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한복음14장12-21절
~내가 아버지에게 접고, 아버지가 나에게 계시면 나가 말하는 것을 믿으세요. 그렇지 않으면, 기량에 의해 믿으세요. 정말로, 정말로, 여러분들에게 고합니다. 나를 믿는 사람은, 내가 하는 기량을 하고,또 그것보다도 더욱 큰 기량을 합니다. 내가 아버지의 밑에 가기 때문입니다. 또 나는, 여러분들이 나의 이름에서 의해 추구하는 것은 무엇이든지, 그것을 합시다. 아버지가 아이에 의해 영광을 평판이 되기 위해서입니다. 여러분들이, 나의 이름에 의해 뭔가를 나에게 요구한다면, 나는 그것을 합시다. 만약 여러분들이 나를 사랑한다면, 여러분들은 나의 훈계를 지킬 것입니다. 나는 아버지에게 부탁합니다. 그렇게 하면, 아버지는 이제 혼자의 도움 주인을 여러분들에게 주러 됩니다. 그 도움 주인이 언제까지라도 여러분들과,라는 닮아 계시기 때문 닮습니다. 그쪽은, 진리의 영혼입니다. 세상은 그쪽을 받아들일 수 없습니다. 세상은 그쪽을 보기도 하지 않고, 알기도 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여러분들은 그쪽을 알고 있습니다. 그쪽은 여러분들과 함께 살고, 여러분들 가운데에 계시기 때문입니다. 나는, 여러분들을 버려서 고아로는 하지 않습니다. 나는, 여러분들의 곳에 되돌아 오는 것입니다. 지금 당분간에서 세상은 이제 나를 보지 않게 됩니다. 그러나, 여러분들은 나를 봅니다. 내가 살므로, 여러분들도 살기 때문입니다. 그 날에는, 내가 아버지에게 접고, 여러분들이 나에게 접고, 내가 여러분들에게 접는 것이, 여러분들에게 압니다. 나의 훈계를 유지하고, 그것을 지키는 사람은, 나를 사랑하는 사람입니다. 나를 사랑하는 사람은 나의 아버지에게 사랑받아, 나도 그 사람을 사랑하고, 나 자신을 그에게 드러냅니다. 」 ~
지금, 예수님은 십자가에 가설되기 전에 최후의 유언을, 이것은 일반의 유대인, 이방사람에게가 아니고, 제자들만큼 함께 이야기 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이 십자가로 죽기 전의 유언, 마지막으로 제자에게 가르치는 설교,그리고, 최후의 중요한 가르침의 장면입니다. 그리고, 요전만 말에서는, 『나야말로 길이며, 진리이며, 목숨이다』라고 말씀을 한 곳에서, 우리들이 어떠한 바람에 사는 것이 진리로, 어떠한 바람에 걷는 것이 길에서, 어떠한 바람에 걸으면 목숨을 얻는다고 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예수님 바로 그것이 진리, 길, 목숨이기 때문에, 이 예수님을 받아들이는 것이 우리들에 있어서, 진리이며, 길이며, 목숨. 그러나, 우리들은 그 길 순서는 모른다. 길 순서는 모르지만, 예수님이 함께에 가 주므로, 길 순서를 오른쪽인, 왼쪽이라고 가르침을 받는 이상으로, 안심이 있어서, 예수님이 데리고 가 오므로, 우리들이 고민하지 않고 마친다. 이라고 하는 것이, 지난 주의 예수님이 제자에게 마지막으로 함께 이야기 한 유언. 그리고, 오늘 예수님이 이야기하는 내용은, 이 최후의 설교는 깁니다. 게다가, 예수님이 제자에게 유언을 이야기하는 부분이 계속되는 것이지만,
∼ 정말로, 정말로, 여러분들에게 고합니다. 나를 믿는 사람은, 내가 하는 기량을 하고,또 그것보다도 더욱 큰 기량을 합니다. 내가 아버지의 밑에 가기 때문입니다. ∼
이라고 하는 것은, 예수님은 지금까지 여러 업을 해 왔습니다. 먼저, 5000명에게 빵을 먹이고, 게다가, 미즈노우에(水上)를 걸어져,그리고, 환자는 누구나 풀어져, 눈이 뜨이고, 귀가 열리고, 벙어리가 말하고, 발 쇠약해지기가 걷고, 한센병(leprosy)인이 맑게 할 수 있어,라고 하는 것을 하셨다기는 커녕, 죽은 사람도 되살아나고 있는 것입니다. 그 모든 업은 여러분들로도 시킵니다. 그러나, 그것보다 더 큰 업을 여러분들은 하게 된다. 내가 죽고, 하늘의 고향에 들어갔을 때에, 도움 주인이 여러분들에게 오기 때문에, 그것보다도 더 큰 업을 할 수 있게 된다라고 하는 것이, 이야기된 유언입니다. 그것은 약속합니다. 그리고 그 약속한 것을 지금 예수님이, 제자들을 향해서 이야기되는 것입니다만, 『큰 업』과는 예수님보다 힘 있는 업을 하는 것인가? 이라고 하는 것이 아닙니다. 역시 예수님은 고기를 입어서 오셔도, 본질은 신이기 때문에, 신의 힘을 숨기고 있다고는 해도, 신입니다. 인간이 그 흉내 수 있는 것은 아니다. 그 신의 권위에 의해, 악령을 내쫓고, 환자를 푸는 것은 제자도 했습니다. 사도행 연고에 저것 정도 많은 기적이 행하여지고 있는 것을 보면, 예수님이 약속한 대로 떼어 놓고 있다. 그러나, 예수님이 하는것 보다, 더 큰 업과는 기적적인 것이 아닙니다. 기회만 있으면, 예수님은 유대인 안(속)에서밖에 복음을 이야기하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은 예루살렘에서 나가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제자들은 나가는 것입니다. 제자들은, 유대인이 아닌, 이방인을 향하고, 혹은 전세계를 향하고, 로마를 비롯해 유럽에 들어가 가는,그리고, 토마스에 있어서는 인도에 들어가고, 다른 사도들도 전원 순교하고, 다른 나라에 들어가 갔습니다. 그것을 말씀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내가 죽어서 하늘로 올라가면 여러분들에게 도와 주인을 보낸다고. 그렇다면 여러분들은 내가 하지 않은 일을 하게 된다. 그것은, 유대인이외의 인간에게, 복음이 전해지게 되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예수님의 유언 안(속)에서, 가장 중요한 유언이었던 것입니다. 왜냐하면, 이것은 마르코서나 【루카】서나 다른 마태서에도 쓰여져 있게, 예수님이 되살아났을 때에 40일간 제자들에게 드러났을 때도 말씀을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은 【사마리야】, 땅의 끝도 가서 복음을 전하세요. 성령을 주세요. 그리고 그 보람으로서 악령을 내쫓고, 새로운 말로 말하고, 환자에게 손을 두고, 그렇게 하면 환자가 풀어집니다. 이라고 하는 것이, 예수님이 제자에게 최후까지 명령된 유언이었던 것입니다. 지금, 그것을 말씀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내가 하지 않은 업, 다시 말해 이방인에게 전하는 것은, 내가 생존중에, 공적으로 3∼4년 예수님이 일한 것은 짧은 년월로 하지 않았지만, 그 후는, 한번 더 내가 오는 날까지는, 전세계에 가서 복음을 말해 전하라고는, 이 당시 12명의 제자뿐만 아니라, 우리들 현재의 크리스트 교도에 있어서도, 유언이며, 명령입니다.
∼ 또 나는, 여러분들이 나의 이름에서 의해 추구하는 것은 무엇이든지, 그것을 합시다. 아버지가 아이에 의해 영광을 평판이 되기 위해서입니다. 여러분들이, 나의 이름에 의해 뭔가를 나에게 요구한다면, 나는 그것을 합시다. ∼
여기에서, 더 큰 업을 하기 위한 조건이 들어가는 것입니다. 더 이방인에게 가고, 복음을 宣べ 전하기 위해서 해야 할 일이 『기도』입니다. 그러나, 지금까지 유대인들은 신의 이름으로 빌어 왔습니다. 게다가, 유대인들은 기원할 때도 중개자가 필요했습니다, 제사라고 하는 중개자입니다. 그리고 장소적으로는, 계약의 상자가 두어지고 있는 신전이 있는 곳에 가고, 기원하지 않으면 안되었습니다. 그것은 지금 현대에 있어서도, 유대교나 이슬람교는, 신의 이름으로, 창조 주유일의 신에게 빌고 있습니다. 그러나, 여기에서 예수님이 새로운 명령. 새로운 유언을 남기는 것입니다. 예수그리스도의 고묘(御名)에서, 예수그리스도에게 기원하세요. 그렇게 하면, 예수그리스도가 일하기 때문에.
여기에서 말하고 있는 『기도』가 도대체(일체) 뭐니인가? 이것이, 예수님이 하지 않은 업도 하는, 조건에 하나로, 아무런 기도일지가 중요합니다. 그 것에 있어서, 어떤 목사선생님의 어린이가 유치원의 소풍 전날에, 비가 내리지 않는 것 같이 빌고, 다음 날 비가 내려버려, 실망한 그 어린이는, 아버지에게 선언한 것입니다. 「두 번 다시 기원하지 않는다. 기도를 들어 주지 않았기 때문에. 」 그러나, 우리들의 주변에서, 이러한 사람을 많이 봅니다. 신에게 빌었다고 쓸데없어요. 기원했다고 암이 풀어질 할 리(터) 없다. 기원했다고, 들어 줄 리가 없다. 기원했다고 신은 아무 것도 해 주지 않는다. 그러므로 신은 존재하지 않는 것조차 말하는 결론 붙임(외상)까지 되어버린다. 대부분의 사람이 이것을 말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명령을 자주 듣지 않으면 안됩니다. 예수의 고묘(御名)에서 기원하고, 예수에게 전해지고, 예수가 응한다. 그리고 문제를 해결해 간다. 이라고 하는 순번입니다. 이 순번은, 명령이기 때문에 절대적입니다. 이라고 하는 것은, 예수의 명의로 기원하세요. 인간의 이름으로 기원하는 것이 아니고, 내가 나의 바람을 빌어라라고 말하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의 명의로 기원한다고 하는 것은 우리들이 집을 빌릴 때라든가, 뭔가를 지불할 때라든가, 남의 명의를 빌릴 때가 있습니다. 혹은 남의 이름을 빌릴 때가 있습니다. 그 때 우리들이 가장 하지 않으면 안되는 것은, 그 빌린 사람의 이름에 부끄러움을 빠뜨려서는 안된다. 폐를 끼쳐서는 안된다. 그러므로, 남의 이름을 빌린다고 그러한 것입니다. 자신의 우리대로는 통하지 않는다. 자신이 자기 좋을 대로 하다는 할 수 없습니다. 남의 명의를 빌리고 있는 것이기 때문에. 이것이 예수님의 명령이었던 것입니다. 『나의 이름으로 기원한다』라고 하는 것은, 어떠한 것인가고 하면, 예수님의 생각, 예수님의 계획, 예수님 자신이 가지고 있는 마음, 예수님의 성질에 따른 기도를 기원해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원한다라고 하는 것은 한다. 이것이 지금 예수님의 제자들에의 명령입니다. 그것은, 주되는 기도와 같습니다.
주되는 기도는 제1에 ∼하늘에 늘어나는 우리들의 아버지에요. 원 테두리ば고묘(御名)를 숭배시켜 주셔라 ∼과는, 신이 먼저 영광을 받아 주세요.
∼고향을 오게 했기 전 ∼과는, 곤(今) 덴시(天使)들이 있는 저 천국이 이 땅에도 세워지게. 이 지상의 사정이나 인간적인 감정이 아니고, 천국의 저 주거의 성질. 아무도 미워하지 않고, 아무도 재판하지 않고, 모두가 서로 사랑해서, 모두가 피차(서로)의 덕을 높여 간다. 예수님만을 극구 칭찬하는 저 장소. 빛나는 정말로 빛 넘치는 저 장소. 목숨에 넘쳐서, 죽음이 없고, 더러움도 없다. 저 천국이 이 땅에도 오게 하는 것은, 정신세계에서 그것을 행하여지게라고 하는 것은 한다. 게다가 이 땅에서. 그것이 예수님이 기대하고 있는 기도. 그렇게 한다면, 내일 날씨가 맑아진다든가, 오늘 암이 풀어진다든가, 우리들의 사정이 최우선이며는 안된다. 가령 지금 죽을것 같아서도, 그것은 변함없다. 가령 지금 죽고 싶을 만큼 괴로워도. 혹은 죽고 싶을 만큼 슬퍼도. 우선되는 것은 예수님에게 따른 기도가 아니면 안된다. 게다가 그것은, 예수님에게 기원하지 않으면 안된다. 그리고, 예수님은 반드시 그것을 해결한다. 이것은 압도적인 보증입니다. 절대로 이루어 줄 수 있다라고 하는 기도입니다. 이것은, 절대로 신이 응하는 것입니다. 물론, 시간적인 타이밍은 예수님이 정했다고 한들, 예수님에게 따른 기도라면, 예수님을 향하고 있다면, 게다가, 반드시 예수의 고묘(御名)에서 기원하고 있다면, 예수님이 반드시 여기는 응한다고 말하는, 구박이 아니고, 예수님의 보증입니다. 그리고, 그 기도가 이렇습니다. 땅의 끝도 복음을 전하세요. 내가 한 것이상에, 여러분들이 하게 된다. 이라고 하는, 이 일을 하기 위한 기도, 그러므로, 그리스도교의 기초 기도가 주되는 기도라고 하는 것이 잘 압니다. 우리들은 주되는 기도를 마치 경과 같이 외쳐서는 안됩니다. 먼저, 이것이 예수님이 기원하고 있는 기도. 이 땅에서도 사악해서 서로 미워하고, 서로 재판해서, 정말로 남에 아무런 관심도 가질 수 없는, 자신으로 힘겨워서, 사람에 상관하고 있을 수 없는,이라고 말하는 이 지상에서, 그것을 초월한 예수님의 생각. 자신중심이 아니고, 예수님 중심의 저 천국과 같은, 그러한 장소가, 이 지상에서도 세워지는 것 같은 기도. 그리고, 그것은 복음밖에 없습니다. 예수님을 믿으세요. 그렇게 하면, 예수님의 힘이 당신을 돕기 때문에. 이 기도를 하지 않으면, 우리들의 기도는 예수님이 물어서 붉은색 말야 말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 기도를 하면, 예수님은 반드시, 전지 전능의 힘을 가지고, 바위도 움직이는 힘을 가지고, 이루어 주어 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것이 예수님의 최후의 유언입니다. 크리스천이라면, 『11명의 제자』가 아니고, 크리스천이라면, 누구나 하세요, 무엇입니다.
∼ 만약 여러분들이 나를 사랑한다면, 여러분들은 나의 훈계를 지킬 것입니다. 나는 아버지에게 부탁합니다. 그렇게 하면, 아버지는 이제 혼자의 도움 주인을 여러분들에게 주러 됩니다. 그 도움 주인이 언제까지라도 여러분들과,라는 닮아 계시기 때문 닮습니다. 그쪽은, 진리의 영혼입니다. 세상은 그쪽을 받아들일 수 없습니다. 세상은 그쪽을 보기도 하지 않고, 알기도 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여러분들은 그쪽을 알고 있습니다. 그쪽은 여러분들과 함께 살고, 여러분들 가운데에 계시기 때문입니다. ∼
여기에서, 도움 주인이 온다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이 아닌, 다른 도와 주됩니다. 예수님은 이제곧 죽으면, 제자들에게 말하고 있습니다. 모습이 보이지 않아지는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이제 천국에 되돌아와져버리는 것입니다. 지금까지 빤히 내다보인 예수님이 아닌, 도움 주인이 오는, 반드시 온다고 약속됩니다. 그 도움 주인은 희랍어에서 『【파라쿠레토스】』라고 말하는 것이지만, 영어에서는 『변호사』와 번역되고 있습니다. 그러나, 사카키바라 선생님에게 말하게 하면, 오히려 헬퍼에게 가까운 것이 아닌 것인가? 왜냐하면 변호사는 자격이 있어서, 재판의 때에 죄를 호소할 수 있었을 때에, 대신 재판관 앞에서 변호해 주는 사람입니다. 그러나, 옛날은 변호사의 자격이 없는, 친구·친구가 변호한 것입니다. 옛날의 재판라고 말하는 것은, 변호사라고 말하는 자격이 없어도, 친구·친구가 증언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그 사람이 심하게 정해지지 않도록, 헬퍼로서 재판에 와 있었던 것입니다. 그 헬퍼에게 더 가까운 것이 아닐까? 변호사라고 하는 것 보다. 그러나, 【파라쿠레토스】라고 하는 희랍어가 정말인 의미는, 『곁(옆)에 불러 모을 수 있는 것』입니다. 자신의 곁에 불러 모을 수 있는 것이라고 하는 의미입니다. 이분이 다시 온다. 그리고, 그쪽은 영원히 이제 당신에게서 떨어지거나 하지 않는다. 당신의 곁(옆)에서, 당신을 언제나 도움 하고, 당신을 반드시 변호해 주는 분이, 반드시 한번 더 온다. 그쪽은 진리의 영혼입니다. 이 진리는 예수님에 관한 지식. 성서에 관한 지식. 신에 관한 지식. 구원에 관한 지식은, 이분이, 여러분들에게 가르치게 된다. 이것이 조건 두 번째입니다. 내가 한 것보다, 더 큰 업을 하기 위한 조건이, 예수그리스도의 고묘(御名)에서 먼저, 기원하는 것. 다음에는, 이 도움 주인이 오면, 여러분들에게 그것을 가르쳐 준다. 반드시 이끌어 준다. 자신이 누구일지 모른다. 어떻게 해 주어도 좋을가, 모른다. 어떻게 살아도 좋을가, 모른다. 어느 쪽으로 가면 좋을지 모른다. 이라고 할 때에, 반드시 이분이 가르친다. 이것이 길인, 이것에 걸어라고 하는, 목소리가 들리게 된다. 이것이 예수님이, 절대로 고아로는 하지 않는,이라고 할 이유입니다. 예수님은 그쪽이 오셨을 때에, 나는 여러분들을 절대로 버리지 않는다. 여러분들이 외톨이가 되는 것은 절대로 없다. 게다가 영원히 없다고 하고 있는 것입니다.
지금, 제자들의 기분을 생각해 보아 주세요. 유대인으로부터,그리고 여러 이방인에게서, 이제 궁지에 몰아넣을 수 있어, 유대교의 분리가 시작되는 것입니다. 여태까지는 유대교이었던 것입니다. 베드로들은. 그러나, 이제부터는 그리스도교가 안되면 안된다. 지금부터 종교 개혁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을 목숨 걸고 하지 않으면 안 되다. 그 박해나 공포도 있다. 그중에서 집도 버리고, 가족도 버리지 않으면 안되는 사정조차 나온다. 목숨을 걸지 않으면 안될 때에, 지금까지 빤히 내다보인, 예수라고 하는 도움 주인이 사라져버리는 것입니다. 지금, 없어져서 죽어버린다. 굉장히 쓸쓸합니다. 제자들조차, 예수만이 의지이었던 것입니다. 그 예수님이 있었기 때문에, 여기까지 올 수 있고, 예수님의 뒤에 대해서 와 있었기 때문에 무섭지 않았지만, 예수님이 돌연 없어져버린다라고 하는 것은, 예를 들면 우리들에게서, 교회나 목사가 없어지고, 도와 줄래, 이끌어 주는 전도사들이 없어지고, 선교사들이 없어지는 것 같은 것입니다. 이 지상에서 돌연 모두 없어져버리면, 어떻게 우리들은 무서운 것인가? 이제, 어떻게 성서를 알고, 이 괴로운 세상을 건너가면 좋은 것일지 알지 않게 되어버립니다. 지금, 제자들의 기분이 그렇습니다. 지금, 슬픕니다. 마지막으로 보내는 만찬입니다. 예수님이 이제 죽어버린다. 내일에도 사형이 될 지도 모른다. 그렇게 되면, 우리들은 어떻게 하면 좋은 것인가? 지금까지 도착해 왔는데도. 이라고 하는 공포 안(속)에서, 예수님이 이러한 것입니다. 「절대로 고아로는 하지 않는다. 나는 여러분들을 절대로 한사람으로는 하지 않는다. 이제 한사람의 도움 주『【파라쿠레토스】』도움이 온다. 그 도움이 오고, 영원히 여러분들과 함께 있으므로, 여러분들이 절대로 쓸쓸해지지 않도록, 나는 하기 때문에」 이것이, 정말로 제자를 향해서의 최후의 유언이었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요한 복음서만입니다. 이 유언이, 이런 식이게 구체적으로 씌어져 있는 것은.
그러므로 요한이 1세기말에 썼을 때는, 이제 성령이 마르코의 방에 내리고, 펜테코스테(pentekoste)의 날에, 불의 성령이 내려가고, 어떻게 되었는지를 이미 알고 있는 것입니다. 성령이 온 순간에 예수님이 어떻게 해 주었는지가, 잘 알고 있는 요한은, 정말로 예수님이 십자가에 가설되기 전에 말한 것을 다시 생각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 때는 몰랐다. 도움 주인이 누구인가? 진리의 영혼이 도대체(일체) 뭐니인가? 당시는 그런 것 일컬어져도 우리들에게는 이제 예수님이 없어진데, 그런 것은 격려에도 안된다고 생각하고 있었던 제자가, 십자가로 예수님을 버려서 도망친, 저 비겁자의 제자가, 그 때는 몰랐지만, 뒤에서 이 도움 주인이 왔을 때, 3∼4년 예수님과 침식을 모두 했을 때로마저 모르고, 신에게서 직접 묻고 있는데, 저 위대한 업을, 기적을 전부 보았는데도, 제자들은 이해가 가지 않았습니다. 믿을 수 없었습니다. 죽은 사람마저 되살아나고 있는데도 모릅니다. 그러나, 성령이 왔을 때에는, 예수님이 생존하고 있었을 때보다 한층더 잘 알고, 무엇을 하고 있었는지가 잘 알고, 무엇을 해야 할지가 잘 알고, 그들은 땅의 끝도 비유해 혼자도 간 것입니다. 이번에는 예수님이 보이지 않아도 함께에 간 것입니다. 보이는 예수님이 있지 않아도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11명의 제자가 함께 있지 않아도, 함께 걸어 주는 동료가 있지 않아도, 혼자 인도에 가고, 혼자 아시아에 가고, 혼자 로마에 갈 만큼, 그들은 헤맬 일이 없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이 절대로 고아로는 하지 않는다. 외톨이로는 시키지 않는다. 가령 교회가 없어지고, 목사가 없어졌다고, 여러분들은 망설일 일은 없다. 왜? 진리의 영혼이 여러분들의 안에 오시기 때문이다. 이것은 예수님이 눈으로 보이고 있을 때보다, 분명히 신을 인식할 수 있는, 신의 영령입니다.
∼나는, 여러분들을 버려서 고아로는 하지 않습니다. 나는, 여러분들의 곳에 되돌아 오는 것입니다. ∼
예수님은, 되돌아 온다라고 말한 것입니다. 육체는 이제 죽고, 제자들의 전부터 모습은 완전히 보이지 않습니다. 예수님이 고기의 눈으로 보이는 것으로 이제 없습니다. 그러나, 이제 일회 여러분들이 있는 곳에 되돌아 온다. 여기는 신학적으로, 많은 의견이 갈라지고 있는 것입니다. 되돌아 올 때는 몇 시인가? 이라고 하는 곳에서, 라틴어의 성서 신학자들은, 재임을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지구가 전부 끝나고, 예수님이 하늘로부터 내려와 와서, 눈으로 보이게 되었을 때에, 예수님이 되돌아 오면, 라틴어의 신학자들은 말하고,그리고 희랍어의 신학자들은, 아니요, 그렇지 않고, 예수님이 죽고, 3일후에 되살아나서 40일간 드러나고 있을 때에, 되돌아 온다라고 말한 것이라고, 의견이 나뉘어져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렇다면, 사카키바라 선생님에게 말하게 하면, 조리가 서지 않는다고 합니다. 만일 재임의 때, 예수님이 되돌아 온다라고 말하면, 여러분들에게 드러냅니다고 말하는 것은, 이상하다. 그 때에는, 누구의 눈에도 예수님이 보이게 되고, 믿지 않은 사람이라도 심판을 받기 위해서 예수님 앞에 데리고 와지는데, 그 때 여러분들에게 드러난다고 하는 것은, 이상하다. 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되살아나져서 드러난다고 한다면, 한번 더째에는 보이지 않아집니다. 그것은 40닛께이가 예수님은 승천됩니다. 그렇게 되면, 고아로는 하지 않습니다. 영원히 여러분들과 함께 있다고 하는 말이, 조리가 서지 않는다. 이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그럼, 예수님이 몇시 되돌아 온 것인가? 몇 시 영원히, 함께 있어 주어서, 고아로는 하지 않는다라고 하는 약속은 무엇이었던 것인가? 그 대답은, 펜테코스테(pentekoste)의 날에 되돌아 왔다. 이것이, 사카키바라 선생님이 말씀을 하고 있는, 되돌아 왔다고 하는 의미합니다. 예수님이 되돌아 왔다고 하는 것. 그러므로, 진리의 영혼이 옵니다. 도움 주인이, 【파라쿠레토스】가 1회 더 오겠습니다. 당신을 변호하고, 당신을 도움 하는, 절대로 고아로는 하지 않는다. 그 진리의 영혼이 옵니다라고 말했을 때에, 예수님은 그 전에 뭐라고 말했습니까? 『나는 목숨이며, 진리이며, 길이다』이기 때문에, 그것은 예수가 돌아온다라고 하는 것은, 이번에는 모습이 보이지 않아도, 이번에는 직접 목소리가 들리지 않아도, 예수님이 되돌아 온다고 하는 것입니다. 보이지 않아진 것은 육체만이며, 예수님의 영령은 더 근처에 우리들 안(속)까지 들어오고, 이전 베드로들은 예수님을 보고 있었지만, 안까지 들어오고 있지 않습니다. 형은 보였지만, 베드로 안(속)까지 들어와서는 없습니다. 그러므로, 베드로는 예수님을 배반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어떻게 예수님에게 가르치게 해도, 몰랐습니다. 그럼에도 예수님이 안에 들어갔을 때, 베드로는 어떻게 했니? 감옥을 두려워하지 않았습니다. 십자가는 커녕, 죽음도 두려워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일어서고, 「예수그리스도를 믿으세요. 」이라고 대담하게 이야기하게 된 것입니다. 거기에서 한번도 베드로는 도망치지 않습니다. 죽은 날까지, 거꾸로에서 로마에서 십자가에 걸리는 그 날까지, 베드로는 두 번 다시 도망치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이 있을 때로마저 도망쳤는데도. 그러나, 예수님이 도와 주로 제 안(속)에 들어올 때에는, 고아로는 하지 않습니다. 이것을, 요한은, 뒤에서 아무런 의미인가를 안 것입니다.
요한조차, 한사람만 【파토모스】도에서 몇십년이나 감옥에 넣어져서, 어떻게 실망하고, 다른 파울로나 제자들은, 순교하거나, 복음을 宣べ 전해서 활약하거나 하고 있는데, 요한만은 활약할 수도 있지 않고, 백세까지 무능의 한(한계), 아무런 힘도 발휘하지 않고, 이 감옥에서 백세까지 산 요한을 생각해 보아서, 얼마나 비참한 것인가? 얼마나 자신은 살아 있어도 가치가 없다고 생각했는가? 그 요한이 뒤에서 안 것입니다. 이 도움 주인은, 예수님이 육체로, 생존하고 있을 때보다도, 더 나에게 신을 가르쳐 주었다. 그리고, 그 1세기말, 100년후에 씌어진 요한의 복음서가, 어느 문장보다도 힘이 있는 것은, 그러한 의미합니다. 뒤에서 요한은 전부 안 것입니다. 여러 것을. 예수님이 유언한 그 의미를. 그 때에 요한이 쓴 요한의 복음서만큼, 이 예수님의 유언이 씌어져 있는 것입니다.
∼ 그 날에는, 내가 아버지에게 접고, 여러분들이 나에게 접고, 내가 여러분들에게 접는 것이, 여러분들에게 압니다. ∼
이것은, 정말로 「나를 본 사람은 하늘의 신을 보았으므로 한다」 이것이 마지막으로 제자들에게 말한 것입니다. 「당신의 아버지 신을 보여 주세요. 」이라고 제자가 말했을 때, 「당신은 이렇게 길게 있고, 아버지를 모른다라고 말하는 것인가? 내가 그것 だ」예수님이 자신이 신조차 말씀을 하는 것입니다. 그 때에 제자들은 아직 모릅니다. 육체 가지고 있는 예수님을 보고 있으면, 「내가 신이다」라고 말해도, 무엇 말하고 있을지를 모른다. 어떤 의미로 위대한 선생님, 위대한 예언자이었을 지도 모른다. 기적을 하는 진짜 【메시야】일지도 모른다. 이라고는 생각하고 있었지만, 『신』이라고 하는 개념을 가질 수 없었던, 제자들도. 예수님이 무슨 일이 있어도 육체가 있기 때문에, 그 때에 예수님이 얼마신조차 말해도, 자신들의 입으로, 그렇습니다, 신입니다라고 말했다고 한들, 제자들에게는 모릅니다. 예수님이 신이라고 하는 것이. 「이제, 신을 본 것입니다」라고, 말해지고 있는데도 모른다. 그럼에도, 예수님이 없어지고, 성령이 제 안(속)에 들어가면, 예수님이 신이었던 것을 알려지는 것입니다. 이라고 하는 것은, 인간의 지식으로 신은 모릅니다. 인간의 힘에서는, 예수가 신조차 고백할 수 없습니다. 우리들은 절대신을 볼 수 없습니다. 이것은, 이제, 예외 없습니다. 몇 명일 것이다와, 어느 시대일 것이다라고, 파울로이어라 그렇지요. 베드로조차, 위대한 예언자들 모두가, 성령에게 따르지 않으면 예수를 몰랐다. 성령이 오지 않으면, 신을 모른다. 그리고, 제자들도 파울로도, 성령을 받은 후로 변하고 있다. 구제된 우리들이 변할 수 없는 것은 무엇입니까? 이 성령을 강하게 받지 않으면 안되기 때문입니다. 이제, 우리들의 안에 예수님이 들어오고, 예수를 구세주로서 고백했습니다. 우리들은, 성령이 이제 머물고 있는 것입니다. 예외 없습니다. 예수님을 주인이라고 고백한 사람에게는, 반드시 성령이 머뭅니다. 그러나, 우리들이 베드로와 같은 힘이 없는 것은, 왜입니까? 이 불의 성령을 받지 않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굉장한 파워입니다. 감옥을 두려워하지 않고, 죽음도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암에 걸리자고, 지금 죽음을 선고되자고, 두려워하거나 하지 않습니다. 자신의 집안이 지금 죽자고,그리고, 회사가 없어지고, 일이 없어져도, 두려워하거나 하지 않는 힘입니다. 그리고, 우리들에게는 없습니다. 우리들은 지금, 죽음을 두려워하고,그리고 공포에 떨리고, 게다가 신앙까지 없애는 것 같은 약한 존재이지만, 예수님이 힘을 준다면, 우리들도 극복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지금, 우리들은 그것을 필사적으로 빌어야 합니다.
그리고, 예수님을 사랑하는 사람은, 예수님의 훈계도 지킬 할 리(터)일 것이다. 지만 최후의 말입니다. 요한이 언제나 말하는 것입니다. 「신을 사랑한다면, 보이는 형제를 증오할 할 리(터)가 없다. 왜냐하면, 새로운 훈계는, 『신이 우리들을 사랑해 주신 것 같이, 우리들도 서로 서로 사랑해야 한다』 이것이 새로운 훈계조차 요한은 말하는 것입니다. 그것을 지킬 할 리(터)조차 하는 것입니다. 이 예수님의 힘을 받는다면, 할 수 있을 것인 것입니다. 우리들은 스스로 남은 사랑할 수 없습니다. 자신의 부모마저 사랑할 수 없습니다. 자신의 형제도, 자신의 어린이로마저, 최후까지 사랑할 수 있는 자신이 없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힘이라면, 가족은 커녕 남마저 赦 할 수 있고, 자신을 죽이는 상대마저, 赦 할 수 있고, 자신을 저주하는 상대마저 축복할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그것은, 제 힘이 아닙니다. 도움 주인이, 헬퍼가 오고, 변호사가 오고,그리고, 진리의 영혼이 왔을 때에, 아니요, 예수그리스도가 그대로의 모습으로, 그대로의 힘을 가지고, 전지 전능의 모든 신의 힘을 가지고, 제 안에 이르렀을 때에, 예수그리스도가 해주는 것입니다. 저는 생기지 않습니다. 여전히 저는 남을 사랑하지 않고, 자신에게 욕을 한 인간에게 욕을 돌려주는 수 밖에 할 수 없다. 여전하게 그렇습니다. 변함없습니다. 우리들의 안쪽은 변화되지 않습니다. 그러나, 나가 아니고, 예수님이 일할 때만, 우리들은 자신의 적을 사랑할 수 있게 된다. 자신이 싫은 인간으로마저, 최선을 다할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그것은, 저는 할 수 없습니다. 도움 주인, 진리의 영혼, 예수그리스도가 제 안에서 힘을 주었을 때만 생기는 것입니다. 그리고, 어떤 암도, 어떤 병도, 풀어지는 것은 이 힘밖에 없습니다. 제가 얼마나, 100시간 빌었다고 아무도 풀어지지 않습니다. 제가, 예수님에게 목숨을 바쳤다고, 병은 낫거나 하지 않습니다. 예수님이, 예수님의 성질을 가지고, 예수님의 마음에 따른 기도를 하고,그리고 예수님에게 전해지고,그리고 성령의 도움 주로 따르고,그리고 예수님이 일할 때만, 암은 낫고, 일도 주어져, 생활을 할 수 있게 되고,그리고 우리들은 땅의 끝도 무서워하지 않고, 선교 땅에 갈 수 있는 것입니다. 그 예수님의 힘은 하늘로부터밖에 떨어져 오지 않습니다. 그리고 우리들은 비는 것입니다. 그 힘을 주세요,라고. 파울로를 할 수 있었던 것, 베드로가 할 수 있었던 것, 우리들도 생기는 것입니다. 만일 이 힘이 온다면, 우리들은 환자에게 손을 두면, 환자는 풀어집니다. 제자들도 한 것입니다. 이 힘이 오면, 우리들은 목사가 아니게 지나고, 평신헛됨도, 오늘 구제되어서 예수님이 아직 모르고, 성서를 읽은 적이 없는 사람으로도 그렇습니다. 아무 것도 모르는 사람조차, 예수님의 힘이 일하면 생기는 것입니다.
그리고 지금 우리들은, 그 힘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펜테코스테(pentekoste)의 날로 떨어진 저 힘. 왜냐하면, 이 세상은, 예수님을 모릅니다. 이 세상은, 예수님을 믿을 수 없다. 「예수, 예수」라고 빌지만, 정말로 믿고 있을지는 의문입니다. 교회에 다니고 있어도, 이 신을 알고 있는 것인가라고 하는 것은, 신에게밖에 모르는 것입니다. 마음으로 믿어서 예수를 주인이라고 고백하고 있는 이상성령은 머뭅니다. 도움 주인은 제 안에 있는 것입니다. 그 도움 주인이 힘을 일해 주면, 오늘 우리들이 환자에게 손을 두면 환자는 풀어지는 것입니다. 그리고, 복음을 이야기하면 주변에 있는 사람 전원이 구제되어 가는 것입니다. 우리들은 오늘, 이 베드로가 맞이한 불의 성령을 주고싶는다고 생각합니다. 이것은, 우리들의 욕에서는 없으므로, 누구나 기원해도 좋습니다. 이것은, 우리들의 자신만 때문에가 아니기 때문에, 욱신욱신 기원해도 좋습니다. 이것은, 아껴서는 안되는 기도입니다. 그리고, 오늘도 기원하고 싶습니다.
단, 언제, 어디에, 누구에게, 어떤 식으로, 힘이 주어지는 것일지는, 신의 주권입니다. 예수님이 정합니다. 우리들은 희망을 버리지 않고, 포기하지 않고, 계속해서 기다리는 것입니다.
성령의 밥티스마가 내리도록 기원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