어지기 위해서다. 잠자는 제자를 향하여, 「 일어나라. 어두움의 때가 왔다. 그리고, 나를 배신하는 사람이 왔다」하는 겟세마네 기도와 같은 내용을 요한은 여기에서 표현한다. 그 때 예수님께서, 「 일어나라」. 「나를 쓰러뜨리려고 나를 배반한 사람이 오고 있다. 그러나 그것은, 나를 쓰러뜨리는 것이 아니라, 내가 승리를 얻기 때문이다. 내가 죽고, 부활하면 모든 권세를 잃을 것이다. 사망의 권세, 사탄과 어둠의 권세를 가진 권력. 이 세상의 지배권. 내가 그것을 빼앗는다. 너희는 두려워 마라. 」 그리고, 「일어나라」는 「 맞서 싸우라.」 혹은, 「 그 세력과 맞서자.」 그것은, 내가 이제, 그 권세를 넘어뜨렸기 때문이다. 나를 배반한 사람을 내가 쫓아냈다, 죽음을 무서워할 필요도 없고, 사망의 권세를 두려워할 필요도 없고, 사탄이나 어둠의 노예가 될 필요도 없다. 왜냐하면, 내가 승리 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일어나라, 하는 말은 제자들에게 한 유언인 것이다. 그리고 교훈인 것이다. 「 일어나라, 나가자.」라고 말했다고, 제자들에게 총을 가져서 싸우라는 뜻이 아니다. 그 뒤도 긴 설교는 계속되고, 아무도 밖으로 안 나갔다. 이 곳에서 나가라는 말이 아니라, 지금 집에서 나가라고 하는 의미가 아니다. 『그를 향해서 맞서라』 는 대상이 누구지요? 이 세상의 주권을 가진 마귀들입니다. 왜냐하면 그들의 지배권은 이제 잃고, 사망의 권위는, 이제 너희를 건드리지 못한다. 왜냐하면 벌써 내가 승리 했기 때문이다. 그것은 내가 하늘의 아버지 계시는 곳으로 가기 때문이다. 모든 주권이 내 것이다. 너희는 두려워 마라.
성령님께서 오신다. 그리고 십자가에 달리기 전의 유언. 『샬롬』 너희에게 평안을 준다. 우리 안에 오신 성령, 그 분께서 도대체 무슨 일을 하시는지, 우리가 이해해야 합니다. 예수님을 사랑하세요. 예수님을 따르세요. 이 말을, 「하지 않으면 안 된다」하는 설교로 해 버린다. 이것은, 명령이기 때문에 행하라, 이러한 설교가 나온다면, 결국 예수는 주, 라고 말하면서, 예수님이 우리의 구세주라고 하면서, 마치 자기 자신의 자유 의지로 자기의 노력에 따라서 믿음이 성장하며, 예수님을 사랑하는 것은 자기의 선택인 것처럼 된다. 과연 그런 말을 않해도, 「 예수님을 사랑하는 사람이, 예수님이 영광을 드러낸다. 」이러한 생각이면, 우리는 하나님의 영광을 내가 빼앗아 버리게 된다. 인간의 노력, 인간의 의사, 행위 등, 예수님을 사랑하는 것마저도 인간 스스로 할 수 있을 것 같은 착각을 갖게 되어버린다. 예수님께서 말씀 하신다. 「내가 하늘의 아버지께로 가서 너희 집을 마련한다.」 그 다음입니다, 「너희가 나를 사랑하면 내 계명을 지켜라.」 여기 순번이 틀려서는 안됩니다. 내 스스로 하지 못한다는 것이다. 예수님을 사랑하는 것도, 이웃 사람을 사랑하는 것도, 따르는 것도. 누구나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는 것이다. 존•칼빈은 이렇게 말한다. 「예수님께서 힘을 주시고, 성령님께서 일하시지 않으면 사람은 스스로 선한 아무 일도 할 수 없다. 」 예수님께서 인간을 새로운 피조물로 만드시지 않으면 아무 것도 변할 수 없다. 그러므로, 크리스천이다, 라고 고백했다 해도 우리 안에는 예수님께서 일 하시지 않으면 선한 것은 없다. 예수님께서 힘을 주시지 않으면 무리합니다. 예수님께서 가르쳐 주시지 않으면 우리는 도저히 알 수도 없다. 예수님을 구세주로 믿는 신앙은 가지고 있다. 그 믿음이 있으면, 당연, 성경이 말하는 계명을 지켜야 합니다. 「내가 나를 드러낸다」하는 것은, 그 계명을 진실로 지키는 사람 위에 나타내십니다. 그 곳에서 예수님께서 집을 지으시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내 탐욕을 버리고, 겸손을 가지고, 영이 가난하고, 슬픈 사람이 되어, 예수님께서 채워 주시기를 기도하며 소원 하는 사람이, 마태의 산상 설교 내용 대로입니다. 거기는 성령님이 성전을 세운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한다는 고백은 하나님을 마음 다하여 정성 다하여 순종하는 것이다. 내 뜻대로 살지 않다는 표현인 것이다. 자기 부정이 시작 되어야 한다. 열심으로, 행위로 시작되는 것이 아니다. 그리고 그것은 성령님께서 힘을 주셔야 할 수 있다. 우리는 항상 겸손하며 가난한 자가 되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