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Yokohama Glory Church

요한복음 11장45-57절

2018.02.14 16:40

~ 마리아에게 와서 예수께서 하신 일을 본 많은 유대인이 그를 믿었으나, 그 중에 어떤 자는 바리새인들에게 가서 예수께서 하신 일을 알리니라. 이에 대제사장들과 바리새인들이 공회를 모으고 이르되,

「 이 사람이 많은 표적을 행하니 우리가 어떻게 하겠느냐? 만일 그를 이대로 두면, 모든 사람이 그를 믿을 것이요, 그리고 로마인이 와서 우리 땅과 민족을 빼앗아 가리라.」 하니, 그중의 한 사람이 그 해의 대제사장인 가야바가 그들에게 말하되, 「너희가 아무 것도 알지 못하는도다. 한 사람이 백성을 위하여 죽어서 온 민족이 망하지 않게 되는 것이 너희에게 유익한 줄을 생각하지 아니하는도다.」 하였으니, 이 말은 스스로 함이 아니요, 그 해의 대제사장이므로, 예수께서 그 민족을 위하시고, 또 그 민족만 위할 뿐 아니라, 흩어진 하나님의 자녀를 모아 하나가 되게 하기 위하여 죽으실 것을 미리 말함이러라. 이 날부터는 그들이 예수를 죽이려고 모의하니라. 그러므로 예수께서 다시 유대인 가운데 드러나게 다니지 아니하시고, 거기를 떠나 빈들 가까운 곳에 에브라임이라는 동네에 가서, 제자들과 함께 거기 머무르시니라. 유대인의 유월절이 가까우매 많은 사람이 자기를 성결하게 하기 위하여 유월절 전에 시골에서 예루살렘으로 올라갔더니, 그들이 예수를 찾으며 성중에 서서 서로 말하되, 「너희 생각에는 어떠하냐? 그가 명절에 오지 아니하겠느냐?」 하니, 이는 대제사장들과 바리새인들이 누구든지 예수 있는 곳을 알거든 신고하여 잡게 하라 명령하였음이러라. ~

나사로가 죽어서 4일이 지났는데도 다시 살아났다. 일본 성경은 그 예수님께서 하신 일을 보고서 많은 사람들이 예수를 믿었다고 있다. 여기서 『많은 사람』라고 표현하지만, 나사로가 살아난 현장을 본 사람들은 모두 믿었다는 의미다. 그리고 대부분의 사람들은 죽은 사람이 다시 살아난 사건을 놀라며, 더 놀란것은 4일이나 지난 후이었기에, 이 사건은 역시, 유대인 안에서 큰 사건이었다.

예수님이 메시아임을 믿을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거기 현장에 있었던 사람들은 전원 믿은 것입니다. 그러나,

∼ 그러나 그들 중 어떤 유대인들은 바리새인들에게 가서 예수님께서 하신 일을 일러바쳤다. ∼

이 어떤 유대인들은, 그때 현장에 있었던 사람이 아닙니다. 이 사건 이후 그 소문을 듣고 믿은 사람이 가득했던 속에서, 그 소문을 들어도 믿지 않는 유대인이 바리새인들에게 가서, 이 사건을 보고하러 갔다.

현장에서 본 사람은 예수님의 영이 대단히 일하시는 것 때문에, 당연 구원 받아 모두 믿었습니다. 현장에서 본 사람이 한 것은 아닙니다.

∼ "그러자" 대제사장들과 바리새인들은 산헤드린을 열어 의견을 말했다. ∼

이 의회는, 【산헤드린】입니다. 우선 제사장이 의장입니다. 즉 그 해의 대제사장이 의장이 됩니다. 그리고, 율법학자, 장로, 제사장들의 3대계급의 대표자가, 이 【산헤드린】에 참석합니다. 그리고, 이 의회는 70명으로 조직되어 있다.

그 70명이 모이고, 의장이 그 해의 대제사장이라 정해져 있다. 바리새파는 율법학자, 장로들이며, 사두개파는 제사장들이고 두파로 나누어져 있다. 그 【산헤드린】을 긴급 소집한 것이다. 그러므로, 평소의 의회가 아니라, 특별히 소집된 것입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의 소문을 듣고 고자질한 사람들이 오고, 이것은 큰 일이다, 라고 소동이 일어나, 통상 의회가 아닌 모임이었다. 무슨 의제가 올랐는가 하면, ∼ 「어떻게 하면 좋겠습니까? 이 사람은 많은 표적을 행하고 있다. 만일 우리가 이 사람이 하는 대로 계속 내버려 둔다면, 모든 사람이 그를 믿을 것이다. 그러면 로마 사람들이 와서 우리 땅과 민족을 모두 뺴앗을 것이다. 」하는 의제이었다.

자기들은 아무런 효과도 성과도 올릴 수 없다. 그럼에도, 그 사람은 많은 표적을 보이고, 많은 민중을 데리고 가고 있지 않은가, 하고 두려워했습니다. 산헤드린은 예수님께서 행하신 일을 의심하지는 않고 있다. 나사로가 살아난 것을 믿고 있었고 많은 표적을 행하고 있다고 스스로 인정하고 있다. 메시아일지도 모른다고, 자기들의 마음 한 구석에 있었다. 지금까지의 예언자들과 틀리다, 이제까지 폭동을 일으킨 민족주의자들과는 다른, 테러 행위와 같은 과격파가 아니다. 정말로 하나님께서 보내셨다고 이제, 인정 않을 수 없지요? 죽은 사람이 살아나고, 누가 이런 일을 하고, 소경의 눈을 뜨게 한 기적은 아무도 행하지 못했다. 이런 큰 표적을 행하는 예수님을 부정할 수 없는 데까지 와버렸다. 그럼에도, 그들이 지금 화를 내어 의제로 하고 있는 것은, 민중이 예수에게 가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대중이 예수파가 되어 버렸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로마인이 와서, 자기들의 땅을 빼앗아 가는 것이 아닐까라고 걱정했다. 이 땅이라 하는 것은, 북쪽 이스라엘을 말하지 않는다. 당연히 성지, 예루살렘을 말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성전이다. 이 하나님의 성전을 로마인에 빼앗기는 것이 아닌가 하는 의제입니다. 많은 대중이란 누구를 말합니까? 유대인입니다. 많은 유대인과 예루살렘 성전을 로마인에게 빼앗긴다. 로마가 이 나라를 지배하고 있지만 유대인들의 종교의 자유는 아직 요인하고 있어서, 정치적으로는 통치하면서, 종교적으로는 금지되지 않았다.

이 【산헤드린】은 기본적으로 종교회의이다. 소위 유대교회의다. 이 유대교회의란, 또한 예루살렘 성전, 그리고 거기에 소속하는 유대인의 대중들, 실제로 이것은 무엇입니까? 자기들의 의석을 획득하기 위한 모임이다. 자기들의 권력유지, 제사장의 지위를 말하고 있는 것이다. 더구나, 바리새파는 율법학자, 장로들이고, 민중으로 인기 있는 사람들이다. 존경 받고, 선생님이라 불리운 사람들. 그 지위를 잃어, 민중들이 예수에게로 몰려가, 로마인들이 와서 자기들의 권력을 빼앗기면, 자기들에게 남는 게 없다는 분노이다. 자기들의 권력의 확보, 입장과 신분의 확보를 지금 의제로 해서 오히려 예수님의 선한 행위를 인정하기 때문에, 자기들의 권위가 위험하다는 것이었다.

∼ 그러나, 그들 중에 가야바라는 한 사람이 있었다. 가야바는 그 해의 대제사장이었다. 가야바가 그들에게 말했다.「여러분들은 아무 것도 모르시는군요.」 ∼

이 사람은 아까 말한 것 같이, 【산헤드린】의 의장입니다. 제사장은 사두개파에 속한다. 이 사두개파는 그 당시의 요세포스라는 바리새인의 소견에서도 알 수 있듯이, 사두개파는 야만인이며 입이 걸다. 그래서 의회 중에도, 사두개파끼리 야유를 퍼분다고 한다. 그 의장이, 그 해의 대제사장이었던데, 이 가야바의 본명은 요셉•가야바, 그는 기원 18년∼38년에 대제사장의 자리에 있었던 사람이다. 그러나 대제사장직을 20년이나 오랫동안 맡은 사람은 없었다. 게다가 예수님께서 오신 그 시대의 대제사장이었던 것이다. 가야바는 이 십자가의 사건이 일어나는 그 해의 대제사장이며, 그리고 의장이다. 거기에다 사두개파는 야만인이다. 원래 입이 걸다. 그 의장의 입장은 의회 중에 멋대로 의견을 내어서는 안 된다.

의장은 의회 속에서 서로 나온 의견을 정리하는 역할인데도, 여기서 이제 가만히 듣고만 있을 수 없기 때문에, 의장자신이 일어나서 의견을 낸다니, 본래의 의회 형태가 아니다. 그러므로 이것은 긴급하게 소집된, 평소의 【산헤드린】이 아니었다고 생각된다. 침착함을 잃은 상태이다. 의회가 시끄러웠다고 상상을 할 수 있다. 그 때에 요셉•가야바가 일어서서, 이런 말을 한다.

「여러분들은 전혀 아무 것도 알지 못하고 있다. 」 여기에, 모여 있는 사람들은 엘리트들이다. 엘리트들이 모인 가운데서, 나만은 잘 알고 있지만, 여러분들은 아무 것도 모른다는 식으로, 말참견했다. 그러므로 야만인 것을 알 수 있다. 정치가로써 말씨가 이러하면, 아무도 들을 사람이 없다. 「여러분들은 아무 것도 모르시는군요, 나는 알고 있지만. 」그리고 「민족 전체가 멸망 당하는 것보다는 한 사람이 백성을 위하여 죽는 것이 더 낫다는 사실을 깨닫지 못하십니까? 」

여기서 말하는 내용은, 한 사람이 죽고, 우리들의 권력이 유지되어, 의석이 확보되며, 예루살렘 성전이 보존된다면, 불쌍하지만 예수 한 사람을 희생시키자고 하는 것입니다. 예수가 선한 일을 행하며, 나쁜 일을 안 한 것은 인정하지만, 그러나 우리들의 권력유지와, 유대인의 관심을 확보하고, 예루살렘을 로마인으로부터 지키기 위해서는 한 사람의 희생으로 해결하는 것이 유익이며 우리 모두의 이익이다. 그러한 것도 모르십니까? 저는 벌써 알고 있었다. 지금 의장인, 요셉•가야바가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 사고방식은 뿌리 깊게 유대인들에게 있었다. 한 사람을 희생시켜서 전원이 구제된다는 생각은 구약 성경에서도, 자주 나온다. 다윗을 거역한 베냐민 지파 사람이 도망간 마을로 가서 그를 붙잡기 위해서 요압장군이 정예부대를 데리고, 그 마을을 전멸시키려고 했을 때에, 그 마을 여자가, 「그 범인의 목을 잘려 장군께 드리니 이 마을은 살려주십시오. 이 마을 전체가 한 사람 때문에 멸망해도 좋을 리가 없습니다. 」라고 말했다. 요압장군은 그것을 승인하고, 그 남자의 목을 가져 온 여자와 거래하고, 마을을 멸망시키지 않았다. 이 구약 성경에서 일어난 사건도 그렇고, 유대인들은 한 사람을 희생 시켜서 나라를 구하자, 한 사람의 희생에 의해 전체를 구하려고 하는 사고방식이 있다. 그러므로 가야바는 자신 있게 예수에게 미안하지만, 그를 희생 시켜 우리 70명의 【산헤드린】과 그 권력을 유지하고, 예루살렘 성전을 지키고, 그리고 우리를 지지 하는 유대인의 인기를 얻으며, 유대인의 지도자로써의 입장을 지속하자는 것이, 오늘 【산헤드린】의 의제이었다. 그리고, 그 날로부터 예수는, 이제 지명 수배자가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 위험은 이전부터 있었다.

나사로가 죽을 때, 다시 예루살렘으로 가자고 예수님이 말하시면, 제자들이 「방금 전에 유대인들이 주님을 돌로 쳐죽이려고 하였는데, 다시 그 곳으로 가시려고 합니까? 」 하고 제자들은 놀랐다. 그리고 도마가 이렇게 말한다. 「우리도 주님과 함께 죽으로 가자. 」 이전부터 위험은 계속 예수님에게 다가오고 있었습니다. 죽음을 당한다는 위험. 함께 동행하는 제자들도 죽음을 당한다는 위험. 그 죽음의 그림자는 제자들 속에서 사라지지 않았다. 그리고 예수님 스스로 죽는다는 예언을 하셨고, 그 위험을 항상 느끼고 있었다. 이 나사로의 죽음에서 살아난 사건이 그것을 결정적으로 한다. 결정적인 사형선고가 의결되어버린다. 예수를 본 사람은 보고하게 되고 포스터를 붙여 완전히『Wanted』, 지명 수배가 된다는 것입니다.

이 가야바에 관해서 쓴 것은 요한이지만, 요한의 복음서는 기원 1세기말에 씌어졌다. 요한이 100살 때에, 그 당시 가야바가 예수님의 사형선고를 한 의회 의장이라고 말한 다. 즉 그 당시, 지난 날을 회상해서 요한은 기록했다. 그 사건의 70년후가 된다. 그러므로 그 뒤, 설명을 보탰다.

∼ 이 말은 가야바가 스스로 한 말이 아니었다. 그는 그 해의 대제사장이었으므로, 예수님께서 유대 민족을 위해 죽게 될 것을 예언한 것이다. 가야바는 예수님께서 유대 민족만이 아니라 사방에 흩어져 있는 하나님의 자녀들을 하나로 만들기 위해 죽으실 것을 예언한 것이다. ∼

나중에 요한이 이 사건을 객관적으로 보았을 때에 알 수 있었던 것이며, 그 당시는 가야바가 설마 예언하고 있다고 아무도 몰랐다. 단지 예수를 질투하고, 예수를 말살하고 싶어서, 자신의 권력과시를 위해서, 이 계획을 세웠을 것이라고 하는 그러한 생각밖에 없었는데, 그 70년후 되돌아보면, 그것은 예언이었다고 요한이 말하고 있다. 왜냐하면, 그 해의 대제사장이며, 【산헤드린】 의장이었기 때문이다. 대제사장이 예언 한다는 것은, 유대인들이 가졌던 믿음이다. 대제사장이 되는 사람은 예언의 은사를 받을 수 있다. 그래서 예언자란 인식이 있었다. 구약 때도 그러했고, 그리고 세례 요한의 아버지, 사가랴는 자기 조의 차례가 되어서 제사장으로 일하였다. 그 임무를 맡는 관례를 따라 제비를 뽑았다. 그리고 그는 성령으로 충만하여 예언하였다. 사가랴가 주님의 성전에 들어가 향을 피우는 사람으로 뽑혔기 때문에, 예언했다고 생각한다. 어떤 제사장은, 꿈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받고, 그리고 어떤 사람은 점치기도 했다. 그리고 다윗도 제사장을 보고 선지자라고 말했다. 제사장을 예언자라고 명령 할 만큼이었다. 그러므로, 제사장은 하나님의 계시를 받고, 예언하는 사람이라는, 유대인 들이 가진 신앙이다.

아무리 그가 악덕의 제사장이었다고 한들, 게다가 예수님의 사형선고를 한 최악의 제사장이어도 유대인에게는, 제사장은 예언하는 사람이다. 왜냐하면 구약시대, 이방인의 발람도, 이스라엘에 관해서 하나님의 말씀을 예언 하고 있다. 바울이 예언하여도, 아볼로가 예언하여도, 베드로가 예언하여도, 악덕의 사람들이 예언하든지, 대제사장 가야바가 한 말도, 그것이 하나님의 계시라면 예언인 것이다.

그 말이 하나님의 예언이었다고 왜 요한은 알 수 있었을까? 그 70년후, 이 제사장 직은 끝났기 때문이다. 예루살렘 성전은 붕괴되고, 실제 이 예루살렘 숭배의 유대교는 끝났다. 그 역사적 사실을 요한은 이미 보고 있다. 이 말은 가야바 스스로 한 말이 아니어도, 하나님의 예언을 한 것이다. 왜냐하면 요셉•가야바가 그 해의 대제사장이었기 때문이라고 설명을 더했다. 결국 예언 한 자가 예수를 죽이고 자기들의 【산헤드린】의회를 지키고, 예수 한 사람에 희생으로 예루살렘 성전을 지키려고 했지만 그 후 그것이 다 붕괴되고 마는 것을 요한은 보았다. 그러므로 예언이었다고 생각하지 않을 수 밖에 없었다.

그들이 권력을 지키려고, 예수를 희생시켜 사형선고를 했지만 그들은 스스로 무슨 말을 하는지 모르면서, 반드시 예수는, 모든 사람을 위해서 죽지 않으면 안 된다. 십자가에 달려 모든 사람을 속죄하지 않으면 안 되고, 메시아이며 구세주이었다는 예언을 대제사장인 가야바 자신이 선언 한 것이다. 예수님께서 인류의 구원을 달성하신 뒤, 인간의 제사장 직은 폐지시키셨다. 그리고 요한은, 죽음에서 부활하신 예수님을 직접 보고 있고, 그들이 지키려고 하던 그 모든 것이 일체 없어지고, 이제 그 때는, 제사장은 필요 없어졌다. 그 결과를 보고, 「그것은 하나님의 예언이었다. 왜냐하면 그가 그 해의 대제사장이었기 때문에. 」 이것은 후에 덧붙인 것이다. 하나님께서 무엇을 하셨는지를 보았던 요한은, 다른 복음서 저자와 보는 눈이 다르고, 이것이 무엇인지를 해석할 수 있었다.

∼ 그 날 이후, 유대의 지도자들은 예수님을 죽일 계획을 세우기 시작했다. 예수님께서는 더 이상 유대인들이 있는 곳에 공공연히 다니지 않으시고, 그 곳을 떠나 광야 근처에 있는 에브라임이라는 마을로 가서 제자들과 함께 거기서 지내셨다. ∼

에브라임이란 마을은 예루살렘에서 북20km 간 작은 마을이다. 예수님은 이 사형선고의 뒤, 공공연히 거리를 다닐 수 없어졌습니다. 제자들과 작은 마을에서 숨어서, 예수님은 확실히 궁지에 몰려 갑니다. 공적으로 이야기할 수도 없고, 대중 앞에 모습을 나타낼 수도 없습니다.

∼ 유대인의 명절인 유월절이 가까이 다가왔다. 유월절이 되기도 전에 많은 사람들이 자신을 깨끗하게 하기 위해 시골에서 예루살렘으로 올라왔다. ∼

예수님께서 그 모습을 숨기시고, 공공연히 다닐 수 없는 정말로 긴박한 상태일 때에 유월절이란, 일년의 한 번, 유대인에 있어서는 대축제가 옵니다. 그 명절은 성인 남자가 예루살렘에서 유월절을 할 때에, 몸을 깨끗이 하지 않으면 안될 규정이 있다. 그 몸을 깨끗하게 한다는 것은, 시체를 만지면 안되고, 더럽혀진 몸으로 이 유월절 축제에 참가할 수 없으므로, 유월절 전, 1개월전정도부터 예루살렘에 와서, 몸을 깨끗이 하는 준비를 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일찍 예루살렘으로 가서, 몸을 짐승의 시체로 더럽히지 않도록 하고, 그리고 그 후 긴 행렬이 설 테니까, 먼저 가져온 짐승을 제사장들에게 드리고, 몸을 깨끗이 지켜, 일찍 장소를 잡기 위해서 와야 했다. 예루살렘에서 사는 사람을 포함시켜서 14만명, 아마 적어도 10만명이상은 있었을 것이라고 예측된다. 좁은 길에다 좁은 동네, 성인 남자만으로 한번에 14만명이 모으면, 제사장 앞에 깨끗함을 얻으려 줄을 설 것이며, 또한 양들을 데리고 와서 거기는 몹시 혼잡할 것이다. 이 때, 예수님의 소문이 났다. 어떤 소문이냐 하면,

∼사람들은 부지런히 예수님을 찾았다. 그들은 성전 뜰에 서서 서로 물었다. 「당신들 생각은 어떻소? 그분이 명절에 안 오시지는 않겠지요? 」 ∼

많은 사람이 서로 이야기 했다. 그러나 여기 원본은 「그 분은, 설마 올라 오지 않을 것이다. 」 부정하는 말이다. 설마, 올 리가 없다는 대화를 하고 있다. 누구나, 예수님이 여기로 올 수 있으리라 생각 안 했다. 이제 사형선고가 나와 지명수배자가 되었다. 그럴때, 제사장, 바리새인, 산헤드린이 열리는, 또 로마 군인이나 지도자들이 집중하고, 총독【본디오. 빌라도】의 관저가 있는 곳이다. 그런 곳으로 지명 수배자인 예수가 절대로 오지 않는다, 여기 모인 14만명, 성인 남자들의 동일한 의견이었다. 그리고 완전히 그를 붙잡기 위해서, 「예수를 본 사람은 보고해라」 하는 명령이, 이날부터 선포 된 것이다. 그러나 예수님은 예루살렘을 향합니다.

오늘 본문은 여기까지지만, 예수님은 향했습니다. 그리고 예언대로 십자가에 달리십니다. 이 예수님의 일련의 십자가에 사건 속에서, 나사로의 죽음과 살아남은, 중요했습니다. 예수님이 격동을 기억하면서, 눈물을 흘리시며, 정말로 감동하면서, 마음 떨리시면서, 「나사로야. 나오너라. 」고 말씀 하셨습니다. 이것은 단순히 나사로의 소생이 아니다. 이 일련의 사건을 보면 안다. 예수님의 십자가의 죽음과 부활입니다. 이것은 바로 예수님이 나사로를 죽음 가운데서 살려, 자신의 십자가에 대한 예언을 하신 것입니다. 『내가 반드시 십자가로 죽고, 부활한다. 』 그래서 꼭 나사로는 죽고 다시 살아나야 했다. 이 전에 예수님이 하신 「이 병은 죽게 될 병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것이다. 」 나의 영광을 드러내기 위해서, 나사로가 깊이 잠들었으니, 그를 깨우러 가야겠다고 예수님은 말씀하셨습니다. 베다니라는 마을에 들어가기 전에 예수님이 나사로의 죽음과 살아남의 기적을 일으킬 이유가 있었고 자신이 이제 예루살렘으로 올라가 십자가의 죽음과 부활이 다가오고 있는 것을 가르치기 위해서, 나사로의 죽음이 필요했습니다.

「그러므로, 내가 이것을 기뻐한다」고 말씀하셨다. 우리 친구, 나사로가 죽었다. 하지만 너희를 위해서는 내가 거기에 있지 않았던 것이 오히려 기쁘다. 이 나사로의 기적은, 다른 기적과는 다릅니다.

죽은 사람이 살아난 기적은 이제까지도 있었고, 구약 때에도 있었다. 그러나 그 것과는 다릅니다. 이것은 예수그리스도의 십자가 죽음과 부활을 표현하기 위해서, 그리고 모두가 예수님을 믿고 구원을 얻기 위함이었다. 예수님이 나사로가 살아나서 기뻐 떨린 것이 아닙니다. 자신의 십자가 죽음과 부활을 생각하고, 그 때 마음이 떨린 것입니다. 예수님이 명령한 상대는 나사로가 아니다. 무엇입니까, 죽음입니다. 죽음을 향해서 명령한 것입니다. 「너는 이제, 두 번 다시 승리할 수는 없다. 내가 ”죽음” 바로 그것을 파괴시키기 때문이다. 」 전인류가 죄로 죽지 않으면 안되고, 모두가 지옥으로 가야 했다. 바울은 이렇게 말했다. 「죽음아! 너의 승리가 어디 있느냐? 예수의 승리가 죽음을 삼켜 버렸다. 너는 두 번 다시 승리 할 수 없다. 」지금, 예수님께서 그 일을 하시는 것입니다. 예수그리스도의 생명이 압도되는 순간입니다.

두 번 다시 죽음의 권리를 가지고, 구원을 얻은 인간에게 덮치게 하지 못한다. 죽음이 찌르는 가시는 죄다. 내가 죽고, 그 죽음을 극복하기 때문에 나를 믿는 사람은 죄에서 해방되어 영원히 죽지 않는다.

그러나 아무도 이해하지 않는다. 자기 문제로 감격하거나, 울거나, 화내거나, 원망하거나, 시기하거나, 다툼을 되풀이한다. 예수님 한 분만이, 이 무거운 짐을 지고, 십자가를 지고, 죽음과 직면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가야바에 예언시켜, 자신의 죽음을 준비하셨다.

요한은 이 사건을 보고 있었기 때문에, 후에 예수님께서 행하신 일을 잘 알고 있습니다. 다른 복음서와 다를 이유는 여기입니다. 요한이 제일 마지막으로 복음서를 쓰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이 예수님의 십자가의 사건. 저 중대한 사건을 상기할 만큼, 예수님의 죽음과 연결되어 갑니다. 나사로의 죽음을, 예수님의 죽음과 결부시켜 생각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 당시 누가 알았을까요? 단지, 나사로를 사랑하고 있었기 때문에, 예수님은 살려 준 것입니까? 요한은 후에 참 뜻을 안 것입니다.

예수님 혼자서 싸우며, 예수님 혼자서 죽음을 승리하고, 예수님 스스로 자신의 의지로 행하시고, 또 부활하셨다. 하나님이 아니시면 그 누구도 할 수 없다. 유대인을 구원 시킬 뿐만 아니라, 전세계의 사람을 구하기 위해서이었다. 1세게 말에 요한은 보고 있는 것입니다, 이방인도 구원 받는 사실을. 요한은 에베소로 가고, 이제 예루살렘에서 피하고 있다. 그리고 이방인에게도 성령이 쏟아지고 있는 것을 보고 있다. 예수님의 십자가의 죽음과 부활의 복음은 유대인만의 선물이 아니었다. 전세계에로 복음은 전파된다.

이 예수님의 십자가의 피, 그리고 죽음과 부활이 얼마나 감사인지 요한은 강조하고 싶습니다. 예수님께서 오신 이유를 처음은 제자들은 이해하지 않는다. 그 시대 사람들은 아무도 이해하지 않았다. 예수님 혼자서, 십자가를 짊어지고 가셨다.

우리가 믿기 위해서 나사로의 죽음과 살아남은 정말로 필요했습니다. 그것은 인간에게 이해시키기 위해서, 예수님의 십자가를 알게 하기 위해서, 나사로가 필요했습니다. 그러므로, 현장에 있었던 사람은 당연 구원 받았다. 이 위대한 하나님의 일을 보았기 때문이다.

우리는 그 현장은 안 보았지만 주님이 주신 믿음으로 구원을 얻었습니다. 이 믿음이 하나님의 사랑이며 은혜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