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한복음 10장1-11절
~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문을 통하여 양의 우리에 들어가지 아니하고, 다른 데로 넘어가는 자는 절도며 강도요, 문으로 들어가는 이는 양의 목자라. 문지기는 그를 위하여 문을 열고 양은 그의 음성을 듣나니 그가 자기 양의 이름을 각각 불러 인도하여 내느니라. 자기 양을 다 내놓은 후에 앞서 가면 양들이 그의 음성을 아는 고로 따라오되, 타인의 음성은 알지 못하는 고로 타인을 따르지 아니하고 도리어 도망하느니라." 예수께서 이 비유로 그들에게 말씀하셨으나 그들은 그가 하신 말씀이 무엇인지 알지 못하니라. 그러므로 예수께서 다시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말하노니 나는 양의 문이라. 나보다 먼저 온 자는 다 절도요, 강도니 양들이 듣지 아니하였느니라. 내가 문이니 누구든지 나로 말미암아 들어가면 구원을 받고 또는 들어가며 나오며 꼴을 얻으리라. 도둑이 오는 것은 도둑질하고 죽이고 멸망시키려는 것뿐이요, 내가 온 것은 양으로 생명을 얻게 하고, 더 풍성히 얻게 하려는 것이라. 나는 선한 목자라. 선한 목자는 양들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거니와." ~
∼ 내가 너희에게 진리를 말한다. 양무리에 문으로 들어가지 않고 다른 곳으로 넘어가는 사람은 도둑이며 강도다. ∼
양무리에 대해서 예수께서 『나는 문이다』고 하셨다. 여기의 양무리는 일본 성경에는 양의 울타리, 담이란 표현이다. 문으로 들어갔다, 나갔다 하는『울타리, 담』은, 우리가 상상하는 그냥 넓은 광야에다 나무라든가 돌로 울타리를 만들어서 그 안에 양이 있다 하는 의미가 아니라, 이것은, 안뜰이란 의미로,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렸을 때, 빌라도의 저택에서 재판을 받고, 베드로가 거기에서 3번을 예수님을 부정한 곳, 그것이 안뜰이다. 그 안뜰을 말하고 있으므로, 여기에서의 울타리라 말하는 것은, 한 집 안에 있는 지붕이 연결된 한복판에 있는 넓은 곳, 소위, 지금 현대의 우리들이 알고 있는 정원입니다. 문을 통과하고 정원으로 들어가지 않는 사람, 그 뜻은 돌담을 조금 넘었다, 나무의 울짱을 조금 넘어서 들어간다는 의미가 아니라, 그 남의 집 문을 들어가지 않고, 허가없이 울타리를 넘어 들어온 사람입니다. 경솔하게 깡총깡총 뛰어 올라서 넘어 온 것이 아니라, 집 안뜰에 멋대로 들어간다는 의미다. 그러나, 우리는 유목민을 모르고, 또 양을 기르는 사람을 본적도 없고, 기본적으로 유대인의 유목에 관한 것을 잘 알지 못한다. 성경을 읽을 때 이런 말을 한 사람이 있다. 「유목민의 역사 서적인 성경을 이해 안하는 것은, 자기들은 양을 기른 경험이 없어서 이 비유를 이해하기 어렵다」 크리스천도, 이 양을 기른다고 하는 비유, 예수님이 늘 하시는 양치기의 이야기는, 우리들에 있어서, 별로 가까운 이야기가 아니고, 마음 깊이 침투하는 이야기가 아니다. 그래서 이 양치기가 뭔지, 우리가 어느정도 지식으로서 알아두지 않으면, 예수님이 하신 비유를 알 수 없다. 그러나, 이 양치기는 여러가지 있지만, 팔레스타인 지방의 양치기는, 다른 지방의 양치기하고는 또 다르는 특징이 있다. 이 팔레스타인의 양치기는 기본적으로 유럽, 우리들이 그림으로 보는 것 같은, 그 양치기와는 다르다. 그것은 땅이 황야이다. 바위밭, 암석지대이고, 그리고 동굴이나 구덩이가 있어서, 울퉁불퉁한 길이며, 그런 곳에서 양을 기르고 있다. 이러한 지역에 따라 차이가 있기 때문에, 팔레스타인의 양치기는, 다른 양치기와는 다르다. 어떤 여행자가 이 양치기들을 관찰하고 보니, 팔레스타인의 목자의 소리가 비명과 같은, 짐승의 울음 소리처럼, 또는 언어와 같은, 혹은 노래와 같은, 혹은 부르짖음과 같은, 소리를 들었다. 그리고, 그 양치기가 그 목소리를 발했을 때에, 양들은 풀을 먹는 것에 집중하여 고개를 숙이고 있었는데도, 양치기의 목소리를 들은 순간, 고개를 들었다. 그러나, 곧 움직이지 않는다. 그러나, 양치기가 다시 소리를 지르면, 이제 걷기 시작하는 것이다. 그리고 한번 더 양치기가 비명과 같은 짐승과 같은, 무서운 소리를 냈을 때에, 한 마리, 두 마리, 얼굴을 들고, 그 양치기를 따라 간다. 그러나 다른 양들은 아직 먹고 있다. 양치기는 계속 걸어가니 점차 보이지 않아져 언덕을 넘으면 또 양치기가 소리를 지른다. 그리고 양은 제대로 따라가기 시작했다. 드디어 모든 양이 얼굴을 들고 양치기 뒤를 따라가서, 이제 양치기는 보이지 않지만, 그 목소리를 들으면서 양의 무리가 움직인다. 이런 여행자가 쓴 책이 있다. 또 다른 팔레스타인으로 간 여행자에 의하면, 양치기의 그 목소리를 여행자가 흉내 내보았더니 단 한 마리도 양이 따라오지 않아서, 역시 양치기의 목소리에만 따라 간다는 이야기가 있다. 또 별도의 스코틀랜드의 여행자가, 팔레스타인의 양치기를 관찰하고 있었을 때에, 옷을 빌려 달라고 하고, 양치기의 옷을 위에서 아래까지 전부 입고, 그리고 자기 양복을 양치기에 건네 주고 입혔지만 역시 목소리를 듣고 따라가지 복장을 보고 따라가지는 않았다고 말하는, 3명의 여행자가 있다. 이 팔레스타인의 양치기를 관찰한 내용을, 종합적으로 합쳐 보아도, 이 양치기의 목소리를 듣고, 게다가 그 목소리는 특수해서, 어떤 사람이 흉내도 따라하기가 쉽지 않다. 그리고 보이지 않아져도, 이 양치기의 목소리를 더듬어 찾아서 따라가고, 아무리 복장을 바꾸었다 한들, 어떤 모습을 해도, 이 양치기의 목소리이외에는, 아무에게도 따라가지 않는다. 이것이 실제로, 사실적인 팔레스타인의 양치기의 특징. 양무리의 특징입니다. 그리고, 유럽이라든가 목축을 하고 있는 다른 지역에서의 양치기들은, 이 방법으로 양을 기르지 않다. 오히려, 양치기는 양무리 뒤에서 따라가는 것입니다. 먼저 양을 보내고, 잃어버린 양이 없도록 양치기는 뒤를 따라간다는 것이 일반 케이스입니다. 거기는, 땅이 평탄해서 위험이 적으므로, 그것이 가능합니다. 그러나, 아까 말한 것 같이 팔레스타인지방에서는, 지리적으로 안전하지 않기 때문에, 먼저 양치기가 지팡이로 쿡쿡 찌르고, 안전한 길을 찾고, 그 안전한 길을 뒤부터 양이 따라오게 한다. 그러므로, 양치기가 반드시 양 앞을 걸어가야 된다. 그리고 소리지르지 않으면 안된다. 그것이 팔레스타인 지방의 양치기 특징이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이 시대도 물론, 유목민이기 때문에, 양치기의 예는 귀에 익은 이야기다. 그러나, 지금 우리들이 이 양치기의 이야기를 들을 때에는, 뭔가 친절하고 상냥한 아름다운 이미지가 있어서, 좋은 곳에 인도하고 먹고 마시게 해 주는, 상냥한 할아버지적인 이미지가 있지만, 실제의 구약 성경 양치기는, 그런 상냥한 이미지는 없다. 먼저, 이스라엘의 북쪽을 공격해서, 그것을 지배해버린 앗시리아의 대왕조차 목자라고 부르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바빌로니아 왕 느부갓내살에 대하여도, 대목자, 라고 표현하고 있다. 전제군주이며, 실제 폭군들에도, 『목자』라고 부르고 있다. 그러므로, 구약 성경에 있어서, 양치기는, 우리들이 이미지한 상냥하고, 휴식의 물장에도, 목장에도 이끄는 친절한 사람이라는 것 보다, 왕적인, 지배자적인 의미를 가지고 있다. 그리고, 목자, 이 양치기는 구약 성경에도 많이 이 단어가 나옵니다. 에스겔서에 이 양치기에 관한 내용이 쓰여져 있다.
에스겔 34장 1-6∼여호와께서 내게 말씀하셨다. 「사람아. 이스라엘의 목자들을 향해 예언하여라. 그들에게 예언을 전하여라. 이것이 주 여호와께서 말씀하시는 것이다. 오직 자신들만을 돌보는 이스라엘의 목자들에게 재앙이 있을 것이다. 목자들은 마땅히 양 떼를 돌봐야 하지 않느냐? 너희는 살진 양을 잡아 그 기름진 것을 먹고 양털로 옷을 만들어 입을 뿐, 양 떼들을 돌보지 않는다. 너희는 약한 사람들에게 힘을 북돋아 주지 않았고, 병든 사람들을 고쳐 주지 않았으며, 상처 입은 사람들을 싸매 주지 않았다. 길을 잃고 헤매는 사람들을 찾아 데리고 오지 않았으며, 잃어버린 사람들을 찾아 나서지 않았다. 오히려 그들을 거칠고 잔인하게 다스렸다. 목자가 없기에 그들은 흩어졌고, 모든 들짐승의 먹이가 되고 말았다. 내 양들이 온 산과 언덕들을 헤매며 온 땅에 흩어졌으니, 아무도 그들을 찾아 나서지 않았다. ∼
여기에서 말하는, 제사장들이나 예언자, 구약의 지도자들을 목자라 부르고 있다. 그리고, 22절, 23절
∼내가 내 양떼들을 구해낼 것이요, 그들이 더 이상 약탈당하지 않을 것이다. 내가 양과 양 사이에서 심판할 것이다. 내가 그들 위에 한 목자, 곧 나의 종 다윗을 세울 것이요, 그가 그들을 기르고 돌볼 것이다. 그가 그들을 돌보고 그들의 목자가 될 것이다. ∼
제사장, 예언자들이 하나님을 따르지 않고, 하나님의 양을 돌보지 않으므로, 하나님 자신이 양을 구해내고, 하나님 자신이 목자가 되신다고 하시며 그 다음에 하나님이 택한 다윗을 목자로 세우고 양을 기른다고 하셨다. 목자란 구약시대는 제사장이며 예언자, 하나님 자신을 목자라고 하며, 그리고 하나님이 택한 다윗 왕도 목자라 하셨다. 그러므로 구약 성경에서의 목자라고 하는 것은, 전제군주도 그렇고, 지도자들이 목자라 불리었다. 그리고 하나님 자신도 목자라 불렀다. 그 목자가 이 양떼를 돌보고 인도한다는 내용이 오늘 10장입니다. 그리고 울타리 문에서 들어오지 않고, 벽을 넘어 들어오는 사람을 도둑이며 강도라고 말하고 있고, 나는 문이다고 하셨다. 이 목자가 누군가 하는 논의에서, 기원 1세기에서 2세기경에 이단이 나왔을 때, 이 목자가 누구며, 도둑이나 강도는 누구를 말하는지 할때, 1세기인가 2세기에는 구약 시대의 예언자들이라고 말한 사람들이 있었다. 점점 이 생각이 침투해서 결국 예수님이 오기 전의, 목자라는 명칭, 구약 성경에서 목자라 불리우고 있는 사람들은, 모두 도둑이며 강도라고 한다는 생각이 있어서 그러나, 그것은 다르다고 하는 또 다른 의견은, 여기서 말하는 도둑과 강도는, 신약 성경에 있어서 도둑이나 강도라 표현되어 있는 사람이 가룟 유다라고 말한다. 헌금을 훔친 사람이니 도둑이다고 하며, 또한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릴 때 빌라도가 석방하려고 하면, 바라바를 석방하라고 한 그 바라바를 강도라고 말하는 것이다. 여기에서 말하는 도둑이나 강도는, 구약 성경의 예언자일 수가 없다. 지금 예수님이 이야기 하는 이 도둑과 강도는 현재 존재하고 있다. 과거 형으로 예수님께서 말하신 것이 아니고, 지금 현재, 진행형으로 눈앞에 그 사람들은 있다고 말씀하시는 것을 보면, 구약 성경의 사람들이 아니다. 그것은, 지금으로 말하는 이단입니다. 이것은 이단이라고 말하며 도둑이나 강도란 비유를 바리새인들이 듣고 있지만, 그들은 예수님께서 무슨 말씀을 하시는지 몰랐다. 양치기의 비유를 모를 리가 없다. 유대인은 기본적으로 유목민이기 때문에, 양치기의 비유를 모르는 것은 아니다. 그들이 이해가 안된 것이 뭔가 하면, 양들의 문이다고 하신 예수님을 몰랐던 것이다. 『나는 문이다』는 단어는 구약 성경에는 나오지 않다. 『나는 목자』 하는 단어는 나와도, 『나는 문이다. 』 하는 말이 없기 때문에, 이 바리새인이 예수님이 무슨 이야기를 하는지 모른다. 양치기의 비유라면, 곧 상상이 가지만 『나는 문』이라는 말에 걸려버린 것이다. 그리고, 그 문으로 들어가지 않은 사람은 도둑이나 강도라고 예수님이 지금 말씀하십니다. 기본적으로 목자는 아침 눈을 뜨면 아침해가 떠오르기 전에 울타리로 가고, 양을 이끌고, 목초지나 물가로 데리고 가는 것이다. 그러므로, 여기서 말하는 강도는 이 목자가 가기 전, 아침이 되기 전, 밤에 울짱을 넘고, 돌담을 넘어서 멋대로 그 남의 집에 들어오고, 양을 흠쳐 가는 사람들을 말하고 있기 때문에, 현재 그 사람들이 있다고 하는 의미에 있어서, 신약 성경에 있어서는, 먼저 가룟 유다가 도둑, 예수님의 헌금을 훔치고 있었다. 그리고 강도의 바라바, 살인을 범한 바라바가 도둑이라고 하는 의견이 있지만, 그러나 그 당시의 유대교 지도자들을 예수님이 도둑이며 강도라고 하신 것이 맞다고 생각된다. 그리고 무슨 말을 하는지 모른다고 하는 그들과 예수님이 논쟁중입니다. 이 도둑이나 강도는 지금 현재도 있고, 예수님이 이야기하는 중심에 있다고 하는 비유다. 그 후 사도행전에도 보면 예수의 일파, 예수의 제자들이 예수님 이름을 가르치고 설교하는 것 때문에, 이 사람들을 붙잡아 감옥에 가두어야하지 않겠느냐, 유대교 지도자들이 모여 논의할 때에 갑자기 가말리엘이라는 한 바리새파 사람이 공의회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여러분들이 이 사람들에게 어떤 행동을 하려 하는지 깊이 생각해 보십시오. 얼마 전에 자기가 대단한 인물이라고 주장했고, 400명 가량 되는 사람이 그를 따랐다. 그러나 그가 죽임을 당하자, 흩어져 없어지고 말았다. 이후 유다라는 사람이 나타나 백성을 이끌고 다녔으나 그가 죽임을 당하자 역시 흩어지고 말았다. 이 사람들에게서 손을 떼고 그대로 내버려 두는 것이 좋겠다. 사람에게서 온 것이라면 실패할 것이지만, 만일 하나님께로부터 온 것이라면 막을 수 없는 것은 물론이고, 잘못하면 하나님과 맞서 싸우는 것이 되기 때문이다.」 말했다. 그 당시, 예수님이 계실 전후에도 폭동을 일으키는 패거리들이 많이 있었다. 그러므로, 거짓예언자, 거짓해방운동, 가짜 지도자가 그 당시 가득히 존재하고 있었다. 그것은 로마제국을 반대하는, 유대 해방운동의 하나이기에, 당시는 제사장속에서도 많이 일어나 폭동을 일으키고, 혁명을 일으키고, 반란을 일으켰다. 그러나, 그 사람들은 결국 거짓예언자, 거짓메시아라고 표현을 하고 있다. 이런 사람이 도둑이다고 하는 학자도 있지만, 사카키바라 선생님은 그렇지 않고, 여기서 말하는 도둑이나 강도는, 그러한 바라바라든가 폭동을 일으킨 사람의 비유가 아니다고 하신다. 그것은10절의
∼도둑은 흠치고, 죽이고, 파괴하기 위한 목적으로 온다. ∼
도둑이 어떠한 사람인가. 죽이다는 말은 짐승을 죽이고 제물, 희생물로 바친다는 의미다. 그러므로, 단지 살인한다고 하는 뜻보다도, 성경에서 제사장들이 짐승을 죽여서 제단에 희생물로 바친다고 하는 의미입니다. 단지 죽이는 것은 아니고, 제사를 할 때에 양을 죽인다고 하는 의미입니다. 그러므로, 이 비유는 오히려 9장에서 일어나던 소경의 재판도 그러했다. 이 소경의 재판은, 눈을 뜨게 해준 것은 예수님이다. 라고 말한 순간에 유태교로부터 추방되었다. 성전에서 쫓겨난 것이다. 그것을 예수님이 빈정거려서 말하신 것이다. 유태교 지도자들은 자기들이야말로 교회의 권위자이며, 권력이 있고, 하나님의 권위는 자기들에게 있다. 그러므로, 자기들은 재판할 자격이 있고, 권위가 있다고 하며, 이 소경을 그 권위로 내쫓았다. 그러지만 예수님은 아니다고 하신다. 오히려, 내 양을 거짓 위조예언자, 도둑, 강도에서 나 자신이 양을 되찾았다. 이란 뜻이다. 제사장과 율법사나 바리새인들은 하나님을 섬기는 하나님의 대변자, 우리들은 하나님께 제사 드리는 사람이라고 하지만 그 사람들의 진실은 하나님의 양을 내쫓고 있다. 하나님의 양들을 죽이고 있다. 그러니까 바라바나 폭동을 일으킨 사람을 도둑이다고 말하지 않고 구약의 사람들이 도둑이라고 한 것이 아니라, 예수님이 누구를 보고 강도라고 하신가 하면, 제물를 드리는, 희생물을 바치는 사람들. 그 사람들이 내 멋대로 하나님의 것을 흠치고, 하나님의 대변자로서의 일도 하지 않고, 멋대로 하나님의 양을 내쫓고, 하나님의 양을 상처 입히고, 하나님의 양들을 죽이고, 그래서 예수님께서 양을 찾으신다. 내가 참된 목자라고 하고있다. 그러니까, 9절
∼나는 문이다. 나를 통해 들어가는 사람은 구원을 얻을 것이다. 그 사람은 편히 들어가기도 하고 나가기도 하며 또 좋은 목초를 찾을 것이다. ∼
여기서 『드나들어』 는, 안정된 생활이라고 하는 의미로, 예수님에게 구원을 얻은 사람이 마귀에 잡히거나, 하나님에게 돌라오거나, 믿음을 가지거나, 없애거나 하는 들어갔다, 나갔다, 하는 흔들림이 아니라, 안정된 생활을 보낼 수 있다는 뜻이다. 『나의 문을 통하면』 『나, 예수그리스도의 이름을 통해서 구원된 사람은 이제 두 번 다시 죽임을 당하거나, 도둑 맞거나 할 일은 없다. 나는 내 양을 돌보는 하나님이다. 』 하는 예수님의 절대적인 권위를 지금, 주장하신 것입니다. 그리고 도둑은, 논 크리스천의 해방운동을 말하는 것도 아니고, 예수님이 오시기 이전의 구약 사람들을 말하는 것이 아니고, 지금 현재, 내 눈은 보인다, 하며 하나님께 바치고 있다, 하는 사람들을 향해서 「당신들은 강도다. 」, 「나야말로, 참된 목자다」라고 지금 말씀하시고 있다. 절대적인 예수님의 권위를 말하고 있다. 그러나, 바리새인들에게는, 이 양치기의 비유는 알았어도 예수그리스도가 문이며, 그 문을 들어가지 않으면 안된다고 하는 것을 모른다. 그 의미를 전혀 이해 못하고 있다. 왜? 그들은 하나님의 소리가 들리지 않습니다. 그들에게는, 하나님의 말씀, 목자의 음성이 들리지 않는다. 들린 것은 누구지요? 소경이었다. 소경의 귀에는 들린 것이다. 참된 목자의 목소리가. 그리고, 예수님은 살인자나, 강도에게 도둑 맞은 양을 되찾고 있는 것입니다. 그들은 자기 스스로는 옳고, 율법을 지키며, 성경에 따라 죄가 많은 소경을 내쫓고 있을 지도 모르지만 그들은 살인자라고 말하신다. 목자가 아니라 가짜다, 하고 예수님이 말씀하신다. 이것이 누구를 비유해서 말하고 있나 하면, 하나님 성전에서 일을 하는 사람들, 지금 예수님이 여러분들이야말로 도둑이며 강도다. 나의 소리를 들을 수 없고, 무엇 보다도 예수님의 문을 통해 들어가지 않았다. 불법으로 들어온 사람들이다, 하고 예수님께서 하시고, 바리새인들을 완전 부정하고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은 하나님의 종이 아니다. 왜냐하면, 만약 그렇다면, 나의 소리를 들을 수 있고 나의 음성에 따라 올 것이다.
제2 스위스 신앙고백이란 문서가 있어서, 유럽 웨스트민스터 교회에서도 『신앙고백』이라는 조항이 있는데, 그것은 제2 스위스 신앙고백에 관한 질의응답 형식으로, 사카키바라 선생님은 그 서적을 전부 읽으셨다. 제2 스위스 신앙고백을 그 교회나, 그 교단, 그 교파는, 어떻게 생각하는지 질문이 있는데, 『참된 교회는』이란 신앙 고백 중에서, 이 『참된 교회』는, 그리스도를 머리로 철저하게 한다. 이것이, 첫번째에 있다. 교회의 머리는 그리스도, 이외 머리는 없다. 이것이 참된 교회다. 그리고 참된 교회의 또 하나는, 나의 교회야말로 참된 교회다. 하고 자랑하는 교회는 참된 교회라 인정 안한다. 그럼, 참된 교회는 도대체 어떤 교회인가? 성경의 말씀을 정확하게, 충실하게 정직하게 설교하며, 그 말씀에 철저히 순종하는 교회를 참된 교회로 인정한다, 이것이 제2 스위스 신앙고백이다. 참 교회는, 예수그리스도가 하신 말씀에 충실하게 따라가고, 말씀을 가르치는 교회가 참된 교회이며, 그리스도를 주로 모시고, 왕이 되시고 머리가 되는 교회가 진실한 교회이지, 자기야말로, 좋은 일을 하고, 여러 이벤트를 하고, 크게 짓고, 성도수가 많다. 그러므로 이 교회는 참 교회다, 라고 하지 않는다. 이 제2 스위스 신앙고백이 있듯이, 예수그리스도를 통해 들어오지 않으면 결코 거기는 예수님이 돌보는 양의 무리가 아니다는 것이다. 이 예수님은, 「나는 문이다. 」강조하고 계시지만, 「나는 진리이며, 생명이며, 길이다」라고도 하신다. 그러므로, 나를 통하지 아니면, 하늘의 아버지 계시는 곳에는, 아무도 갈 수 없다고 하신다. 예수 그리스도야말로, 하나님께로 가는 길이다. 이 길 이외 어떤 길도 없다. 그리고 길보다 더 중요한 것이 문입니다. 예수님께로 도착할 때까지는, 여러 길이 있다. 예수님을 알 때까지 길은 가지각색일지도 모르지만, 문은 하나밖에 없습니다. 이 문을 통해서 좁은 하나의 길을 가는 자가 예수님이 목자가 되시고, 예수님이 돌보는 울타리 안에 양무리다. 그러므로, 여기는 안전하며, 안심이 있고, 평안이 있고, 참된 기쁨, 참된 구원이 있다고 예수님이 말하신다. 「나는 참된 목자. 나를 통하지 않으면, 아무도 여기를 들어올 수 없다. 」 절대적인 예수님의 권위를 말합니다. 그래서 바리새인들은 무슨 말을 하는지 모른다. 이 문을 통하지 않고서는 하나님으로 못 간다는 말이 그들에게 전혀 이해가 가지 않는다. 왜? 예수님의 소리가 들리지 않습니다. 들리면 따를 것입니다. 그것이 목자와 양의 관계이다. 이것이 팔레스타인 유목민의 현실이다. 목자가 소리를 발하면, 절대로 1마리 남김 없이 따라오는 것이다. 이것이, 참된 목자와 참된 양의 관계. 그러므로 나의 목소리가 들리지 않는 것은, 원래 강도나 도둑이며 나의 양이 아니다. 예수그리스도의 말씀을 따르는 것이 양이며, 예수님의 음성이 들리는 것이 양이다. 그것이 참된 교회다. 여기 10장 1절에서 10절까지 예수님이 문이다고 하는 의미입니다.
어떤 사람이 사카키바라 선생님에게 편지를 보내왔다, 「지금 이단이 많이 교회 안에 들어오고, 일본 기독교 교단에서는 그것을 철저히 가르치고 있지만, 왜 이 교파에서는 그것을 철저히 가르치지 않는가? 방어하며 이단과 싸워야 한다. 」라는 정중한 편지가 보내왔다. 이 선생님의 말은 이렇습니다. 「 가르친다, 가르치지 않는다, 보다 더 신기한 것은 그렇게 간단히 거짓예언자, 도둑, 강도가 교회 안에 들어오고, 거기에 따라가는 양들이 이상하다. 왜 그렇게 쉽게 속아서 따라가는지? 목자의 소리도 아닌데. 」라고 말하신다.
그러나 소경은 예수님의 소리를 들은 것입니다. 그는 말했다. 이제까지 죄인의 눈을 뜨게 한 사람은 없다. 그는 예언자라고 생각하며 하나님께서 보내셨다고 생각한다. 이 말을 한 소경은, 유대교에서 쫓겨나서, 예수님의 양무리로, 예수님의 문을 통해서 들어왔습니다. 그는 물었다 「선생님은 누구세요? 」「나는 메시아다」 그것을 들은 순간, 예수님을 예배했습니다. 깨뜨려져서 예수님 앞에서 무릎을 꿇고, 그는 진정으로 예수님을 예배한 것입니다. 정규 절차를 밟아 문을 들어온 것입니다. 그러나 바리새인들은 회개하지 않고, 자기는 보인다고 했다. 그것을 예수님은 도둑이며, 강도다, 말했습니다. 이것은 우리 크리스천의 경고입니다.
많은 사람은 이 경고를 싫어한다. 자기 생각이 깨뜨려지거나, 부정 받거나, 비참해지는 것을 기분이 상한다고 한다. 자신의 감정대로, 생각대로 하지 못한 것이, 정말로 싫어서, 이것에 반항하고 싶다. 그런 사람들은 회개 할 수 없습니다. 자기의 자아를 파괴하고, 감정을 파괴하고, 생각을 전부 파괴시켜 예수님을 따르는 것이 양이며, 이것이 문을 통해 들어간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기도한다. 이 문을 들어가고, 좁은 길에 가기 위해서, 이 아름다운 정말로 숭고한 그 길을 가고 싶기 때문에 기도하고, 그 길을 가고 싶기 때문에 성경을 읽는 것입니다. 우리들은 스스로 아무 것도 할 수 없습니다. 제 생각은 언제나 비열합니다. 그러므로 성경을 읽고, 아름다운 분에게, 예수님의 성품에 닮아 가기 위하여 자기 감정을 버린다. 자신의 달성감, 만족감을 위한 것은, 이제 강도이다. 다른 길입니다. 넓은 길입니다. 예수님의 길은 가난하고, 굶주려 마르고, 슬퍼하고, 가는 길입니다.
가난한 사람이 축복이 있다고 성경에 있습니다. 하나님이 채우기 때문입니다. 회개한 사람만이 평안이 있습니다. 하늘로부터 내려 옵니다. 자기 스스로 이 평안은 얻을 수 없습니다. 기도하고, 하나님의 은혜를 구하는 것입니다. 사람에 있어서 이외의 방법으로 행복해지는 길은 없습니다. 이 세상이 주는 평안은 일시이며, 예수님이 주시는 평안은 영원히 계속되기 때문입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