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한복음 10장31-42절
~ 유대인들이 다시 돌을 들어 치려 하거늘,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내가 아버지로 말미암아 여러가지 선한 일로 너희에게 보였거늘 그 중에 어떤 일로 나를 돌로 치려 하느냐? 」 유대인들이 대답하되 「 선한 일로 말미암아 우리가 너를 돌로 치려는 것이 아니라 신성모독으로 인함이니 네가 사람이 되어 자칭 하나님이라 함이로다. 」 예수께서 이르시되, 「너희 율법에 기록된 바 내가 너희를 신이라 하였노라 하지 아니하였느냐, 성경은 폐하지 못하나니 하나님의 말씀을 받은 사람들을 신이라 하셨거든 하물며 아버지께서 거룩하게 하사 세상에 보내신 자가 나는 하나님의 아들이라 하는 것으로 너희가 어찌 신성모독이라 하느냐, 만일 내가 내 아버지의 일을 행하지 아니하거든 나를 믿지 말려니와, 내가 행하거든 나를 믿지 아니할지라도 그 일은 믿으라. 그러면 너희가 아버지께서 내안에 계시고, 내가 아버지 안에 있음을 깨달아 알리라 」 하시니 그들이 다시 예수를 잡고자 하였으나 그 손에서 벗어나 나가시니라. 다시 요단 강 저편 요한이 처음으로 세례 베풀던 곳에 가사 거기 거하시니, 많은 사람이 왔다가 말하되, 「 요한은 아무 표적도 행하지 아니하였으나, 요한이 이 사람을 가리켜 말한 것은 다 참이라. 」 하더라. 그리하여 거기서 많은 사람이 예수를 믿으니라.~
10장에서, 유대인들이, 만일 당신이 그리스도라면 그렇다고 말해 주십시오. 하고 물었더니, 「내가 그리스도라고 말하였으나 여러분들은 믿지 않았다.」그리고나서 「 나는 그리스도다」고 했을 때에, 유대인들이 돌을 집어 예수그리스도를 죽이려고 분노를 노골적으로 나타냅니다. 그리고 수전절 날에 다시 「 나는 그리스도다」고 예수님이 하셨을 때, 유대인들이 화내고, 돌을 가지고 예수님께 던지려고 하였다. 또, 「나는 하나님의 아들이다.」고 했더니, 다시 예수님을 잡으려고, 유대인들이 분노를 노골적으로 나타내고 있다. 그런 이야기가 10장에 계속 있고, 그리고 마지막에는 예수님이 요단 강 동쪽으로 돌아간다는 이야기로, 끝맺고 있다. 여기서 「 나는 그리스도다」그 다음 「 나는 하나님의 아들이다.」고 따로 말씀하셨다. 그렇지만, 마태나 마가의 복음서에서는 따로 쓰여져 있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 라고 불리우고 있다. 그러니까, 하나님의 아들도, 그리스도도 포함해서 말하고 있다. 그렇지만, 누가의 복음서와 요한의 복음서만은, 「하나님의 아들」과 「그리스도」를 따로 나누어 쓰고 있습니다.
누가는 재판 때에 「당신은 그리스도인가.」 「당신은 하나님의 아들인가.」하고 질문을 따로 하고 있다. 그리고 이 요한 복음서의 10장에서도 당신은 그리스도입니까. 이렇게 말한 후에, 「 나는 하나님의 아들이다」고 나누어 써 있습니다. 그것은 역시, 1 세기말에 기록했다는 사정에서 그렇다. 전에 말한 대로 기원 1 세기의 초 무렵에는, 아직 기독교란 분명한 개념이 없고, 유대교와 완전한 구별이 없는속에서, 1 세기말에 쓰여졌던 누가서와 요한 복음서는, 벌써 그 때에 논쟁이 일어나고 있었다.「예수는 그리스도다. 그리고, 하나님의 아들이다.」하는 「예수는 하나님인가.」그런 신학적 논쟁이 1 세기말에 격렬하게 일어났으므로, 특히 이 누가와 요한 복음서에서는, 「예수는 그리스도이며 하나님의 아들이었다」를 강조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요한 복음서 만이 아니라, 요한 1서에는, 예수를 믿고 하나님의 아들이라 고백한 사람은 이 세상을 승리한 사람이다.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이었다고, 고백한 사람은 이 세상에 이미 승리하고 있다는 것처럼, 예수를 하나님이라고 인정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그리스도라고 인정하는 것 만으로는 완전하지 않았다. 왜냐하면 유대인의 생각하는 그리스도는, 마카비 집안이 무력을 가지고, 이스라엘을 시리아로부터 해방시킨 그런 인물을 그리스도라, 착각하고 있는 유대인이 많았기 때문이다. 이스라엘을 로마 지배로부터 해방하고 무력을 가지고, 힘을 가지고, 또 이스라엘을 다윗왕의 나라와 같은, 회복해 주는 왕이며, 그런 제사장을 찾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 나는 그리스도다」하는 것 만으로는 완전하지 않고, 「 나는 하나님의 아들이다」고 따로 고백하고 있는 것이, 누가 복음서와 요한 복음서이다. 1 세기말의 기독교가 이 문제로 격렬하게 논쟁이 일어났다고 암시하고 있다.
그리고, 특히 이 요한 복음서의 특징은, 낡은 것이 새롭게 바뀌었다. 완전한 변환이 일어났다고 강조하고 있다. 우선 요한 복음서에서 최초로 가나의 결혼식 때에, 물이 포도주가 되었다는 이야기가 있고, 사십육 년이나 걸려 재건했던 성전을, 내 아버지의 집을 강도의 시장터로 만들어 버린, 이 낡은 체제를 나는 부수고, 이 성전을 허물어 내가 삼 일만에 이것을 다시 세우겠다고 예수님께서 직접 말하셨다. 그리고 세례 요한이, 「 그 분은 점점 더 위대해질 것이고, 나는 점점 더 사람들의 관심에서 멀어지게 될 것이다.」 이것은, 그분이 진짜 신랑이다. 그 분이 성령으로 세례를 주시는 분이며, 나는 그분의 신발 끈을 풀 자격도 없는 사람이다. 여기서도 낡은 것과 새 것이 바뀌었다고 이 요한 복음서는 계속해서 말한다. 그리고 유월절 때, 「모세 시대에 하늘에서 빵이 내려 왔지만, 그보다, 나는 위대하다. 모세보다 위대하고, 내가 하늘에서 온 빵이다. 생명의 빵이다」하고 말씀하시고, 사마리아의 여자에게는 「야곱의 우물에서 물을 마시는 사람은 다시 목마를 것이오, 그러나 내가 주는 물을 마시는 사람은 영원히 목마르지 않을 것이오.」라고 합니다. 또, 초막절 때도 「 내가 영원한 생수의 물」 「 내가 세상의 빛이다」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셨다. 」 「모세보다 위대하다」고 예수님은 반복해 말씀하셨다. 그리고, 사마리에서 「이제부터는, 이 산에서도 아니고 예루사렘도 아닌 영과 진리로 예배할 때가 반드시 온다」라고 말씀하시고, 소경이 안식날에 치유되었을 때도, 「내가 이 세상에 온 것은, 안보이는 사람이 보게 되어, 보인다고 하는 사람이 안보이게 되기 위해서다」라고 신과구의 교체가 있습니다. 그리고 요한 복음서는 제1장부터 참 빛이 이 세상에 왔다고 표현하고 있고, 말씀이 사람이 되셔서 우리 가운데에서 사셨다. 요한은, 예수 그리스도야말로 이 세상을 새롭게 하는 하나님의 아들이다 라고 하였다. 이것이 요한 복음서의 특징입니다.
그리고 오늘 「너희는 다 신이다, 라는 말이 너희 율법에 쓰여 있지 않느냐? 성경은 파기될 수 없다.」하고 예수님은 여기서 구약 성경을 인용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하나님자신의 말씀을 받은 사람들을 신이라고 불렀으니 내가 나는 하나님의 아들이다, 라고 말했다고 해서 너희가 어찌 나에게 하나님을 모독한다고 말을 하느냐? 」이 말씀은, 「 나야말로, 하나님께서 구별하여 세상에 보낸 사람이다」라고 말씀하시고 있습니다.「 나는 점점 그리스도가 되어, 점차 하나님의 아들이 된 것이 아니다」고 합니다.「 나야말로는 처음부터 하나님이었고, 하나님이 사람으로 와있을 뿐이다」여러 가지 기적을 행하였기 때문에, 하나님처럼 되어, 예언자의 한 명과 같이 되어, 그리스도로 된 것은 아니다. 처음부터 하나님이었고, 처음부터 빛이었고, 처음부터 생명인 하나님이, 사람이 되어 세상에 왔다. 그러니까, 내가 하나님이라 해서 무엇이 잘 못했느냐, 사실은 여기, 일방적으로 하는 말이다. 점점 예수가 되어, 나로날로 그리스도가 되어, 점차 구세주가 되어, 점점 하나님의 아들이 되어간 것이 아니다. 원래 사람이 예언자가 되어, 사람이 점점 리더가 된 것이란, 전혀 다릅니다. 훈련의 끝에 왕이 된 것도 아니다. 영원 전부터 하나님이었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렇지만, 예수님이 시편 82편을 인용한 이유가 있습니다.
시편 82편 1절을 보면, ~하나님께서 하늘의 모임에서 회의를 진행하십니다. 하나님께서 재판관들에게 말씀하십니다. ~
시편 82편 6절~ 내 말을 들으라.「너희는 신들이며, 지극히 높은 분의 아들들이다.~
82편을 인용하셨는데, 하나님은 「내가 하나님이고 심판한다.」 하고, 그리고 6절은 「지극히 높은 하나님의 아들」라고 표현하고 있으므로, 예수님이, 「 내가 하나님의 아들이라 해서 무슨 잘 못이 있나.」이 성경 구절을 인용하고 있습니다.「 나는 하나님이며, 하나님의 아들이다. 82편에도 그렇게 써 있고, 예언의 서적, 율법의 책에, 써 있는데, 내가 하나님이라고 해서 너희가 뭐라고 말하겠느냐. 그래서, 어째서 하나님을 모독하는 죄로, 돌로 죽이려고 하느냐」하고 말로도, 지금 예수님은 대꾸하셨다. 실제로 그러한 분이라는 것을 지금 옆에 두어도, 성경의 말씀을 보면 정당한 이유며, 아무 실수가 없다고 입증하신다. 구약의 사람에게도 그렇게 말하지 아느냐. 하고 예수님이 지금 반론하고 있는 것은, 단지, 하나님의 아들이다, 하는 말 그 자체에 대해서도, 모독의 죄에 해당되지 않다, 란 반론이다. 게다가, 여기의 신들, 신의 아들이라고 하는 그 사람들은 이스라엘의 재판관들이다. 이스라엘의, 하나님의 성전에서 섬기는 사람들, 즉 예언자, 성경을 가르치는 교사들. 하나님의 일을 대신 하고 있는, 그 지도자들. 그 지도자들을 구약 시대는, 신들이라든지, 신의 아들이라고 부르고 있었다. 하나님의 일을 대리 하는 사람들이다. 그러니까, 이스라엘의 리더들이며, 이스라엘의 제사장들. 또 이스라엘을 심판하는 재판관들을 말한다. 모세의 시대, 신명기 시대의 제사장들은 백성의 죄를 재판하고 있었다. 그리고, 이 재판은 하나님이 심판하시고, 그 대리자가 이스라엘의 죄를 재판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니까 신들이라고 하며, 신의 아들들이라고 불렀다. 그들은 하나님께서 쓰시고 하나님으로부터 사명을 받은 사람들이다. 그래서 직접, 하늘의 아버지께서 보내신 내가 하나님이라고 해서, 또 하나님의 아들이라 말했다고 왜, 하나님을 모독하는 죄로, 죽음을 당하지 않으면 안 되나, 하는 결정적인 증명으로, 예수님이 유대인들에게 말하신다. 율법의 책에도 그렇게 씌여 있지 않던가, 그리고, 이 율법의 책, 구약의 책은, 파기될 일은 없다. 내가 하는 말은 틀리지 않았다고 지금 반론하십니다. 돌로 죽일만한, 그런 화내는 이유가 하나도 없다. 이렇게 말합니다.
어찌 너희가 하나님을 모독한다고 말하느냐, 내가 한 많은 선한 일 때문인가? 예수님이 반론할 때에, 이 유대인들이 얼마나 예수님이 미워도, 선한 일 때문에 당신에게 돌을 던지려는 것이 아니다고 말할 수 밖에 없었다. 왜? 예수님이 행한 일은, 정말로 선한 일이었기 때문이다. 가난한 사람을 구해 주고, 소경의 눈을 뜨게 하고, 벙어리가 말을 하고 또 들을 수 있게 되어, 절름발이가 걸을 수 있게 되어, 팔이 쇠약해진 사람이 움직이게 되어, 죽은 사람이 소생했다. 「이러한 선한 일을 위해 당신은, 나를 재판하고자 하는 것인가?」 했을 때에, 유대인들은 부정할 수 없었다. 「아니오, 당신의 행한 일은, 선한 일이지요. 당신에게 지금 화낸 이유는, 당신은 사람에 지나지 않는데도 자신을 하나님이라고 주장하는 말 때문에 저희들은 지금 반론하고 있다.」라고, 그들이 말한다. 그리고, 예수님이 대답하신다. 「 나는 아버지에게서 왔다. 그러니까, 나는 아버지의 일을 너희에게 표적으로 보였다. 그 표적을 보았으면 내가 하는 일을 믿어라.」 이 아버지의 일이나 표징, 하늘의 아버지의 능력은 도대체 무슨 뜻이 있었는가. 단순한 기적이나 치유인 것인가. 그렇다고 할 때에는, 비슷한 일을 하는 사람들은 있었다. 당시 그러한 기적을 행하는 사람은, 이단의 종교에도 있었고, 신을 믿지 않는, 다른 우상을 믿는 사람들중에 그러한 능력을 가진 사람들은 있었다. 그러면 예수님이 지금 말하는, 「내가 하늘의 아버지의 일을 당신에게 보여 주었는데 믿으면 되지 않는가. 나를 믿지 않아도, 하늘의 아버지의 일을 믿어라.」 이 「일」이 뭔지, 「게다가 내가 하늘의 아버지의 일을 너희에게 계시 했다. 분명히 나는 너희에게 경고를 주고 말 하였다. 어찌 그 일을 믿지 못하냐.」하고 말씀하십니다. 그렇지만 여기서 예수님이 말하는 뜻은, 단순한 기적은 아닙니다. 단순한 능력적인 하나님의 일을 믿으라고 하는 의미는 아니다. 그것이, 이 시편 82편에 쓰여져 있습니다.
시편 82편 아삽의 시.
~하나님은 신의 회중 안에 선다. 하나님은 신들의 한가운데서 심판을 내린다. 너희가 언제까지 악한 자를 변호해 주고, 못된 자들의 편을 들려느냐? 셀라. 약한 자와 고아를 보살펴 주고, 가난한 자와 고통받는 자의 권리를 찾아 주어라. 약한 자들과 어려운 자들을 구해 주고, 악한 자들의 손에서 그들을 구해 주어라. 너희는 무지하며 분별력도 없이 어둠 속을 헤매고 다니는 구나. 그러니 세상이 온통 흔들릴 수밖에 없지. 내 말을 들어라. 너희는 신들이며, 지극히 높은 분의 아들들이다. 라고 하였으나, 너희는 보통 사람들처럼 똑같이 죽을 것이다. 어느 지도자와 다를 바 없이 죽게 될 것이다. 오 하나님, 일어나셔서 이 땅을 심판하소서. 이는 모든 나라가 다 주의 것이기 때문입니다. ~
너희는 신들이다, 지극히 높은 분의 아들들이다, 1절과 6절에 그렇게 써 있습니다. 우리는 몇장몇절, 하고 성경을 읽습니다. 그렇지만, 유대인은, 그러한 식으로 성경을 읽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그 당시는 당연, 숫자가 써 있지 않다. 몇장, 몇절이라, 하는 숫자가 전혀 없다. 그러면 유대인은 어떻게 기억해 갑니까? 그냥 그대로 외운다. 유대인은 성경을 몇장이란 관념 없이, 전부를 아이때부터 암기시킨다. 즉 외워 갑니다. 예수님이 신들이라고 써 있지 않던가, 지극히 높은 분의 아들들이라고 써 있지 않는가, 하고 82편을 인용했을 때에, 이미 유대인들은, 1절과 6절을 머리에 떠올리는 것이 아니라, 이 82편 전부를 다 생각합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혀 달릴 때, 「하나님, 나를 버리십니까」이 말을 했을 때도 그렇습니다. 1절만 우리는 이해하려고 하지만, 예수님은, 그 시편 전부를 인용하셨습니다. 그리고 유대인들은 그것을 이해합니다. 그렇지만, 우리는 몇장몇절에 써 있군요? 하는 생각 밖에 하지 않기 때문에, 예수님이 말하는 내용을 전혀 이해할 수 없습니다. 예수님이 여기서, 신들이라고 하는 것은, 한 글자도 성경은 페지하지 못함으로 잘못하신 것이 아니고, 예수를 하나님의 아들이라 했다고, 이미 구약 성경에 써 있으니까, 그것은 틀리지는 않다는 해석으로서는 안된다. 성경은 이렇게 써 있으니까, 이렇게 말한다, 하는 식으로 그 단어 하나로 논쟁하는 것은 아닙니다. 몇장몇절의 한 구절로 이해되는 것이 아니라, 82편, 혹은 시편에 쓰여져 있는, 그 작가의 의도를 참작하지 않으면 안 된다. 하나님의 그 의도, 배경, 참 뜻을 깨닫고, 그리고나서 인용하고 있다. 구약의 시대의 사람은, 모두 그렇게 인용합니다. 그렇지만, 지금의 시대는, 「신들이다」고 구약에서 말하기 때문에, 예수님은 잘못이 없다. 예수님은 하나님을 모독하지 않았다는 그러한 이해가 아니다. 구약과 신약을 그러한 식으로 비교하는 것이 아니라, 말씨가 잘못했다는 의미가 아니다. 성경은 파기될 수 없다고 예수님은 확실히 말합니다. 파기되지 않다는 것은, 변하지 않다. 찢어져 버릴 수도 없다. 변화되지 않는 하나님의 말씀, 절대로 변하지 않는 하나님의 말씀은, 반면 이런 의미입니다. 「반드시 성취된다」 성취하기까지는 결코 포기 않한다는 뜻이다. 하나님의 말씀은 달성 않알 수 없다. 반드시, 성취합니다. 그 말대로, 반드시 완성한다는 의미다. 폐기되지 않다는 것은 82편의 내용이 성취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82편 전부를 이해하지 않고서는 예수님의 이 말을 이해할 수 없습니다. 1절에 써 있군요. 6절에 써 있군요. 하는 증거를 보이라는 것이 아니다. 예수님은 이 82편에 써 있는 내용은 반드시 성취된다고 합니다. 지금 여기서, 신이다 라는 단어만으로, 「아, 그런가. 잘못하지 않다, 예수님이 옳다.」하는 식으로 이해해서는 안된다.
이 신들이다, 신의 아들이라고 하는 사람들은 누구입니까? 이스라엘의 지도자들, 교사들, 재판관들, 그리고 이스라엘을 통치하는 사람들. 그리고 하나님의 대변자, 하나님의 일을 하는, 사명을 받은 사람들입니다. 이 사람들 가운데서 하나님은 심판한다고 말합니다. 즉, 이 사람들을 재판하러 옵니다. 신들이라고 불리는 사람들, 신의 아들이라고 불리는 사람들을 심판하러 온다고 합니다. 이 82편의 내용은 그러한 뜻이다. 그리고, 왜 심판합니까? 가난한 자를 돌보지 않고, 약한 자를 보살펴 주지 않고, 고아를 구해 주지 않았던 이유입니다. 그리고, 이 시편의 작가는, 그렇게 고통받는 한 사람입니다. 이 이스라엘의 지도자와 자칭 유대인과 아브라함의 자손이라고 하는 사람들, 자기들은 하나님을 믿고 섬긴다는, 이 신들, 신의 아들들을, 언제까지 벌주지 말고, 하나님은 침묵하십니까? 이렇게 말합니다. 이대로, 이 고통받는 가난한 자를 돕지 않는, 이 교사들을 왜 놓아두십니까? 왜 악인을 내버려 둡니까? 오 하나님 일어나소서, 이 땅에 오셔서 심판하소서. 이것이, 82편의 작가의 마음입니다. 그리고, 예언이며,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반드시 하나님은, 신들 한가운데에 오셔서, 지극히 높은 분의 아들들이라 불리는 한가운데에 오셔서, 그 사람들이 행한 모든 악한 일을 벌주어 심판 하신다고, 한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오 하나님, 일어나셔서 이 땅을 심판하소서. 이는 모든 나라가 다 주의 것이기 때문입니다. ~
이 신들이라 불리고 있는 사람들은, 후에 어떻게 될까요? 보통 사람들처럼 죽게 되며, 다른 왕들도, 기본적으로는 권력 분쟁에서 반드시 살해당한다. 당신들도 살해당할 것이다. 그처럼 신의 아들들이라 불린 사람들, 지도자들, 교사들, 하나님의 대변자들은, 반드시 죽을 것이다. 어째서 입니까? 하나님께서 심판하러 오시기 때문이다. 82편의 작가는 말합니다.
너희는 신들이다, 라고 써 있다고 단지 예수님이 인용하는 것은 아닙니다. 「 하늘의 아버지의 일을, 나는 행하러 왔다.」고 합니다. 그러니까, 이 하늘의 아버지께서 보내신, 이 아버지의 일을 보라고 하신다. 그 일은, 「심판하러 왔다」누구를? 「 신들을, 신의 아들들을」그러니까, 하늘의 아버지의 일을 보고, 믿어라. 내가 전에 말하였으나 너희는 믿지 않았다. 내가 계시 했고, 계속 말해 왔다. 하고 말씀하신다.
오늘 이 말씀을 하신 날은 수전절입니다. 마카비 집안이 우상을 전부 없애버리고, 성전에서 바알신을 부수고, 성별한 날이다. 그것을 인용하고 있습니다. 내가 이 세상에 온 것은, 마카비처럼 하는 것이 아니라, 나, 예수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이 땅을 구해 낼 것이다. 여기에서 수전절의 참 의미를 말씀하시는 것이다.「 나야말로, 이 땅을 성별하러 왔다.」그것은 하늘의 아버지의 일을 보고 믿어라고 말합니다. 왜입니까? 예수님께서 행하신 일은, 가난한 소경의 눈을 뜨게 하며, 고통받는 사람을 구해내는 일이었다. 그 82편의 신들이 하지 않았던 일, 신의 아들들이 하지 않았던 일을 예수님께서 오셔서 하셨다. 이것이 하늘의 아버지의 일이라고 하신다. 그리고서, 너희는 그것을 보아서, 이 일을 위해, 나를 어찌 하나님을 모독한다고 말을 하느냐? 이 일 때문에 나를 죽이려고 하느냐? 예수님은 여기를 논증하고 있습니다.「그 일 때문에가 아니라, 당신이 하나님을 모독한 죄다.」하고 상대가 말하기에, 「 내가 하나님의 예언 대로 한 것 뿐이다. 반드시 심판하러 온다고 쓰여 있지 않느냐. 구약 시대의 예언자의 입을 통해, 내가 말했다. 그것이 지금, 성취했다」고 하셨다. 「하나님의 말씀은 한 글자도 페기하지 않는다.」이 뜻은 무엇입니까? 반드시 그 말대로 성취된다. 하나님이 「심판한다」하면, 피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우리 크리스찬에 대한 경고입니다. 「그대로 된다」가 예수님이 재림할 때 하시는 말씀입니다. 그대로 됩니다. 왜? 그것을 나는 계시 했다. 여기는 신들이다, 신의 아들들이다, 고 말했다, 안했다가 아니라, 그 말 때문에 하나님을 모독했다든, 그러한 차원에서 예수님이 반론한 것이 아닙니다. 82편의 이 기도가 성취된다. 82편의 이 예언을 성취하러 나는 왔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82편을 인용하셨다. 그리고, 그대로 완성하기 위해 나는 왔다. 이렇게 말합니다.
사카키바라 선생님도, 이 요한 복음서에서 말씀하셨던 일은, 현대 크리스찬들의 문제가 여기에 있다고 말합니다.「 신들이다」이 말은 「주여, 주여 」부르며, 예수는 하나님의 아들이다, 그리스도다, 를 너무나 간단하게 입으로 부르고 있다. 너무 쉽게 생각하는 그것이 문제라고 말합니다. 그런데도 하나님께서 무엇 때문에 오셨는가 관심이 없다.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이란 참 뜻을 모른다. 그리고, 예수가 그리스도라고 하는 의미를 알지 못한다. 그런데, 「주여, 주여」 부르며 「예수는 하나님의 아들」 이라고 말은 하지만 예수는 그리스도다, 십자가에 달려 죽으셨다. 그것을 믿는다고 말합니다. 이 시대는 그것을 고백하기가 어렵지 않다. 한 옛날이라면, 예수가 하나님이다고 말하면, 사람들이 놀라서 펄짝 뛰었다 할 정도다. 지금은 심하게 놀라는 일은 없다. 종이조각에 「그렇습니까」 「다릅니다」 「믿습니다」 「믿지 않습니다.」 라고 대답하는 것처럼 가볍기 때문에, 놀라는 사람도 없다. 그정도로 사람이 하나님에 대하여 모릅니다. 하나님은 재판관이며 모든 나라를 심판하시며, 그리고 죄가 뭔지, 기준을 결정하시는 권위를 가지고 있는 분이다. 죄를 다르시는 분입니다. 하나님이란 개념은 거기에 있다. 이 세상에서 불행하기 때문에 구해 낸다는, 나 중심에 개념이 원래 잘못되어 있다. 기독교는「나를 행복하게 해 주세요.」가 아니라 죄 용서가 어떻게 이루어졌는가 알리는 교리다. 죄를 심판하러 왔다. 이것이 예수그리스도가 온 이유입니다. 그러니까 요한은 이렇게 말합니다.「예수그리스도가 이 세상에 온 것은, 사탄이나 어둠의 세력을 파괴해서, 죄의 노예가 된 사람을 해방하기 위해서다.」
성경을 이해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재판관이다 라는 하나님의 개념이 없다. 서로 위로해주고, 서로 격려하고, 박애주의로, 평등하게 교회에서 일합시다 라고 호소한다. 하나님의 개념과 완전히 틀리다. 모든 것을 자기중심으로 결정해 간다. 인간 중심으로 예수는 그리스도라고 말한다. 이것은 다른 종교도 다름 없다. 바라는 것은, 이 땅에서의 천국, 이 땅의 행복입니다. 이 땅에서 모두가 평등하게 사는 세상. 그러니까 교회에 가고, 기독교가 되었다고 하는 경우, 잘못 이해하고 있습니다. 당시 유대인들도 전혀 이해하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예수님이 요단 강으로 돌아갑니다. 세례 요한에게서 예수님 자신이 세례를 받아 예수님 위에 성령께서 비둘기처럼 하늘로부터 내려와 머물렀던 곳이다. 그리고 거기서부터 예수님이 공적인 일을 시작하셨다. 여기 10장의 마지막으로, 예수님은 공적인 일을, 끝내셨다. 그러니까 돌아오신 것이다. 그런 이유로 요한은 10장을 요단 강으로 돌아왔다고 끝맺었다. 세례 요한은 기적을 행하지 않았지만, 예수님은 행하셨다. 예수님은 역시 달랐다. 그냥 예언자도 아니고, 모두가 소문난 다만 기적을 행하는 사람이 아니고, 정말로 하나님이었다. 그것을 많은 사람이 믿었다. 완전히 예수는 그리스도이며, 하나님의 아들이다. 라고 하는 요한이 원점으로 돌아옵니다. 예수님께서 왜 공생애의 일을 끝내시고, 일을 시작한 요단 강, 성령이 내린 그 자리에 돌아갑니까? 요한은 이렇게 말합니다. 「세상 죄를 지고 가시는 하나님의 어린 양.」이 원점으로 돌아옵니다. 「죄를 없애기 위해서 나는 왔다」 이 말을 한 곳으로 돌아옵니다. 이제는 기적을 행하거나 병 고침을 하지 않습니다. 이 후 십자가만이 남았습니다. 가시 면류관의 길만이 남았습니다. 예수그리스도가 죽을 시간만이 남았다. 그래서 예수님이 요단 강으로 돌아옵니다. 죽기 위해서 왔다고 한다. 최초의 사명을 성취하기 위해 예수님이 10장의 마지막으로 거기로 돌아오셨다. 「그리고, 많은 사람이 믿었다.」그것을 요한이 1 세기말에, 예수는 하나님의 아들이었다고 표현하고 있다. 정말로, 하나님이었다. 죽고 부활하신 주. 죽음에서 승리한 하나님입니다. 그 일이 남아 있다, 이 10장의 마지막으로 표현합니다. 그러니까, 예수님이 온 이유, 그것은 심판하러 왔다. 죄를 지기 위해서 왔다. 이것이 10장의 내용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말한다.「 나는 그리스도이며, 나는 하나님의 아들. 아비지께서 보내신 자다. 하늘의 아버지의 일을 하기 위해서 내려 왔다.」무슨 말입니까? 82편의 예언 성취입니다. 심판하러 온 것입니다. 이것이 하늘의 아버지의 일이며 그것을 믿어라. 하나님의 영광, 나라, 뜻, 계획, 진리, 성품을, 하나님의 사랑과 진리를 증명하기 위해 오셨다. 인간의 사정이 아닙니다. 마귀가 하나님의 이름을 더럽혔기 때문에, 그것을 되찾으러 오셨다. 그리고, 사탄의 일을 심판하러 왔습니다. 그 사탄의 일을 좋아하며 하나님과 대립하고 거역하는 인간도 심판하러 온 것이다.
믿은 사람은 이 세상을 승리했다고 요한은 말한다. 82편을 이해한 사람은, 이 세상을 승리하고 있다. 「 나는 선한 목자. 나의 양은 내 소리를 듣고 따른다. 내 음성을 따르지 않는 양은 내게 속한 양이 아니다.」
율법은 지금도 지켜야 할 하나님의 명령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한다, 영원히 변하지 않는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우리는 예수님께 간구해야 합니다. 이 명령을 지킬 수 있도록, 따를 수 있도록, 사랑이 없는 나의 죄를 사해 주시도록 기도합시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