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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esus Christ Glory Church

요한복음 12장12-19절

2018.02.14 16:50

~ "그 이튿날에는 명절에 온 큰 무리가 예수께서 예루살렘으로 오신다는 것을 듣고, 종려나무 가지를 가지고 맞으러 나가 외치되 호산나 찬송 하리로다 주의 이를으로 오시는 이 곧 이스라엘 왕이시여 하더라. 예수는 한 어린 나귀를 보고 타시니, 이는 기록된 바 시온 딸아 두려워하지 말라 보라 너희 왕이 나귀 새끼를 타고 오신다 함과 같더라. 제자들은 처음에 이 일을 깨닫지 못하였다가 예수께서 영광을 얻으신 후에야 이것이 예수께 대하여 기록된 것임과 사람들이 예수께 이같이 한 것임이 생각났더라. 나사로를 무덤에서 불러내어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실 때에 함께 있던 무리가 증언한지라. 이에 무리가 예수를 맞음은 이 표적 행하심을 들었음이러라. 바리새인들이 서로 말하되 볼지어다 너희 하는 일이 쓸 데 없다. 보라 온 세상이 그를 따르는도다 하니라." ~

『그 다음날』이라고, 쓰여져있는것은, 유월절 축제가 토요일의 안식날이었으므로, 그 다음날은 10일의 일요일입니다. 그러므로 이날, 예수님이 당나귀의 새끼를 타시고 예루살렘에 입성한것은, 일요일이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축제에 와 있었던 많은 사람들의 무리는, 예수가 예루살렘으로 오신다는 소식을 들고 모여들었다. 그들은 종려나무 가지를 들고 예수님을 맞으러 나갔다. ∼

이 일요일, 당나귀 새끼를 타시고 예수님이 예루살렘에 입성하는 이야기는, 모든 복음서에 씌어져 있을만큼, 유명한 하루입니다. 그리고 이날을 종려나무의 일요일이라고 부르고, 이날의 다음부터 고난주라고 부르고 있고, 이 종려나무의 일요일 다음 월요일부터 예수님의 고난의 주로서 그리스도교에서 알려져있습니다. 그러므로 이것이,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리시기전의 마지막 일요일이에요. 그리고, 그 최후의 일요일에, 예수님은 당나귀 새끼를 타시고 예루살렘에 들어가시는 것입니다만, 이 이야기는 어느 복음서에도 쓰여져 있지만, 역시 요한의 복음서만은 서식이 특수합니다, 왜냐하면 마태,마가,누가는, 이 이야기전에 당나귀의, 암컷의 당나귀, 아무도 탄적이 없는 어린 당나귀를 마을에 가서, 「주인이 필요합니다. 」이란 이야기가 포함되고 있습니다. 3 복음서에는. 그러나, 요한은 거기를 삭제합니다. 그리고 생략하고, 예수님이 예루살렘에 입성했을 때에, 대신 많은 사람의 무리가 있었다라고 말하고, 다른 복음서에서는 제자들, 혹은 예수님과 유월절의 축제를 축하하기 위해 와있던 여행의 군중들, 이라고 표현합니다. 그러나, 요한만은 예루살렘의 주민들이 모두 와서 모여들었다고 쓰고 있다. 그러므로, 그들이, 예수가 설마 올리가 없다. 이런 위험한 곳에 지명 수배자가 설마 올 리가 없다고 말하면서도, 모든 예루살렘의 주민이 모여들었다는것이다. 벌써 유월절의 축제 때문에, 이미 예루살렘에 들어와 있었던 사람들이, 예수가 오는 소문을 듣고, 한 번 수도에 들어간 후 다시 밖으로 나와서, 예수님이 예루살렘에 들어가는, 그 행렬을 , 마중나가고 있어요. 과연 마중나온 그들은 도대체 누군가, 예루살렘의 주민이란 도대체 누구인가? 왜 요한만은 제자들이 아니고, 함께 여행을 한 사람들이 아니고, 예루살렘의 주민이, 모두 모여서 마중나온 것인가? 그리고, 【나사로】가 죽어서 되살아난 사건의 뒤, 예수님이 완전한 지명 수배자가 되여, 그것을 의회에서 정한 【산헤도린】마저, 이제 해결 수단이 없다고 포기해버릴 만큼, 모두 모여서 마중나온것이다. 그것도,예수님의 예루살렘 입장을 마중나가기 위해서 .

그것은 마치, 왕이 전쟁에서 개선하며, 전리품을 얻고 오는것 같은 상태입니다. 그럼, 그들 많은 군중은 누군가 하면, 【나사로】가 죽어서 되살아난 소문을 들은 사람들이에요. 여기서 당연, 제자들이 그랬습니다. 그러나 제자들은 마음이 들뜹니다. 자기들이 마치 영웅이 된것처럼 아직도, 아무것도 깨닫지 못하기에, 예수님을 향한, 왕이여, 만세하는 소리를 듣고, 마음이 들떠서 의기양양으로 들어가는 제자들. 그리고 【나사로】가 죽어서 되살아난 기적을 보고, 함께 예수님과 여행을 다니던 사람들. 그리고 그 소문을 들은 예루살렘에 살고 있는 사람들도 떠들고, 【나사로】가 죽어서 되살아난 그 기적의 소문을 듣고, 이제 이것이야말로, 이스라엘에 있어서 있을수 없는 사건이며, 기적이었으므로, 그리고 그런 군중들이 나와서, 그것도 일부러 다시 예루살렘에서 밖으로 나와, 예수님을 칭찬하면서, 마중나와 있었다. 정말로 왕의 행진이라 할까, 행렬을 기뻐하는 군중들과, 이제 또한 방면은, 어찌할 바 모르고 있는 바리새인들.

사형을 선고하고 있는 사람들은, 이제 어찌할바 모르고 있는 것입니다. 이제 수단과 방법이 없습니다. 모두가 모두 모여서 예수님을 환영하고 있으므로, 정말로 몹시 혼잡한 예루살렘이었다. 그리고 요한만은, 여기를 매우 간단히 밖에 설명하지 않는다. 당나귀 새끼를 탄 이야기도 생략하고 있고. 그리고, 요한만이 이 종려나무의 일요일, 그리스도교에 있어서 유명한 날. 그리고 그 예수님이 보내시는 마지막 일요일, 이 사건을 요한만은 다른 관점에서, 쓰고있습니다. 다른 복음서와 달리, 그것이, 어디인가?

그것은 앞부분에서 말한 것 같이, 많은 군중이 있었던 것입니다. 다른 3복음은, 『제자들』 이라고 말하는데, 요한만은 모두 모여서 많은 군중이 있었다. 대단히 많은 사람이 예수님을 마중나와 있었던것입니다. 그리고 당나귀의 이야기는 안나옵니다.

∼종려나무의 나무가지를 가지고, 마중하기 위해서 나갔다. 그리고 큰 소리로 외쳤다. ∼

이 종려나무. 다른 복음서는 이렇습니다. 윗도리를 벗고,혹은 길에 가지를 깔고, 예수님이 당나귀의 새끼를 타고, 걷기 쉽도록, 하는 표현이다, 여기, 다른 복음서는 종려나무란 말은 없어요. 다른 복음서에서는 윗도리나 가지를 예수님의 곳에 깔고, 왕을 맞이해 나옴이라고 쓰여져 있는데. 요한만 종려나무입니다. 그 종려나무의 나무가 무엇이었던것가,여기에, 요한이 독특한 서식이 있는것입니다. 그것은, 종려나무의 나무는, 기원전164에 【하스몬】가계가, 【마카바이】전쟁 때, 이【마카바이오스】는, 제사장이며, 장군이었던, 그 사람이 승리하고 예루살렘을 회복시키고, 성전을 되찾은 날이에요. 그 때를 수전절, 성전을 깨끗이 하며 성별하는 축제입니다. 그러므로, 성전을 깨끗이 하는 날이었다.그 【마카바이오스】가 성전을 되찾고, 그 성전으로부터 우상을 쫓아버리고, 하나님의 제단을 성결하게 한 날이에요. 그 성전을 깨끗이 하기위해 사용한 것이 종려나무의 나무가지입니다. 그 종려나무의 나무가지로 성전을 깨끗게 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스라엘에 있어서 종려나무의 나무라고 하면, 성전을 회복하고, 독립 전쟁에서 승리하고, 이스라엘을 독립 국가로서, 원수들에서 되찾았다고 하는 표증이며 상징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이 개선이, 그것들의 사건과 같은 취급을 하고 있는 것이다, 지금. 그리고 요한만은, 이 군중이 누구이었는지를, 이 종려나무에서 표현하고 있어요. 떠들며 「호산나! 호산나! 」하고 외치는 이 군중들.

"호산나"는, 「자, 구해 주세요. 우리를 구해 주세요. 」이런 뜻이다. 그러므로 그 때의 독립 운동, 【마카바이오스】가 이루킨 혁명. 그리고 예루살렘의 성전을 되찾아 준 왕. 그 우리들을 지금 로마에서, 이 지배로부터, 다시, 이 유대민족, 우리들을 되찾는 날. 자유를 회복하고, 개방을 외치는 날이라는 의미가 있었다. 종려나무는 상징이었다. 당시 이스라엘의 사람에게 있어서는.

그러므로, 한번 더 예수가, 【마카바이오스】와 같은 왕이 되고, 로마나 그 원수들로부터 완전히 우리들을 구해내는, 정치적, 무력적인, 왕이었다. 그리고 「호산나」는 무엇입니까? 「실지로 자기들을 독립시켜, 무력적으로 정치적으로 개방해 주는 왕이 오셨다, 호산나! 우리들을 구해 주세요. 」이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요한만은 종려나무를 표현하고 있고, 그것을 회상시키고 있다. 그때도, 지배하에서 예루살렘을 되찾은 역사가 일어났다. 오랜 세월 이스라엘은 앗시리아(Assyria)에 의해,또 바빌로니아에 의해 나라가 빼앗긴 것을, 다시【마카바이오스】가 되찾은 독립 운동, 혁명, 그리고 해방.

그리고, 한번 더 성전을 되찾은 그 날을 상기하고, 한번 더 무력적인 정치적인 왕이 왔다고 외쳐, 「우리들을 구해 주세요. 」라 떠들고, 미친듯이 왕의 행렬에 나열해 있는 이 군중이, 누구이었는지를, 이 종려나무의 비유로, 요한은 표현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종려나무를 손에 들고, 부르고 있는 노래가 이렇습니다. 「호산나! 축복 있어라. 주님의 이름으로 오신 분에게. 이스라엘의 왕에게. 」 이것은, 시편에서도 찬양되어 있어서, 구약에도 찬양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여기에서, 정말로 왕이 온 거다, 무력적으로 개방해 주는 왕이 온 것이다. 이스라엘 나라가, 예루살렘의 주민이, 순례에 온 모든 사람이 그러했다.

【나사로】를 죽은 사람가운데서 되살아나게 할 만큼의 힘. 그 정도의 기적을 행 할수 있는 사람이에요. 그런 기적을 행한 사람은 예전에는 없었습니다. 그러므로 이번은, 【마카바이오스】이상의 왕으로서, 우리들을 구해 줄 것이다. 이제, 굉장한 「호산나! 호산나! 」이란 큰소동인것이다, 예루살렘 수도가.… 그러므로, 【산헤도린】회의원들이 방법이 없어요. 모두가 떠들며,그리고 한번 더 구해 줄지도 모른다는 예고까지 들리니, 누가 손을 내놓을 수 있었을가요?

그리고 다른복음서에서는,『예수님이 당나귀의 새끼를 타고』하는, 예언대로이었다고 하는것에 대해서 요한만은 당나귀의 새끼에 관한 설명이 한번도 없는 것은, 예수님은 군중들의 소리를 거절하고 있다는 뜻이다. 왕이라면 훌륭한 마차를 타서 갈것이지만, 예수님은 거절해서 당나귀의 새끼를 타셨다.요한의 표현은 여기에 있다. 다른 복음서에서는 예수님이 당나귀의 새끼를 타서,는 규약의 예언대로 왕이, 구세주가 당나귀의 새끼를 타서 입성하는 것이다,란 표현인데, 이 요한만은, 이 큰 소동을 거절하고 있는 예수님을 나타내고 있는 것입니다. 『나는 무력적으로, 정치적으로 온 왕이 아니다. 』이란 표현입니다. 예수님의 거절의 주장. 예수님의 [에고 에이미]에요. 왜냐하면, 이스라엘의 왕이라 불리우는것은 틀린말이 아닙니다. 진실입니다. 예수님은 이스라엘의 왕이었어요. 아니, 전세계의 왕이에요. 그러므로, 【본디오.빌라도】가 「당신은 이스라엘의 왕입니까? 」이라고 들었을 때, 「저는 당신이 말하는 대로, 이스라엘의 왕이다. 」이라고 대답하셨습니다. 예수님 자신도 직접 말씁하십니다. 그러므로, 이 말을 부정한것이 아닙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본디오.빌라도】에게, 「저는 진리를 증명하러 왔다. 」고 말한 것입니다.

「진리를 증명하기 위해서 온 왕이다. 」이라고 그 때도 대답하셨는데. 이 군중들은 그 런 이해가 아닙니다. 정치적, 무력적으로 실제로, 현실적으로, 이스라엘을 되찾아 주는 왕입니다. 여기에서, 호산나를 외치고 있는 군중들은. 그래서, 예수님은 거절하고 있는 것입니다. 「저는, 그런 【마카바이오스】와 같은 사람이 아니다. 」 「무기을 사용하지 않으면 구할수 없는 그런 인간이 아니다. 」 정치력이 없으면, 구해낼수 없는 무력한 인간이 아닙니다, 예수님은. 진정한 왕입니다. 진리를 증명하러 왔다. 진실의 왕이 지금 입성하고, 최후의 일요일을 예수님은 장식하고 있는것이지만, 그것은, 당나귀의 새끼를 탄 것은, 왕이, 이스라엘의 구세주가 당나귀의 새끼를 타고 온다는 예언이기 때문이가 아니라, 거절입니다. 인간의 음모의 거절입니다. 인간이 요구하는것의 예수님의 거절입니다.

그러므로, 당나귀 새끼를 탔다는 요한만의 표현이다. 그리고,

∼예수는, 당나귀 새끼를 찾고, 그걸 타셨다. 그것은 다음과 같이 씌어져 있는 대로이었다. 「두려워하지 마라. 시온의 딸. 보아라. 당신의 왕이 오신다. 당나귀의 새끼를 타고 오신다. 」 ∼ 요한은 이렇게 썼다.

다른 복음서는, 여기 구절이 【스가랴】서를 인용하고 있는 것입니다.

【스가랴】9장 9-10절∼시온의 딸아. 크게 기뻐해라. 예루살렘의 딸아. 즐거워 외쳐라. 보라. 당신의 왕이 네게로 오신다. 이분은 의로우시며, 구원하시는 왕이며, 겸손하시어 나귀를 타고 오신다. 그것도, 암컷 나귀의 새끼를 타고 오신다. 나는 전차를 에브라임에서, 군마를 예루살렘에서 없에겠다..전쟁에서 쓰이는 활들은부러질 것이다. 이분은 나라들에게 평화를 알리고, 그 지배는 바다에서 바다까지, 유프라데스 강에서 땅 끝까지 미칠 것이다. ∼

다른 복음서는, ∼시온의 딸아. 크게 기뻐해라. - 겸손하시어 나귀를 타고 오시는 분. ∼ 마태•마가•누가는 여기를 인용하고 있어요. 그리고, 세계의 끝까지, 이스라엘의 권력이나 이스라엘이라는 나라가 그 권력을 넓혀 간다. 호산나하고 외친 군중은 여기를 크게 기대하고 있다. 그러니, 다른 복음서는 여기를 인용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요한만이 여기를 인용하지 않고 있다. 여기도 물론 인용하면서도, 다른 구절을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스바냐】3장 14-17절∼시온의 딸아. 기뻐 노래하여라. 이스라엘아. 즐겁게 외쳐라. 예루살렘의 딸아. 마음껏, 기뻐해 즐거워하여라. 주는 너에 대한 심판을 제거하고, 네 원수를 쫓아 버리셨다. 이스라엘의 왕이신, 주께서 너와 함께 계신다. 네가 다시는, 해를 두려워하지 않는다. 그 날, 예루살렘은 이렇게 말할 것이다. 시온의 딸아. 두려워하지 마라. 낙심하지 마라. 네 하나님, 주는, 너안에 계신다. 능력의 하나님께서 너를 구해 주실 것이다. 주께서 너를 기뻐 즐기시며, 그 사랑 안에서 편히 쉴 것이다. 주는 너를 보고 노래 하며 너를 즐거워하실 것이다. ∼

3복음서는 【스가랴】, ∼ 기뻐 춤 춰라, 나귀의 새끼를 타고 오신는 분을 ∼여기를 인용하고 있지만, 요한은 여기를 인용하면서, 【스바냐】를 인용하고 있어요. 【스바냐】의 어디를 인용하고 있을 것인가? ∼시온의 딸아. 기뻐 노래 하여라 ∼는 같은데, 16절, ∼ 그 날, 예루살렘은 이렇게 말할 것이다. 시온의 딸아. 두려워하지 마라. 낙심하지 마라. ∼ 여기를 인용하고 있는 것입니다. 요한만은, 【스바냐】를 보태고 있다. 왜인가? 원문에는 이렇게 쓰여져있다.당신의 한복판에, 오시기 때문이다. 이스라엘의 왕은, 당신의 한복판에 오신다는것은, 무엇입니까?.

세계의 끝, 땅의 끝이 아니라, 『당신 안(속)에』 왕은 오신다. 이렇게 요한은 인용했다. 그러므로, 두려워하지 마라,이었던 것입니다. 「시온의 딸아. 기뻐 춤춰라. 」이란 표현은 다른 복음서이다. 이 요한은【스바냐】를 인용하고, 「두려워하지 마라」고 했다. 왜 두려워하지 마라 인가? 당신의 안에 이스라엘의 왕이 오시기 때문입니다. 이 말은, 요한은, 나 마음속에 왕이 오신다를 인용하기 때문이다. 다른 복음서와는 틀리는 것입니다. 그것은, 요한이 자신이 고백하고 있습니다.

요한12장 16-17∼ 제자들에게는 처음에 이 말씀을 깨닫지 못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영광을 받으신 뒤에야,비로소 이 말씀이 예수님에 관해 기록된 것이라는 사실과, 사람들이 예수님께 이렇게 하였다는것을, 그들은 알게 되었다. 예수가 【나사로】를 무덤으로부터 불러 내시고,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라실 때에 예수와 함께 있던 많은 군중들은, 그 것의 증언을 했다. ∼

요한만은, 이 말을 보태고 있다. 다른 복음서에는, 그것이 없습니다. 요한만은, 이 종려나무의 일요일이 무엇이었는가, 처음에는 전혀 몰랐다. 예수님이 왜 이 일을 하셨는지, 몰랐던것이다. 그러나, 영광을 받으신 후에야, 우리도 깨달았다고, 요한은 하고 있는 것입니다. 영광은 언제입니까?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려서, 죽어서 부활하신후, 성령을 받았을 때에 비로소 제자들은 알았다, 처음으로 예수님이 무엇을 하셨는지 이해할수가 있었다.이것뿐이 아닙니다. 예수님이 죽은 사람가운데서 부활하신다는 이야기를 할 때도 그러했고, 수전절때도 예수님은,비둘기를 파는 사람이나 환전인의 대를 부수고, 회초리로 치고,그리고 예수님이 모두 내쫓으시며, 「이 성전은 46년 걸려서 지었지만, 나는 이것을 부수고, 3일로 세운다」고 한 말을, 처음으로 제자들은 알았다는, 설명을 보태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3일만에 부활하셨을때, 「다시 성전을 세운다」는 뜻을 깨달았다고 요한은 말하며, 여기에서도, 왜 예루살렘에 입성하셨는지, 그 때는 몰랐지만, 영광을 받으신 후, 예수님이 왜 이 일을 한 것일지 자기들이 드디어 알았다. 그러므로, 【스바냐】를 인용하고 있는 것입니다.

예루살렘에 그냥 들어온 것은 아니어요, 예수님은, 이스라엘의 왕은, 예루살렘의 성전, 46년 걸려 지운 성전을 되찾기 위해서 온 것이 아니라, 우리들의 마음 속에 이스라엘의 왕은 오신다. 그러므로, 나귀의 새끼를 타고, 그 호산나를 거절하고 있는 것이다. 그런 【메시야】가 아니다고 하는 예수님의 주장을 여기서 표현하고, 종려나무를 표현하고, 그 때는 몰랐지만, 지금이라면 안다. 예수님이 무엇 때문에 오셨는지? 이 후, 십자가에서 돌아가시는 것이 정해져 있었던 예수님이 왜 【나사로】를 되살아나게 한 것일지를 말하고 있어요. 이 사건은, 예수님이 죽는 1주일전입니다. 그 조금 전에, 왜 【나사로】의 사건이 일어납나까? 요한은, 드디어 아는 것입니다. 이것은 상징이었던 것입니다. 【나사로】의 죽음,그리고 되살아나고, 무덤으로부터 살아난 【나사로】는, 예수님이 이제부터 하시는, 정말의 죽음, 정말의 부활을 상징으로 보이셨다. 그러므로, 【나사로】의 소문을 들은 모든 이스라엘의, 이 예루살렘의, 주민들이 모두 모여서 나온 이유를, 요한은 지금 여기에서 말 하고 있으므로, 다른 복음서와는 다른 것입니다.

요한은 그 날 목격했지만, 그 뒤에 이것을 썼기 때문에, 예수님이 무엇을 하러 오셨고, 무엇을 하고 있으며, 저 종려나무의 일요일, 【나사로】의 죽음에서 살아난 사건 때, 그리고 성전을 성별 하여, 비둘기를 파는 사람이나 환전인들을 내쫓은 그 뜻을 전부 상기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이 성경에 다 씌어져 있는 것을 생각한것이다. 예수님에 대해서 성경에 전부 예언되고 있었다. 뒤에서 알아 가는 것입니다. 그 때는 둔해서 둔감해서, 완전히 알아차리지 않았다. 예수님이 하시는 것을 깨달을수 없다. 이제부터 죽음을 향해 가는 예수님입니다. 그 것을 제자들은 모르고, 기뻐서 어찌할바 모르고, 자기들도 주민들과 같아서, 예수님이 무력적으로 정치적으로 구해 주는 것이라고 생각하고, 누가 제일이냐 다툼을 하고, 한심한 모습으로, 저 십자가앞에서도 도망쳐 다닌, 자기들을 상기하고 있는다. 아무 것도 모르고 있었다. 아무 것도 깨달을 수 없었다. 성경를 읽어도 전혀 알수가 없었던것이다. 성경을 들어도, 예수님이 직접 말씀하셔도 아무 것도 몰랐던 제자들이다.

그러나, 후에 되어서 예수님이 하신 것을 알게 된 요한은, 설명을 보탰다. 왜 【나사로】가 죽어서 살아난 것인가? 그리고 예수님의 뜻은 무엇이었는가? 왜 예루살렘에 입성하실 때, 당나귀의 새끼를 탔을가? 왜 예수님은 그 날, 이스라엘의 왕이, 진실의 왕이, 우리 안에 오시기 위해서 육체를 입으시고, 이 세상에 오신 것인가? 그분은 예루살렘이 아니라, 우리들의 안에, 이방인에게까지 오신 왕이었다라고, 요한은 여기에서 정말로 이야기하고 싶습니다. 그러므로, 요한만은, 【스바냐】를 인용하고, 「두려워하지 마라, 시온의 딸아. 」하며, 왜? 당신의 한복판에, 이제부터 이스라엘의 왕이 오시기 때문이다. 이것을, 요한만은 표현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나사로】의 죽음과 살아남을,또 여기에서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상장이었던 것이다. 예수의 십자가 죽음과 부활의 상장으로서, 【나사로】는 살아난 것이다. 그것을 들은 예루살렘의 주민이 모두 모여 온 것이다.하고 요한은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19절∼ 거기에서, 바리새인들은 서로 말했다. 「어떻게 된 거냐. 우리 계획은 하나도 잘 되지 않고 있다. 보세요. 세상은 저 사람을 따르고 있지 않습니까. ∼

계기는, 전부 【나사로】의 죽음이었던 것입니다. 여기에서, 나사로의 소문을 듣지 않았으면, 이런 사건은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나사로】가 죽어서 살아난 소문을 들은, 여기의 모든 주민이, 모두 모여 왔다. 예수님이 왜 【나사로】를 죽이시고, 왜 살아나게 했는지가, 나중에서 제자들은 알아요. 그러므로, 예수님이 【나사로】가 죽었어도, 4일동안 안 가셨지 않아요? 그리고 나는 이 것을 기뻐한다고 하셨습니다. 그래서, 이 병은 죽음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나 영광 때문이라는 말씀을 하시고, 그리고 마르다, 마리아에게 내가 부활이며, 생명이다. 너는 믿으냐? 믿는다면, 당신은 죽어도 사는 것이다고 예수님이 【나사로】의 죽음의 현장에서 반복하며 말하셨다. 나야말로 부활이며, 나야말로 생명이다. 그러니, 【나사로】가 죽은 것을 나는 기뻐한다. 보세요, 모든 주민이 【나사로】의 죽음으로, 예수님을 맞아 믿었습니다. 그리고, 살아난 것을 그처럼 기뻐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해의 대제사장 가야바는, 스스로는 무엇을 말하고 있을지를 알지 못하면서, 예언한다. 민족 전체가 멸망한다는 것보다는 한 사람이 백성을 위하여 죽는 것이 더 낫다는 사실을 깨닫지 못하십니까? 그것이 가야바 스스로 무엇을 말하고 있는 것인지 몰라도, 그것이 예언이 되어버렸다. 하나님께서 말시켜버렸다. 이 주민들은 뭡니까? 예언해버리고 있는 것입니다. 호산나, 호산나, 이스라엘의 왕이 오셨다. 그들은, 스스로 뭘 하고 있을지 모르지만, 결국 그들은 자기들의 입에서, 진실로 이스라엘의 왕이 온 것을, 알지 못하면서도, 예언해버리는 것입니다. 그리고, 정말로 이 대제사장이나 【산헤도린】회의원들이, 말한 대로입니다. 「자기들은 무엇을 하는 것인가? 모두가 그 사람으로 가고 있는데.」 말 그대로, 그 몇십년후, 그들의 직분은 없어져 가는 것입니다. 그들의 성전은, 그들이 소망을 둔 이 성전은, 로마인에 의해, 절멸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성전숭배는 이제 끝나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진실한 왕으로서 오셨기 때문에. 어디로? 예루살렘이 아니라, 우리들의 마음 안에 오셨습니다.

이것을 요한의 복음서는, 다른 복음서에서는 쓰이지 않고 있는, 요한만의 독특한 표현으로, 정말로 이날 예수님이 무엇을 하러 오셨던 것인지를 이야기 하고 있으며, 그것의 모든 계기가 【나사로】의 죽음에서 살아남이었다. 그것을 계기로 예수님은, 모든 사람이 예수를 향해서 찬양과 노래를 부르도록 하시는 것입니다. 모든 예루살렘의 주민이, 무엇을 하고 있는지 그들은 모릅니다. 그러나, 예수는 시켜버리는 것입니다. 모든 입이 예수님을 칭찬해 노래 부르게. 시편과 같이, 다윗과 같이 . 종려나무의 가지를 가지고, 왕이 왔다고 기뻐하고, 호산나, 나를 구해 주세요. 예수님은 그 것을 말 시키시는 것입니다. 사람들의 입으로부터. 왜입니까? 말 그대로 찬양하며 경배하는 왕이 정말로 오셨기 때문입니다. 모두 몰랐다. 그 당시, 제자도 몰랐다. 아무도 몰랐다. 그렇지만, 오셨습니다. 참된 왕이. 진리를 증명하는 왕이.

참으로 전세계의 왕이라 불리우는 유일한 분이, 구속하로 오신 것입니다.

그것은, 영광을 받으시는 그 날, 십자가 위에서 성취시키십니다. 그것을 축하하는 최후의 일요일이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이날부터는, 다음 날부터 고난주, 예수님의 십자가를 지는 시간이 시작됩니다.

우리들 기독교는, 이날이 유명합니다. 종려나무의 일요일. 그리고 고난주,그리고 부활절.

이사건은 기독교에 있어서는, 크리스마스이상의 날입니다. 크리스마스이상의, 정말로 감사하는, 은혜의 날이에요. 그러나, 우리들은 알고 있는 것인가? 과연 요한과 같이 나중에 깨닫고 있는 것인지요? 우리들은 정말로 그 것을, 진지하게 지금 실감하고 있는 것인가? 예수님이 죽기 위해서 오셔서, 그리고 그것은 예수님이 유대인들의 원수를 멸망시키기 위해서 오셨던 것은 아닙니다. 예수님은 무엇을 한 것입니까? 전인류의 고민, 죽음이에요. 전인류가 피할 수 없는 죽음, 전인류가 겪어야 할, 저 죽음이에요. 저 죽음을 향하여, 【나사로】야, 나와라고 말하십니다. 그 순간에 죽음은 의미를 못가지게 되고, 죽음은 힘을 잃은 것입니다. 죽음은 권력을 잃은 것입니다. 무슨? 사람을 죽이는 능력이에요. 사람을 죽이는 권리를, 예수님의 죽음은 빼앗겨버린 것입니다. 예수그리스도의 죽음에 인해서 죽음의 능력을 삼키고 말았습니다. 참된 진리를 증명하는 왕으로서 오신 예수님의 하시는 일은, 죽음을 멸망시키러 오셔서, 모든 인간이 피할 수 없는, 저 죽음을, 생명이 삼켜 버린 것입니다.

그러므로, 【나사로】의 죽음때, 몇 번이나, 말씀하십니다. 나는 부활이며 생명이니, 나를 믿는 사람은, 죽어도 사는 것이다. 아무도 믿지 않았으며, 아무도 이해하지 못했지만. 예수님은 이것을 증명하러 오셨던 분입니다. 그리고 한복판에, 이스라엘의 왕으로서 지배하러, 우리들 가운데에 오신 분. 이것을 요한만은, 정말로 예수님이 무엇을 하러 오셨는지를 증명하고, 복음서를 썼으며, 그 때 제자들은 아무 것도 깨달을 수 없었지만. 지금이라면, 드디어 예수님이 무엇 하러 오셨던 것인지를 알게 되고, 그리고 요한의 복음서는, 씌어져 있습니다. 다른 복음서하고는 표현의 방법이 다르는 것입니다.

우리들은, 제대로 알지 못하면서, 「주여, 주여」외치고 있어요. 그리고 예배하고, 찬양하고, 기도하고, 아무 것도 모르면서. 이 주민과 무엇이 다릅니까? 흥분하고, 자신을 가난으로부터, 비참한 상황에서 구해 줍니까? 자신을 살아 있는 동안 슬프지 않게, 그리고 돈이나 여러 행복을 위해서, 「호산나」하고 외치는 것이 아닙니까? 정말로 죽음을 파괴하러 온, 진리의 왕으로서 우리는 받아들이고 있는 것인가요? 이해해서 「호산나」하고 외치고 있는 것인가요. 그리고 겸손하게, 예수님 앞에서, 이 은혜의 감사함을 이해하고 있는 것인지. 이 주민과 같습니다. 마음이 들뜬 제자들과 같습니다. 그리고, 나중에도 깨닫지 않아요. 그만큼 둔합니다. 이 시대는.

파스칼은 팡세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인간은 생각하는 갈대다. 」 이것은, 유명하지만 진실의 의미를 아무도 모른다. 파스칼은 당연 그리스찬이에요. 그리고 이 팡세는 그리스찬에게 씌어진 편지에 1구이지만, 이 1구는 이래요. 강(川)에 흔들리는, 약하고, 아무런 일도 할 수 없는 갈대에요. 이것이 인간이라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정말로 인간은 약하고, 인간을 멸망하려면 우주만물의 힘은 필요없습니다. 한방울의 물로 죽일 수 있고, 1개의 수증기로 죽일 수 있을 만큼, 갈대는 연약하고, 흔들흗들 흔들리고 있어서 아무런 보증도 없는, 아무런 힘도 없는 존재다. 그러나, 이 흔들리는 약한 인간이라도, 생각하는 존재,라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을 죽이려면, 우주는 필요없지만, 우주보다 더 귀중한 숭고한 존재다. 왜냐하면, 생각하기 때문이다. 무엇을 생각하느냐 하면? 자신이 죽는 것과, 우주만물이 자신보다 우수하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인간의 생각은 여기에서 시작되고 있다. 그러므로, 이것을 생각하는 인간은, 우주만물보다 귀하다는 것이다. 고민하면서 생각하는 힘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이 생각은, 돈 벌거나 부유하게 살기 위한 생각이 아니다. 자신이 죽을 수 밖에 없는 존재로서, 우주만물의 어느 존재보다도 뒤지고 있음을 알고 있다는 것이다. 여기서부터 생각이 시작되여 있기 때문인 것이에요. 그러므로, 인간은 생각하는 갈대, 우주만물보다 숭고한 존재로 될 수 있다는 말이다. 이것이, 파스칼의 팡세 1구입니다. 그가 무엇을 말하고 있는 것입니까? 적어도 그리스찬이라면, 예수그리스도의 십자가 죽음을 말하고 있음에 틀림없는 것입니다. 우리들은 죽을 수 밖에 없습니다. 우주만물의 어느 피조물보다 약합니다. 스스로, 아무 것도 할 수 없다. 스스로는 선한 생각이 없는 존재에요.

그러나, 왜 우리들은 생각할 수 있는 것인가? 우리들은 성경이 있고, 우리들은 예수그리스도의 십자가 죽음의 죄 용서와 ,부활의 능력을 받고 있기 때문에, 우리들은 죽는 존재이었지만, 죽어도 산다고 말하는 것을 알고 있는 거에요. 이것이, 파스칼의 팡세 1구인데, 자기들이 죽는 존재인 것을 모른다. 영생이 뭔지 모른다. 왜 생명을 얻었는지 모른다. 단지, 이러한 것입니다. 「호산나, 호산나, 예수. 」 이것을, 흥분해서 외치고 있어요. 자신의 무언가, 욕심을 위해서. 자신의 안전이나 안정을 위해서. 자신이 비난받지 않기 위해서, 비참해지지 않기 위해서. 단지, 호산나, 예수라고 외치고 있는 것 뿐입니다. 자신이 죽는 존재로, 저 갈대와 같이 약하고, 무력해서 무지해서, 아무것도 자신 스스로는 할 수 없는 존재라고 생각할수 없어요. 예수 없이는 , 아무 것도 아닌, 짐승과 다름없다. 정말로 호산나입니까? 진실의 의미로 호산나라고 외치고 있는 것인가?

우리들은 과연 생각하는 갈대인가? 예수님이 무엇하러 오셔서, 지금 현재도 무엇을 하고, 무엇을 기대하고, 무엇을 우리들에게 요구하고 있는지도 모른 채, 호산나하고 외치고 있다. 팡세 말 처럼, 우리들에게서는 아무런 좋은 것도 없습니다. 연약하게 흔들리는, 저 갈대와 같이 . 정말로 무력하며 하나님을 모르는 무지입니다.

그러나, 우리들은 죽어도 사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왜? 예수그리스도의 십자가 희생에 의해. 그러나 정말로 이해하고 있는 것인가? 주일 예배를, 저 종려나무의 일요일이, 예수님의 최후의 일요일이, 부활하는 일요일이, 얼마나 경사스러운 일요일이었는지 알고 있습니까? 그것은 우리들의 한복판에 이스라엘의 왕이 오셨기 때문이지요. 그 이스라엘의 왕을 맞아들인, 저 일요일. 정말로 예수님이 저 3일후에 부활하신 일요일이, 얼마나 은혜로운지, 인간에 있어서는, 이 구원이외에 그 어떤 방법도 없는 은혜인가요? 그러므로, 이해 안하면서 호산나하고 외치는 것이 아니라, 생각하는 갈대가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들은 이 은혜가 어디에서 왔는지를 다시 생각할수 밖에 없습니다. 언제? 날마다 생활 안(속)에서.

그리고, 예수님에게 더 이상 실망 시켜서는 안됩니다. 자기 일밖에 생각하지 않고. 자신의 은혜만, 자신의 구원만 생각해서는 안된다. 그리고, 정말로 자신의 욕망 때문에만, 호산나하고 외치는 자신. 이것과, 이제 우리들은 정말로 싸워야 하며, 저 요한이, 그 때는 깨닫지 않았지만, 지금은 회개하고, 그 은혜를 저는 깨달은 것이다,라고 말한것 같이 말해야 됩니다. 그리고 생활 속에서, 호산나하고 외치는 것은, 이웃 사람에 대하여에요. 이웃 사람에 대하여 호산나하고 외치지 않는 인간은, 의미가 없습니다.이웃 사랑을 가지고 이 고마운 복음을 전해야 합니다. 혼자,호산나 외쳤다고 의미 없습니다. 그 호산나, 이스라엘의 왕이 제 안(속)에 왔다고 말하는 호산나를, 이웃 사람에게도 들려주는 것입니다.

우리들은 뒤에서 깨달을 일도 없습니다. 둔합니다. 제가 그래서, 이 교회도 그렇습니다. 요한과 같이 , 뒤에서도 후회하는 적이 없다. 이것이 우리들이 제일인 문제점입니다. 다른 크리스천이나, 다른 교회를 판단할 필요는 없습니다. 제 한복판에 오셨던 예수그리스도를, 마음속으로부터 예배하고 있는 것인가, 그것이 가장 중요한 원리이기 때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