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meba Ownd

アプリで簡単、無料ホームページ作成

Jesus Christ Glory Church

요한복음 11장17-32절

2018.02.14 16:30

~ 예수께서 와서 보시니, 나사로가 무덤에 있은 지 이미 나흘이라. 베디니는 예루살렘에서 가깝기가 한 오 리쯤 되매, 많은 유대인이 마르다와 마리아에게 그 오라비의 일로 위문하러 왔더니, 마르다는 예수께서 오신다는 말을 듣고 곧 나가 맞이하되 마리아는 집이 앉았더라. 마르다가 예수께 여짜오되, 「주께서 여기 계셨더라면 내 오라버니가 죽지 아니하였겠나이다. 그러나 나는 이제라도 주께서 무엇이든지 하나님께 구하시는 것을 하나님이 주실 줄을 아나이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 오라비가 다시 살아나리라.」 마르다가 이르되, 마지막 날 부활 때에는 다시 살아날 줄을 내가 아나이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 이것을 네가 믿느냐?」 이르되 「주여, 그러하외다. 주는 그리스도시요, 세상에 오시는 하나님의 아들이신 줄 내가 믿나이다.」 이 말을 하고 돌아가서 가만히 그 자매 마리아를 불러 말하되, 「선생님이 오셔서 너를 부르신다」 하니, 마리아가 이 말을 듣고 급히 일어나 예수께 나아가니, 예수는 아직 마을로 들어오지 아니하시고, 마르다가 맞이했던 곳에 그대로 계시더라. 마리아와 함께 집에 있어 위로하던 유대인들은, 그가 급히 일어나 나가는 것을 보고 곡하러 무덤에 가는 줄로 생각하고 따라가더니, 마리아가 예수 계신 곳에 가서 뵈옵고, 그 발 앞에 엎드리어 이르되, 「주께서 여기 계셨더라면 내 오라버니가 죽지 아니하겠나이다.」 하더라. ~

나사로가 죽은지 4일이 되었다는 것은, 일전에 말한 것처럼, 사람을 보내는데 하루의 거리며, 여전히 예수님이 이틀 거기서 머물러, 또한 하루의 도정에서 여기까지 온 것으로, 나사로가 병이 들었다는 통지를 보낸 그 날에, 나사로가 곧바로 죽었다고 여기서 알 수가 있다. 예루살렘에서 이 베다니까지는, 3 km이지만, 예수님께서 계신 곳에서는 하루의 거리였다. 그리고 여기서 4일째가 된 매장의 관해서는, 당시 유대인의 장례식을 우선 이해해야 한다.

일본에서는 죽자마자, 무덤에 들어가지는 않다. 24시간 이상 지나야 화장 한다. 어느 정도의 법이 정해져 있다. 그러나 당시 유대인들은 죽으면 곧 바로 무덤에 매장한다. 그런데 기독교도 아닌, 유대교도 아닌, 토착의 신앙, 민중들중에 있었던 미신은, 죽은 영혼이 3일은 이리저리 헤매고, 다시 돌아오려고 한다. 그렇지만, 4일째는 시체가 썩어버리니 포기해서 혼이 떠난다는, 민중의 종교가 있었다. 그러니까 3일은 영혼이 돌아 다닌 후 4일째 사라진다. 이 유대인들은 3일까지는 죽었다고 인정 안한다. 혹시 또 소생할 기회가 있다는 생각을 강하게 가지고 있었다. 그리고 당시 유대인의 습관으로, 3일간은 통곡하면서, 4일째는 한탄하고, 또 30일은 죽은 자의 상을 입는다. 그 간 옷을 씻어도 안되고 이발해선 안 된다. 그러니까, 그 30일은 상중이며, 3일은 울고 지내며, 4일은 한탄하지 않으면 안 된다. 일본의 장례식과는 전혀 다르다. 매우 떠들썩하다. 그것을 직업으로 가진 한탄하며 우는 사람이 있었다. 거기서 많은 사람이, 큰 소리로 웁니다. 그것은, 「피리를 불어도 춤추지 않고, 문상의 노래를 불러도 울지 않다」고 있듯이 그러한 직업이 있었기 때문에, 이런 말을 했다. 그러한 장사의 습관이, 이 유대인에게 있었다. 유대교가 아니라, 토착의 민중속에 있는 미신이며 습관이다. 그래서 4일 지났다고 하는 이야기는 이제 사람들이 소망을 포기한 시간이다. 나사로의 소생의 가능성이 없어져, 혼이 육체로 돌아오는 3일이 더 지났기 때문에, 이제 이미 모두가 포기한 상태며, 그 4일째에, 예수님이 베다니 마을에 들어오신 것입니다.

그리고 마르다는 서둘러 예수님을 마중 나가고, 마리아는 집에 남아서 앉아 있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유대인의 장례식 방식이 그런 것이다. 이 장례식은, 시체를 무덤까지 나르는 사이에 그 행렬과 참석하는 순서는, 최초에 여성들이 가고, 뒤에 남성이 계속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동안에 동료들이 집안에서 죽은 사람의 옷이나 짐을 뒤집어 엎는다. 그 후 무덤에서 돌아온 여자들이 바닥에 앉아 통곡한다. 그래서 지금 마리아가 바닥에 앉아 있는 것은, 게을러서가 아니라, 마르다가 근면해서 성실하기 때문에, 예수님을 마중 나간 것이 아니고, 마리아는 그 습관에 따라, 우는 날과 한탄하는 날이, 아직 계속되어 있으므로 바닥에 앉아서 나사로를 위해, 울며 한탄하고 있는 광경이다. 그러나 여기서 성격의 차이는 확실히 있다. 예수님을 대접할 때도, 마르다는 부지런히 환영한 후에, 열렬하게 대접했다. 한편 마리아는 예수님의 발앞에 엎드려서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있었다. 적극적인 마르다의 성격과 조용한 마리아의 성격이 나타나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마르다는 예수님께서 계신 곳으로 와서 곧 말을 걸고, 마리아는 예수님과 만나서 당장 말을 걸지 않고, 그대로 엎드려 인사 드렸다. 같은 일을 하고 있어도 이 성격의 차이는 확실히 있었다. 그러나 그것이 신앙의 차이가 있는가 하면, 요한 복음서는, 같은 신앙을 가지고 있었다고 표현하고 있다. 그것은 마르다가 예수님에게 말한 말에 나타난다.

「주님, 주님께서 여기 계셨더라면 제 오빠가 죽지 않았을 것입니다. 」하고 예수님에게 말했습니다. 그러나, 마리아도 예수님을 보자 엎드린 후에, 같은 말을 했다. 이것은 불평이 아닙니다. 이 원문의 말투를 보면, 예수님께서는 하나님이시니, 무엇이든지 할 수 있다고 말한 것이다. 그것을 제가 믿고 있고, 알고 있습니다, 하는 고백이었다. 왜 와 주지 않았습니까? 왜, 치료해 주지 않았습니까? 왜, 바로 전달을 듣고, 오지 않았습니까? 하는 불평불만이 아닙니다. 이 자매들은, 예수님이 십자가에 걸릴 6일전에 푹 쉴 수 있는 곳. 예수님을 가장 제자들보다도 이해해 주는 가족이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의 매장을 준비한 가족입니다. 그러한 겸손한 신앙이 있는 자매들이기 때문에, 예수님에게 지금, 불평을 하는 것이 아니다. 주님께서는 무엇이든지 하실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주님이 계시면 나사로는 죽지 않았지요, 하는 신앙 고백입니다. 불평을 늘어놓는 것이 아니다.

그 점에서, 이 두 자매가 같은 믿음을 가지고, 예수님 앞에서 겸손했다고 요한이 이야기 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여기서 역시 마르다나 마리아도 아직, 그리스도를 정말로 이해하지 않았다는 장면이기도 한다.

「왜, 주님께서 여기 안 계셨을까요? 」했을 때에, 예수님은 이렇게 대답하신다. 「네 오빠가 다시 살아날 것이다. 」마르다는 이렇게 대답했다.「마지막 날에 있을 부활 때, 제 오빠가 다시 살아난다는 것은 제가 압니다. 」

이것은 유대인들이, 기원전1세기나 2세기경부터, 유대교가 확립되어 가는 중에서, 확실하게 의인의 부활을 믿고 있었다. 의인은 하나님을 최선을 다해 섬긴 사람, 예언자, 하나님을 공경하던 의인들은, 마지막 날, 하나님의 심판 때에, 의인은 부활하고, 하나님을 따르지 않은 사람들은 지옥의 불속에 들어간다는 믿음을 가져 있었다. 그것은 유대인들의 순교자가 매우 늘어났기 때문이다. 박해나 여러 곤란 속에서, 하나님의 율법을 지켜 안식일을 지키기 위해서, 많은 사람이 죽음을 당했기 때문에, 의인의 부활은 유대인 안에서 확실하게 있었다. 마르다는 지금 그것을 이야기하고 있다. 특히 민중속에서 인기 있는 바리새파는, 그것을 완전히 믿고 있었습니다. 그것이 사도행전 바울의 재판 때에 확정적으로, 사두개파와 바리새파가 부딪치는 이유이었다. 사두개파는 부활을 믿지 않고, 천사도 믿지 않지만, 바리새파는, 「우리들은 의인의 부활도 천사도 믿고 있다. 」라고 말하니, 바울의 재판이 중단 될 정도였다. 그것은 사두개파는 부활은 믿지 않고, 바리새파는 부활을 믿고 있었다. 그러나 이것은, 마지막 때에 부활을 말하고 있다. 즉, 의인의 부활을 믿던 바리새파는, 유대교의 토대입니다. 더구나, 민중들의 압도적인 지지를 받고 있는 것은, 사두개파보다, 바리새파입니다. 그래서 마리아와 마르다의 신앙은, 완전히 바리새파를 토대로 한 믿음이므로, 자매들은 의인의 부활을 믿고 있었다. 예수님이 말했을 때에, 「네. 알고 있습니다. 저는 바리새파 유대교의 신앙을 믿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전인류를 심판할 때에, 저는 의인이 살아나는 것을 믿고 있기 때문에, 제 형제도 부활할 것입니다, 하고 대답했다.

그러나 예수님은, 마지막 때의 부활을 말하고 있을 때, 「나는 부활이다 」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다. 나를 믿는 사람은 죽어도 살 것이며, 살아서 나를 믿는 사람은 결코 죽지 않을 것이다. 네가 이것을 믿느냐? 」 ∼

예수님은 현재, 지금의 구원을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마르다는 마지막 때의 부활을 말하고 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나는』 생명이며, 부활이라고 하셨다. 요한 복음서는 처음부터 에고 에이미로 시작되고, 에고 에이미로 끝나고 있다. 「나는 누구누구다. 나는 이것이다. 」하는 나는 스스로 있는 자, 이것을 강조한다. 그러나 이제까지는「내가 생명의 빵이다. 」 「내가 이 세상의 빛이다. 」 「나는 양의 문이다. 」 「나는 선한 목자. 」 나, 에고 에이미는 ∼이다. 그러나, 이것은 어디까지나 비유로 표현하셨다. 양의 문이라든가, 목자라든가, 생명의 빵이라든가, 이 모두 비유가 아닙니까?

인격을 나타내는 것이 아니라, 비유해서 말하며, 굳이 말한다면 그런것이다. 그러나 여기서 예수님이 말한 것은, 비유가 아니었습니다. 인간에게는 이해가 가지 않지만, 예수님은 이제, 비유를 써서 말씀 하지 않습니다. 그것은 예수님의 표적은 끝났다는 것을 말한다. 비유해서 하는 이야기도, 예수님께서 저 소경의 눈을 뜨게 하신 사건부터는, 이제 기적을 행하시지 않습니다. 확실하게, 에고 에이미를 말하기 시작합니다. 「나」란 존재는 「생명이며, 부활이다.」

이것은 예수그리스도의 인격을 말합니다. 본질을 말합니다. 근본과 근거를 말합니다. 이제는 비유도 아니고 예로, 나는 대개 이런 사람이라고 하지 않습니다. 완전히 자신을 나타내고 있습니다.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다.」이 예수님의 말씀을 마르다는 전혀 이해못했다. 「나는 부활이다.」고 했을 때, 마르다는 이렇게 말합니다. 「네. 주님, 저는 주님께서 그리스도이시며, 세상에 오시기로 한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믿습니다.」이것은, 대단한 고백이에요. 예수님이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라고, 비유도 아닌 예수님이 어떤 존재인가 하는 것을, 분명히 말하셨을 때에, 마르다도 완전한 대답을 가져옵니다. 베드로의 고백처럼 주님은 살아계시는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 처음부터 주 야하웨 하나님. 모세보다 위대하며, 기다리고 기다린 메시아이심을 나는 믿고 존경해 예배합니다. 라고 마르다는 대답합니다. 베드로가 그렇게 대답했을 때, 예수님이 얼마나 칭찬하셨을가요? 네가 복되다. 내가 네게 하늘 나라의 열쇠를 줄 것이다, 할 정도의 완벽한 신앙 고백입니다. 지금 마르다는, 「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다.」했을 때, 「네, 주님. 믿습니다. 주님께서 하나님이며, 그리스도이심을 나는 알고 있습니다.」지금 기독교 교리가 성립된 것입니다. 최고의 신앙 고백이, 예수님과 마르다 사이에서 주고 받게 되었다. 마르다는 이 최고의 신앙 고백을 하고, 또한・・・마리아도 같습니다. 마리아가 예수님께서 계신 곳으로 갔을 때, 예수님을 보자, 그의 발아래 엎드렸다는 것은, 이 신앙고백과 같습니다. 마리아에 있어서도, 주님은 그리스도이며,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믿습니다. 이것은 예배하며, 찬송한다는 의미다. 이와 같이, 지금 최고의 신앙고백을 나눕니다.

그런데도 그 후, 무덤에 갔을 때, 마르다가 뭐라고 합니까? 주님이「돌을 옮려 놓으라.」라고 했을 때, 「아닙니다. 주님, 이미 썩었습니다. 사일이나 지나 갔습니다.」이 말은 무엇입니까? 민중의 미신이겠지요? 3일간은 영혼이 돌아올지도 모른다는 도착 종교이다. 영혼이 아직, 육체로 돌아올 가능성을 가졌다.

그렇지만, 4일째는 육체가 썩고 있기 때문에, 영혼은 돌아올 수 없다고 하는, 마르다의 생각이다. 부활을 믿지 않고 있다. 「무리예요. 예수님도 불가능 합니다. 이제 4일째이니까.」3일이라면 좋았을텐데 〜4일째는 썩고 있기 때문에, 비록 예수님이셔도 영혼은 돌아오지 못합니다. 조금 전의 신앙 고백은, 벌써 어딘가 날아가 버렸다. 최고의 신앙 고백은 전혀 볼 수 없다. 또 예수님이, 「내가 부활이요, 생명이라고 한 말을, 너희는 믿는다고 하지 않았느냐.」라고 해도, 마르다는 아직도 모릅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3일째에 오지 않았던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4일째 되어 예수님이 나사로의 곳으로 온 이유는, 무엇입니까? 시체가 썩을 때까지 기다리던 것이다. 왜? 그들은 입으로 고백하면서, 이 민중의 미신을 믿고 있기 때문이다. 말로는 최고의 신앙 고백을 하고 있어도, 마음 속은 전혀 다릅니다. 민중의 신앙이나, 자기 생각이 있다. 그래서 생활에 아무 변화가 안보인다. 입과 배속이 마르다나 마리아에 있어서도 이만큼 다르다. 게다가 마르다의 고백속에서,

~ 「주님, 주님께서 여기 계셨더라면 제 오빠가 죽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지금도 주님께서 하나님께 구하시는 것은 무엇이든지 하나님께서 주시라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하는 이 말속에는, 하나님의 아들이라 말하면서도, 어딘가 사람 취급 하고 있다. 확실히 주님은 인간속에서는 우월하고, 능력이 있을지도 모른다. 그러니까 주님께서 기도하시면 아버지께서 절대 들으시겠지요, 여기서 「주님께서 구하시는 기도는 들으시겠다.」 이 말은 예수님이 하늘의 아버지께 구해서 아버지께 예배한다, 찬송한다는 말과는 다르다. 인간이 하나님을 예배한다는 단어를 사용하고 있다. 그러니까 예수님이 하늘의 아버지께 기도한다는 단어는 쓰지 않습니다. 인간이 하나님을 예배한다는 단어를, 마르다는 사용하고 있습니다. 일본어는 같은 말로 번역 되지만 히브리어는 다릅니다. 여기서 마르다는 인간이 구한다는 의미를 썼다. 하나님의 아들이, 아버지께 예배한다고 하지 않았다. 그래서 인간중에서는 최고의100%의 기도 응답이 있다. 주님께서 구하시면 하나님께서 무엇이든지 주시리라 믿습니다.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라고 고백하면서, 하나님이란 생각을 하지 않았습니다. 어디선가 우수한 인간, 위대한 인간이란 취급이다. 마르다, 마리아의 이 신앙 고백은, 우리하고 완전히 다름 없습니다. 「주는 그리스도입니다.」하고 크리스찬은 고백합니다. 하나님의 독생자 예수라고 부릅니다. 그는 죽고, 3일째에 부활하셨다고 말합니다. 그리고 그 십자가의 피로, 우리는 죄에서 해방되어 속죄 받아, 우리의 구세주라고 찬양합니다. 이 최고의 신앙 고백을, 크리스찬이라면 합니다. 왜냐하면 이것은 교회에서 그렇게 가르칩니다. 「십자가에서 죽으신 예수・그리스도가 나의 죄를 사해주시고, 나의 구세주가 되셨다.」 그러면 교회에서 「축하합니다.」 하고 세례식에서도 그것을 고백합니다. 「삼위일체의 하나님을 믿습니까?」 「네, 믿습니다.」 그리고, 「여러분들은 물속에서 낡은 내가 죽고, 물 위로 나올 때, 예수・그리스도와 함께 새로워진 것을 믿습니까?」 「네, 믿습니다.」라고 말합니다. 그리스도의 사람으로 세례를 받고, 이것을 고백한다. 이 마르다와 같이.

그렇지만, 마음 속은 과연 어떻습니까? 인간의 가르침이나 미신을 믿고 삶에서는 거의 거기에 따라 살고있다. 진심으로 예수는 나의 구세주라고 믿고 살아있을까요? 로마서에, 「마음으로 믿고 입으로 고백한다.」하는 구원의 교리가 나옵니다. 즉 인간은, 마음에서 믿지 않아도, 입으로 고백할 수 있다는 것이다. 마음에서 진정한 이해도 없이 「그래요, 예수는 나의 주.」 「 예수는 나의 죄를 구속하셨다.」 말로만으로 고백 하는 것이 가능하다는 것입니다. 지금 요한 복음서는 그렇게 말하고 있다. 그리고 계시록에서도 일곱 교회에 보낸 편지를 통해서 말합니다.

요한 계시록 3장 1절~ 사데 교회지도자에게 이렇게 써서 보내어라. 「 일곱 영과 일곱 별을 가질 분의 말씀이다. 나는 네 행위를 알고 있다. 사람들은 네가 살아 있다고 하나, 사실은 죽은자와 다름없다. 깨어나라! 완전히 죽기 전에, 아직 조금이라도 남은 힘이 있을 때에 네 자신을 일으켜 세워라. 네 행동이 하나님 보시기에 선하지 않다. 네가 받은 것과 들은 것을 기억하여 뉘우치고 순종하라! 회개하지 않고 내게 들어오지 않으면, 내가 도둑같이 너희를 찾아갈 것이다. 네가 생각지도 못할 때에 네게 갈 것이다. ~ 이렇게 써서 보내라, 이 편지는 불신자가 아니라, 크리스찬에게 말씀하신다. 예수님 보시기에 너희들은 결코 살아 있지 않다. 마음은 어둡고 죽어 있어, 빛도 생명도 없다고 합니다. 회개하여 깨어나라. 열심히 자기를 바뀌라고 말합니다. 왜 믿는 사람이 죽고 있습니까? 생명이 없다는 것은 어떤 차원일까요? 예수・그리스도를 '주'라고 고백하여, 하늘의 아버지를 「아바, 아버지」라고 고백하는 것은, 성령님이 일 안하시면, 고백을 할 수 없다고 말합니다. 입만의 고백은 아무나 할 수 있다. 그렇지만 성령에 의하지 않으면, 「아바, 아버지」라고 부를 일이 없습니다. 성령에 의했을 때, 하늘의 아버지를, 「아버지」라고 부를 수 있습니다. 성령에 의했을 때만, 예수・그리스도를 「구세주」, 「주」, 「왕」이라고 고백할 수 있다고 합니다. 성령님의 일하심이 아니면 마음에서 믿지 못한다. 자기 스스로 하나님을 아는 것은 무리합니다. 요한1서에 「하나님의 사랑이 없으면, 하나님을 알 수 없다.」이 뜻은, 빛이나 생명이 내 안에 없으면, 내가 새롭게 되지 못한다. 죽은 자와 다름이 없다고 한다. 스스로 새롭게 살아나는 일도, 생명을 얻을 수 있는 일도, 예수를 주라고 고백하는 일도, 할 수 없습니다. 말만이면 가능합니다. 진실의 믿음으로 완성되는 것은, 마음으로 믿는다는, 성령에 의하지 않으면, 하나님의 사랑이 내 안에 들어 오지 않으면, 하나님의 생명이 내 안에서 넘치지 않으면, 고백할 수 없는 일입니다. 그러면 언제 생명이 넘치고, 하나님의 사랑이 내 안에 들어와, 성령이 언제 내 안에서 임재합니까? 우리의 신앙 고백입니다. 신앙고백 아닌, 믿음 이외에, 그 어느 방법도 없습니다. 그래서 중요한 것은, 「마음으로 믿는다.」 이것이다. 「입으로 고백한다.」가 아니다. 그 전에 마음이 필요합니다. 이 신앙 고백 없이, 성령님이 들어오시는 방법도, 하나님의 사랑이 넘치게 하는 방법도, 예수의 생명이 내 안에 들어 올 방법도 없다. 그것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은혜이며 선물입니다. 그리고 그 생명과 은혜와 사랑과 성령만이, 「주는 그리스도. 예수는 구세주입니다.」 할 수 있습니다.

그 생명의 원리가, 내게 일한다고 바울이 말합니다. 그 때 처음으로 생명의 원리가 나부터 시작되어 갑니다. 그러한 사람은 말을 않해도, 빛이 나고, 그 안에서 성령이 일하시고, 사람들도 그것을 보게 된다. 왜? 생명의 원리가, 하나님의 영이 일하기 때문입니다. 그것을 가능하게 하는 것이 신앙 고백입니다.

그리고 여기서 마르다가 말한 것은, 마지막 날의 심판이다. 제2의 죽음이 일어날 때를 말하고 있다. 의인은 그 때 부활할 것이다고 말하지만, 예수님이 「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다.」고 말하시는, 에고에이미는 무슨 뜻일가요? 예수님 자신을 말합니다.「 내가 생명이다.」 내가 들어오지 않으면, 생명이 없다고 말하신다. 반대로 내가 들어오면 살아난다는 이야기다. 죽을 일이 영원히 없다. 내가 들어오면 죽지 않고 영생을 얻는다. 하는 것은, 주님이 들어 오신 그 순간부터 내 안에서 영원한 시간이 시작된다. 생명이 들어간 그 순간에 영원이란 새로운 시간이 시작합니다. 마지막 날에 살아나는 것이 아니다. 심판의 날에 다시 살아나지 않습니다. 두번 태어납니까? 하는 질문은 교리적으로 이상하지요. 죽고 영혼이 육체를 떠나 살아나고, 그리고 자고 있다가, 마지막의 심판 날에 다시 살아납니까? 이것은 다릅니다. 마르다는 잘못된 이해를 가지고 있다. 소생에 관해서도 마르다는 미신을 믿고 있고, 유대인들은 잘못 이해 하고 있다. 그래서 바리새인들은 예수님을 죽였다. 예수님은 「나는 부활이다.」고 말했습니다. 「나는 생명이다. 내게 오지 않으면, 아무도 하늘의 아버지께로 갈 자가 없다.」 그 말을 했을 때에, 위선자들은 하나님을 모독했다고 주님을 십자가에서 죽였습니다.

예수님은 그냥 사실을 말했습니다. 에고에이미. 나는 스스로 있는 자, 내가 아니면 생명이 없다. 예수님이 들어오시면 새로운 피조물이 됩니다. 바리새인들은 다시 어머니의 뱃속으로 들어가 태여나느냐고 물었다. 그런 일은 있을 수 없다. 예수・그리스도의 생명을 입고 새로운 사람이 된다. 그것은 예수님이 내 안에서 일 하기 시작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예수님 자신이 생명이며 부활입니다.

존・칼빈은 이렇게 말한다. 「성화」는 십자가의 복음의 믿음없이는 시작되지 않는다. 성도들의 거룩함은 예수・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복음의 원리가 없으면, 그 믿음이 없으면 시작되지 않는다. 요한은 이것을 계속 말한다.

그래서 마지막에 예수님께서 행하신 일은 이외도 많이 있다. 만일 그 일을 일일이 다 기록한다면 온 세상이라도 그것을 기록한 책을 담기에 부족할 것이다. 그럼 왜 이것을 썼을가요? 여러분들을 믿게 하기 위해서다, 라고 말합니다. 믿음으로 인해서 구원을 얻는다고 하는 것이 기독교 교리입니다. 그렇지만 입으로 고백한 마르다, 입으로 고백한 마리아 생활은 그대로 민중의 미신 대로 살아 있다. 자신의 지금까지 성격 대로, 생각을 바꾸지도 않은채 살아 있다. 말로는 크리스찬이라고 한다.

인간은 스스로 아무것도 자랑할 것이 없습니다. 구원의 원리, 이 믿음은 선물이다.

예수님께서 우리를 구원하신 목적은 죄에서 해방시켜 하나님 나라의 백성으로 하나님과 영원히 함께 사는 것, 이것입니다. 이 세상 행복이 아닙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를 감사하는 사람은 이 세상에서 하나님 나라가 세워지기를 원합니다. 또 그 길을 갈 것입니다. 그 길만이 생명인 것을 알기 때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