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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esus Christ Glory Church

요한복음 9장1-12절

2018.02.14 15:55

~ 예수께서 길을 가실 때에 날 때부터 맹인된 사람을 보신지라. 제자들이 물어 이르되 '랍비여 이 사람이 맹인으로 난 것이 누구의 죄로 인함이니이까? 그의 부모니까?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이 사람이나 그 부모의 죄로 인한 것이 아니라, 그에게서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나타내고자 하심이라. 때가 아직 낮이매 나를 보내신 이의 일을 우리가 하여야 하리라. 밤이 오리니 그 때는 아무도 일할 수 없느리라. 내가 세상에 있는 동안에는 세상의 빛이니라'. 이 말씀을 하시고 땅에 침을 뱉어 진흙을 이겨 그의 눈에 바르시고, 이르시되 실로함 못에 가서 씻으라 하시니 (실로함은 번역하면 보냄을 받았다는 뜻이라) 이에 가서 씻고 밝은 눈으로 왔더라. 이웃 사람들과 전에 그가 걸인인 것을 보았던 사람들이 이르되 이는 앉아서 구걸하던 자가 이니냐. 어떤 사람은 그 사람이라 하며, 어떤 사람은 아니라 그와 비슷하다 하거늘, 자기 말은 내가 그라 하니, 그들이 묻되 그러면 네 눈이 어떻게 떠졌느냐? 대답하되 예수라 하는 그 사람이 진흙을 이겨 내 눈에 바르고 나더러 실로함에 가서 씻으라 하기에 가서 씻었더니 보게 되었노라. 그들이 이르되 그가 어디 있느냐? 이르되 알지 못하노라 하니라. ~

이 요한복음 9장은 나면서부터 앞 못보는 소경의 눈을 뜬 이야기입니다만, 여기서 제자들은, 어느정도 지나서 소경이 되었더라면, 그 사람의 죄일지도 모르지만, 나면서부터 이런 불행한 일이 일어난 원인을 알고 싶어서, 이것은 본인입니까? 부모입니까? 하고 물을 때, 예수님이 「이 사람이나 그의 부모가 죄를 지어 이렇게 된 것이 아니다. 하나님의 일을 그 사람의 생애를 통해 나타내기 위해서이다. 」이라고 대답하고 있는 것이다. 이것은 크리스천이 아니어도, 그 어떤 사람도 나면서부터, 혹은 갑자기 불행한 일이 있거나, 병이 나거나, 누군가의 이별이 있거나 했을 때에, 뭔가의 천벌일까? 해서 생각하는 것이다. 어떤 나쁜 짓을 하여 천벌이 내린 것이 아닌가? 일반적인 사람은 과거를 상기한다. 혹시나 선조가 지독한 죄를 범해서 이렇게 된 것 아닐까? 혹은 과거에 죄가 있었기 때문에, 이런 불행한 일이 일어났다고, 사람은 과거를 되돌아본다. 과거에서 문제를 발견한다. 과거에 있었던 문제를 밝혀서 그리고 그것과 현재 일어난 불행을 저울로 재서 해당되면 「자, 어쩔수 없다. 」하고 들어맞지 않으면, 불평불만해서 「왜 내가…」하며 낙심한다. 그래서, 납득이 가게 균형을 잡으려 한다. 이 불행은 나에게만 이른 것이 아니라, 과거 무슨 실수때문에 그 원인이 있다고, 자신을 납득시켜, 설득하고, 이 불행을 받아들이려고, 이것은 흔하디흔한 세상사, 라고 생각하는 것이 이 세상의 방법이다. 종교심 보다는 인간이 내 안에서 소화시키려고 하는 것. 그러나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은 원인은 과거가 아니라고 하셨다. 그래서 현재도 아니다. 이것은, 미래에 관한 사건이라고 말씀하신 것이다. 이 저울은 인간의 생각과, 예수님의 생각이 다르다는 것이 명백합니다. 인간은 과거의 뭔가, 과거의 누군가하고 현재의 불행을 비교해서 납득하고 싶어 한다. 그러나 과거가 아니라 장래 일어날 일과 저울로 재라, 하고 예수님은 대답하셨다. 그것은 미래에 있어서의 사건이야말로, 이 불행의 의미를 가지고, 목적을 추구 할 수 있다. 예수님께서 이것을 미래를 향해서 너희는 받아들이지 않으면 안된다. 하고 말하신다. 그러나, 이 미래가 어떤 미래라고 하면, 「하나님의 영광 때문이다. 하나님의 능력이 나타나기 때문이다. 낮이 계속되는 동안, 나를 보내신 분의 일을 계속해야 한다. 아무도 일할수 없는 밤이 올 것이다.」하는 설명을 하신 것이다. 이 일은 앞으로 올 미래가 변할 수 있다. 그리고 문제의 원인 또한 근거는, 과거에는 없다. 그러나, 무조건으로 미래를 바꿀 수 있다는 말이 아니다. 여기에 하나님의 일을, 예수를 보내신 분의 일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일을 했을 경우에, 이 불행은, 미래에 있어서 다른 목적을 가지게 된다. 무조건이 아닌 입 다물면서, 이 불행이 행복으로 변화 될 리는 없다. 이 세상의 사람들은 모두 저울질하고, 사람과 비교하고, 과거와 비교하고, 남과 비교하고, 이 자기의 불행을 계산하고 싶다. 그러나, 하나님의 저울, 하나님의 계산은 안 그렇다. 과거에는 없다. 이것은 미래에 있어서 일어날 수 있는 것. 그리고 이것은 로마서,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 이 뜻은, 『낮이 계속되는 동안 일하지 않으면 안된다.』 무조건으로 하나님이 일하고, 이익으로 바꾸는 것은 아니다. 여기에 조건이 있는 것이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에 있어서는, 이 불행한 사건, 교통 사고, 병, 아픔, 이별, 가난, 재앙, 이 모두가 유익으로 변한다.

이것을 신학자는 이렇게 말한다. 이 사건을 유익으로 바꾼다 하는 것은, 영국에 웨스트민스터 교회의 신앙 고백, 질의응답 안에 있는, 「하나님께서는 어떻게 일을 하십니까? 」이 질문의 대답이 이렇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창조와 섭리로부터 시작되어 있다.」

이 불행은 앞으로 변할 수 있다. 하나님께서 일하시면 선을 이루신다. 이 불행은 행복으로 바꿀 수 있다. 이것은, 언제 시작되는가? 우주만물의 창조 때부터 현재, 또 미래에 이르기까지 섭리 안에 숨겨져 있다. 섭리 안에 대답이 있다. 섭리 안에 열쇠가 있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우주만물, 통치 방법, 그리고 창조한 피조물 안에 대답이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모든 역사속에 대답이 있다. 이 사실안에 불행이 행복으로 변하고, 과거로부터 내려오는 모든 불행한 사건이 하나님의 일을 위해, 하나님의 영광으로 바꿀 수 있다는 것은, 과거로부터 시작하여 영원한 미래 가운데 대답이 있기 때문에, 하나님의 일하심을 지금 현재, 다 알수는 없는 것이다.

하나님의 계획, 그림, 뜻, 요구, 기뻐하시는 일을, 지금 현재 모두 알려면, 인간은 무리하다. 지금, 어느 정도 안다고 해도, 갑자기 일어난 불행, 일어난 사건이나, 문제는 하나님의 섭리, 통치 안에, 또 역사를 인도하는 하나님의 손바닥 아래, 그 대답이 숨어있다. 그러나, 그 대답을 이제 곧, 전부 100% 이해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러므로, 이 섭리, 도리, 원리 안에서 대답을 찾아내고, 그리고 믿음으로 그것을 기뻐한다는 것이 하나님의 영광,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것. 하나님의 일하심,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들이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히브리서에 이 믿음으로 아직 보이지는 않지만 그것이 사실임을 알고 기뻐하며, 확신하며, 이 땅에서는 나그네처럼 사는 것이다. 살아가는 동안에 일어난 사건, 모든 행복도,불행도, 나그네의 길을 가는 잠깐이며, 앞으로 이르는 미래에 있어서는, 기뻐할 일이라 하는 해석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일하셔서 선을 이루신다.

왜, 이 사람에게 이런 불행이 일어난 것입니까? 이것은 과거에서 이유를 찾는 것이 아니라 미래, 그리고 하나님의 섭리, 도리, 원리 안에서 찾아내지 않으면 안됩니다. 그리고 그것은, 낮에 일하지 않으면 안된다고 한다. 왜냐하면, 요한은 「내가 세상에 있는 동안, 나는 세상의 빛이다. 」 「예수님은 세상의 빛이다. 」이라고 표현하고 있다. 그리고, 이 세상의 빛은, 주님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부활하신 후「너희들이 세상의 빛이다. 」라고 하셨다. 예수님께서 승천하신 후에는, 크리스천을 향하고, 「너희들은 세상의 빛,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다. 」라고 말씀하셨다. 그러므로, 예수님이 이 세상을 비춘 것 같이, 이번에는 믿는 성도가 이 세상을 비추어 가지 않으면 안된다. 그 빛의 역할을 다했을 때에, 자손 혹 자신의 몇 년후, 혹은 다른 사람에게서, 이 하나님의 영광이 나타나는 것입니다. 지금, 이 시점에서 판단할 수는 없다. 지금은 하나님의 일을 다 알 수 없다. 자손의 시대, 자기하고 관련되지 않는 누군가가, 다음 시대를 짊어가는 사람에게, 이어져 가는 것. 이 소경은 구걸하던 사람이었다. 그 자손도 구걸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하나님의 섭리안에서 그 누군가를 구할 수 있고, 하나님께서 일하시면, 선을 이룰 수가 있다. 그것은, 내 눈으로 보이지 않을 지도 모른다. 곧 바로는 느끼지도 못할 수 있다. 그러나,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일어난 것이다. 불평불만 하는 사람은 그 상태로 있을 수 밖에 없다. 이것은, 낮이 계속되는 동안에 세상의 빛으로서, 크리스천으로서, 하나님의 일하심을 믿고, 지금은 몰라도, 믿음으로 확신하고, 소망을 가지고, 믿음으로 인내할 때에, 뒤에 하나님께서 영광을 나타내신다. 그것은 10년후 일지도 모른다. 혹은 20년후 일지도 모른다. 본 적도 없는 자손의 시대에서 일어날 지도 모른다. 혹은, 다른 나라, 다른 사람에게 일어날수도 있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정하신다. 하나님의 섭리, 하나님께서 만드시는 역사안에서 정해져 있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은 하나님께 쓰임을 받고 역사안에 등장한다. 역사는 하나님께서 계획하신 대로 움직입니다.

하나님의 결정, 하나님의 말씀은 허무하게 끝날 일이 없습니다. 완전하신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계획을 반드시 하나님 때에 성취하십니다. 인간 스스로 타락하고, 불신앙 때문에 이 세상은 더럽혀졌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는 이 불행을 하나님이 변화시켜, 이 세상의 소금 역할을 다 합니다. 그러나, 거기에서 하나님에게 반항한 사람들은, 자손도 저주받는 것입니다. 3, 4대 저주받는다고 십계명에 써있다. 「나에게 죄를 짓고 나를 미워하는 사람에게는 그의 삼대, 사대 자손에게까지 벌을 내릴 것이다. 」이라고 하는 율법이 있다. 그 율법이 있기 때문에, 지금 제자는, 이 죄가 부모이었던가, 본인이었던가 궁금해진 것이다. 왜냐하면 이 사람이 죄를 범할 리가 없지요. 나면서부터 소경이다. 태어나자마자 죄가 드러나는 것은 선조의 죄입니까? 하고 물어본 것이다. 제자들은 이 하나님의 계명 3대, 4대 저주받는다는 말로 인하여, 그것을 예수님에게 질문한 것이다. 그러나, 예수님의 대답은 과거에는 없고, 미래에 있다는 것이다. 앞으로 하나님께서 선을 이루시고, 빛이 비추는 사이에 일하는,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에게는, 합력해서 전부 유익하게 바꾸어 준다. 하고 예수님께서 대답하셨다. 그리고 5절∼내가 세상에 있는 동안, 나는 세상의 빛이다. ∼ 하신 후에, 땅에 침을 뱉어 그것으로 진흙을 만드시고 그 사람의 눈에 발랐다.

옛날부터, 상처에 침을 뱉어 발랐다. 이것은 어느 나라에서도 이런 미신이 있고, 또 나았다고 전해져 왔기 때문에, 예수님께서 진흙을 발랐다고 하는 사건도, 그 미신과 같은 생각을하는 사람들이 있다. 더구나 다른 복음서에서도, 예수님은 침을 발라 고치신 장면이 있다. 그러나, 여기서 예수님께서는 침만이 아니라, 침과 진흙이었던 것입니다. 거기에, 예수님의 뜻이 있어서, 요한 복음서에 기록된 것입니다.

어느 로마의 황제가 알렉산드리아의 도시에 갔다가 돌아갈 때, 팔에 장해가 있고, 또 한명은 소경인 사람이 신의 예언을 들었다고 말하여, 이 황제의 침을 바르면 눈이 열리고, 황제가 발로 밟으면, 손이 낫는다고, 끈질기게 찾아온 사람이 있었다. 황제는 의사를 부르고, 어떻게 하면 좋은지 물어보며, 나을 리가 없다고 말했을 때, 의사는 「그대로 해 주면 좋은 것 아닙니까? 만일 황제의 침으로 낫고, 황제가 밟아서 팔이 나으면 그것으로 좋다. 황제의 영광이 되지만, 만일 낫지 않아도 그들이 창피한 것 이지, 일단 해 보면 어떻습니까? 」 하는 의사의 조언으로, 황제가 실제로 침을 눈에 바르고, 발로 밟았을 때, 나았다고 하는 전설이 있다. 이러한 이야기는 어느 나라에도 있으므로, 이 복음서에서 씌어진 예수님도 그런 미신을 이용하고, 이 소경을 고치려고 하신 것이 아닐까? 그런데 그럴 수 없다. 그 황제마저, 침으로 낫다고 생각안했다. 더구나 이 침으로 낫는다고 해버리면, 그런 인상을 사람에게 주어버린다. 그러면 예수님보다 미신이나, 전설같은 기적에 사람의 눈에 뛴다. 혹은 예수님께서 이 때 침과 진흙을 사용한 것은, 이 침은 진흙을 만들기 위한, 수단에 지나치지 않았다하면, 이번에는 진흙으로 낫는다고 오해하게 된다. 그러나, 이 진흙으로 낫는다고 하는 것도 있을 수 없는 현실입니다. 진흙으로 낫는다면, 누구나 병을 고치면 되지만, 그것을 믿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그러므로 결국, 침이든 진흙이든, 이것을 써서 치료한다는 것이 예수님의 뜻이 아닙니다. 이런 미신을 예수님이 사람에게 믿게 하실 도리가 없다. 그럼 왜 이런 필요도 없는, 아주 귀찮은 일을 하셨을가? 이 일을 하신 후 【실로암】샘에 가서 씻으라고 하셨다. 게다가 소경은 진흙을 만들어 바른 것조차도 알지 못할 것이다. 눈이 안보이니 진흙을 바른 후 샘에 가서 씻으라 하는 말을 들은 것뿐이다. 예수님께서 왜 그러셨던가 하면, 【나아만】장군도 그러했다. 【나아만】장군은 문둥병에 걸려있었다. 그는 아람 왕의 사령관이었다. 그는 왕이 사랑하며 강하고 용감한 사람이다. 그 【나아만】장군은 하나님의 사람인 【엘리사】가 있는 이스라엘로 찾아와 문 밖에 섰다. 그리고「이 문둥병을 고쳐 주시오」하였다. 그러나【엘리사】는 심부름하는 사람을 보내서 본인은 밖으로 나와 인사도 안했다. 이 유명인이 왔기 때문에 【엘리사】가 기뻐해서 그가 믿는 주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며 병든 자리에 손을 얹고 고칠 줄 알았다. 그런데 제자에게 말시킨 것이었다. 「요단 강으로 가서 일곱번 씻으시요. 그러면 당신의 피부가 고침을 받아 깨끗해질 것이오. 」그 때에, 【나아만】이 굉장히 노합니다. 요단강보다 다마스커스에 있는 아마나 강이나, 바르빌 강이 이런 질척질척한 흙탕물의 강에서 씻는 것 보다는 상당히 좋지 않은가? 나아만은 크게 화를 내며 발길을 돌렸다. 그러나 종들이 가까이 와서 말했다. 주인님, 만약 저 예언자가 그보다 더 큰 일을 하라고 했더라도 그대로 하지 않았겠습니까? 그런데 기껏해야 몸을 씻으라는 것뿐인데 그 정도도 하지못하시겠습니까? 그리하여 나아만은 내려가서 엘리사가 말한 대로 요단 강에 몸을 일곱번 담갔다. 그러자 나아만의 살결이 마치 어린아이의 살결처럼 깨끗해졌다. 이 때 문둥병이 완전히 나았다는 이야기가 구약 성경에도 나오지만, 이 때도 같습니다. 그런 것 하지 않아도, 【엘리사】가 손을 얹고 나았을 지도 모른다. 말 한마디 해도【나아만】장군을 고치는 일은 하나님에게는 가능합니다. 그럼 왜, 이 소경이나, 【나아만】장군에게도, 가지각색 주문을 하실가요? 하나님이 그렇게 말씀하셨기 때문에, 순종하라. 이것이 중요합니다. 하나님은 모든 것이 가능합니다. 어떤 수단이든 고칠 수 있습니다. 왜 진흙인가, 왜 침인가, 왜 샘인지, 여기에는 의미가 없다. 이것들을 써서 고치시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샘의 물도 아니다. 침이나 진흙이 약이 되는 것은 아니다. 이것은, 예수님께서 말씀하셨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말이기 때문에 그렇게 된 것이다. 그러므로 이 말을 따른 사람에게 기적이 일어나고, 그리고 하나님의 영광이 나타나고, 그리고 치유가 일어난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은 하나님이 하신 계명을 지키며, 낮이 계속되는 동안에 일을 하지 않으면 안된다. 기적이 일어나는 방법이 중요하지 않고, 예수님이 중요합니다. 예수님만이 그것을 할 수 있는 분. 예수님이 메시아로 오신 분이라고 여기서 설명하고 있다. 아무런 방법과 어떤 기적은 관계가 없습니다. 더구나 여기만입니다, 『나면서부터 소경』이란 단어는. 이 9장에 이 단어는 몇번 나온다. 그 후, 유대인들이 재판할 때, 「이 사람은 나면서부터 보지 못했던가? 혹은 도중에서 못 보게 된 것인가? 」 몇번도 물어보고, 부모까지 불러 이 사람이 당신의 아들 맞습니까? 나면서부터 보지 못했는가, 말해보라고 했다. 이 복음서만입니다. 나면서부터 소경. 이라고 쓴 것이. 그것은 요한이 의식하고 그렇게 쓰고 있다. 구약 성경에서, 위대한 어떤 예언자도 소경의 눈이 나았던 적이 없다. 그리고, 구약시대는 소경은 죄인의 상징이었다. 죄인은 하나님을 보지 못하며 하나님의 말씀을 모른다. 자기 죄를 모르며 아무것도 못보며 전혀 깨달을 수 없는 것을 소경에 비유해서 이야기하고 있다. 여기서 나면서부터 소경을 강조하고 있는 것은, 나면서부터 죄인. 나면서부터 사탄의 자식. 이것을 강조하고 있다. 그리고 인간은 모두 그러한 존재라는 것이다. 그리고 구약시대는 누구 한 사람, 소경의 눈이 나은 일이 없다. 소경의 눈을 뜨게 하시는 분은 도대체 누구냐, 하는 예언이 있다.

이사야42장 6-9∼ 「여호와의 말씀이다. 나 여호와가 의로운 일을 하려고 너를 불렀다. 내가 네 손을 붙들고 너를 지켜 주겠다. 너는 내가 백성과 맺은 언약의 표적이 되고, 민족들을 비추는 빛이 될 것이다. 네가 보지 못하는 사람의 눈을 뜨게 할 것이며, 갇힌 사람을 갇힌 데서 풀어 주고, 어둠 속에 사는 사람을 감옥에서 이끌어 낼 것이다. 나는 여호와다. 이것이 내 이름이다. 나는 내 영광을 다른 것에게 주지 않겠고, 내가 받을 찬양을 우상들이 받게 하지 않겠다. 내가 전에 말한 일들이 다 이루어졌다. 이제 내가 너희에게 새로운 일들을 말한다. 그 일들이 일어나기 전에 내가 너희에게 알려준다. 」 ∼

보지 못하는 사람의 눈을 뜨게 할 수있는 것은, 하나님이며, 아버지가 보내신 자, 나 여호와, 하늘에서 내려오신 분, 스스로 있는 자가 보지 못하는 사람의 눈을 뜨게 한다. 하는 예언이 구약 성경에는 많이 나온다. 그러므로, 어떤 예언자도 소경의 눈이 나았다는 일은 들은 적이 없다. 그리고 지금 예수님이 나면서부터 소경의 눈을 굳이 열린 것입니다. 왜냐하면 여기의 소경은, 실제의 육체 눈이 보이지 않는 상태가 아니라, 이스라엘에 있어서도, 누구에 있어서도 죄인을 말하며, 죄의 상징이다. 하나님을 모르는, 둔하고 비열한 마음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 비열해서 죄가 많은, 하나님을 보지 못하는, 마치 이방인과 같은, 짐승과 같은, 개 같은 그런 사람의 눈을 열 수 있는 것은 하나님밖에 없다. 하늘에서 오신 인자밖에 없다. 여호와밖에 없다. 구세주밖에 없다. 그리스도밖에 없다. 메시아밖에 없다. 이것을 강조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보냄을 받은 자』 란 의미의 실로암 샘에서 씻어라, 하셨다. 【실로암】은 (보냄을 받았다. 하는 뜻이다) 여기에 ( )가 붙어 있다. 다른 샘에서도 예수님께서 병을 고치셨다. 그러나 이 【실로암】의 샘은 요한이 (보냄을 받은 자) 라고 설명합니다. 【실로암】의 샘에서 씻어라, 하신 이유이다. 소경의 눈이 나은적이 과거에 한 번도 없었다. 그리고 구약시대 예언자들은, 이 소경의 눈을 뜨게할 수 있는 것은 하나님밖에 없다고 선언했다. 그리고 보냄을 받은 자는 【메시아】밖에 없다. 그 【메시아】가 왔을 때에 보이지 못하는 사람의 눈은 열린다. 라고 선지자는 말한다. 그리고, 【실로암】에 가고, 너희 눈을 씻어라. 이것은, 이 보냄을 받은 자만이 소경의 눈을 뜰 수 있다, 하는 강조입니다. 이 【실로암】의 샘에서 소경이 눈을 씻는 이야기는, 후에 기독교에 대한 구박이 심해질 때, 지하에 도망간 사람들이, 지하에서 예배할 때, 이 【실로암】의 샘에서 소경이 눈을 씻는 그림이 그려져 있었다. 그러나 그림을 그려진 근거는, 세례식이다. 그러므로 세례식의 뜻으로 그림이 그려져 있는 것입니다. 【실로암】의 샘에서 나면서부터 보지못하는 사람의 눈이 뜨게 된 그 순간은 세례식이란 인식을, 성도들은 가지고 있었다. 그리고 여기를 신학자들이 해석할 때에는, 소경이라 하는 것은 육체적인 맹인이 아니라 죄인을 말한다. 그리고 그 죄인은 전인류이다 . 그리고 그 죄인을 예수그리스도의 세례로 깨끗함을 얻는다. 이것은 세례식의 강조인 것이다, 해석하고 있는 대로입니다. 그러므로, 보냄을 받은 자, 란 뜻을 ( ) 로 설명하고 있다. 보내심을 받으신 예수그리스도, 하늘의 아버지 독생자, 유일한 분. 그 하나님으로부터 오신 메시아. 그리고 세상의 빛. 이분이야말로 어둠에서 빛으로, 보지 못하는 사람이 보게 되며, 깨닫지 못하며 하나님을 보지 못하는 죄인이, 믿음으로 하나님을 보게 할 수 있는 분은, 오로지 예수그리스도만이다. 이 세례를 강조하기 위하여 【실로암】의 샘에서 소경의 눈을 뜨게 하는 것이었다. 그러므로 요한은 여기서 강조한다. 예수그리스도만이 죄인을 구속할 수 있고, 예수그리스도만이 눈을 뜨게 할 수 있고, 예수그리스도만이 세상의 빛이다. 어둠을 비출 수 있는 것은, 이분밖에 안계신다. 이 【실로암】의 샘의 비유는, 예수밖에 없다. 예수그리스도야말로 구세주. 이것을 강조하고 있는 것입니다.

소경의 눈이 나아서 오니, 주변이 허둥지둥 합니다. 이것은 누구냐? 전에 구걸하던 사람인가, 이전 소경이었던 사람인가? 이라고 하는 소문이 퍼지고, 누가 했나, 그 사람은 어디에 있나? 도대체 이름은 뭐냐? 하는 것이 그후 강조되어 가는 것이다. 그래서 여기서 눈이 열린 순간 누구를 보게 되었는가 하면 예수그리스도가 보인 것이다. 요한은 이것을 강조하고 싶다. 보이게 되었다. 예수가 보이게 된다. 이것을 강조하고 싶습니다. 이 소경의 눈을 열 수 있는 것은, 그리고 이 예수님의, 나를 보내신 분의 일이 나타나는 영광, 그 능력에 의해, 보지 못하는 사람이 보게 된다. 도대체 그 분은 누구인가? 그것은 예수그리스도. 그것을 들은 사람들이 조금씩 늘어나 소문은 퍼져, 이런 기적은 선지자도 할 수 없었던 일이며, 들은 적도 없다. 도대체 누가 이런 기적을 할 수 있을가? 그것은 아버지가 보내신, 이 세상의 유일한 빛, 그것이 예수그리스도이었다, 하고 요한은 강조하고 있다. 예수그리스도야말로, 빛이다 하는 것을, 여기서 강조하기 위해 「나는 세상의 빛이다. 」고 예수님 스스로 말씀하시고, 그리고 나면서부터 소경으로 된 것은 하나님의 영광 때문이며, 하나님의 일을 성취하기 위해서 이 사람이 소경이었다고 말하며, 죄인을 구원하시는 분은 예수그리스도밖에 없다. 그러니까 예수의 빛이 있는 동안에 일하라. 또 반드시 어둠이 온다고 하는 것을 여기서 강조하고 있습니다. 영원히 빛이 있는 것은 아니고, 계속 예수그리스도가 기다려 주는 것은 아니다. 그리고 이 불행이 미래로 변하고, 유익으로 변하는 것은, 예수를 마음속으로부터 사랑한 사람만이다. 예수의 일을 마음 다하여 순종 한 사람만이다. 그 사람만이 불행이 하나님의 영광으로 변하는 것입니다. 『누구나』가 아닙니다. 모든 사람의 눈이 열리게 되는 것은 아니고, 아무나 어떤 불행도 선을 이루시는 것은 아니다. 빛이 있는 동안입니다. 밤이 오기 전. 하나님의 일을 믿은 사람만. 하나님을 따른 사람만. 하나님을 사랑한 사람만, 이 불행이 행복으로 변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이 세례가, 예수님이 우리를 위해 죽고 부활하신 것을 믿고, 낡은 것이 죽고, 새로워지지 않으면, 아무도 예수를 볼 수는 없다. 아무도, 물과 성령에 의해 새롭게 다시 태어나지 않은 사람은, 예수그리스도가 하나님이신 것을 모릅니다. 영적인 소경이다. 나면서부터 죄인인 것이다. 이것은, 정말로 하나님을 믿는 사람. 그리고 하나님의 일 하심은 우리가 살아 있는 동안의 이야기만이 아니라, 미래, 다음 시대. 혹은 다른 나라, 혹은 다른 완전히 모르는 남일지도 모른다. 그러므로, 이 하나님의 영광은 역사상에 존재하고, 하나님의 창조 섭리 안에서 존재한다. 이 일은 하나님께서 하실 수있습니다. 그리고 죄인의 눈을 뜨게 할 수있는 것은, 예수그리스도밖에 없다. 보냄을 받은 자, 하나님으로부터 오신, 주님만이다. 여기를 강조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들이 멋대로 기도하고, 자기 생각대로 예수그리스도를 만들어 내는 것은, 큰 잘못인 것이다. 하나님은 이 역사안에 섭리안에서 일하십니다. 하나님의 진리 속에서 일하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도리나 원리 안에서 일하십니다. 하나님은 율법 사상을 기준으로 일하고 있는 것입니다. 성경의 말씀 안에서 일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신앙이 없으면 예수께서 하시는 일을 알 수 없습니다. 신앙의 눈으로 보지 않으면 모릅니다. 죄인의 눈으로, 불평불만과 분노와 질투, 자신의 성공, 자신의 평가, 자신의 무슨 행복에 집착하고, 망상하고 있는 사람에게는, 예수님의 참된 은혜나 사랑을 알 리가 없습니다. 역사상에서, 전세계를 보면서 혹은 자손의 대가 가서 이해가 된다. 그러므로, 믿음으로 구원을 받은 은혜입니다. 보이는 것에 인해서가 아니라 믿어서 구원된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가 들은 복음입니다. 진리입니다. 믿음 없이는, 아무도 주님을 구세주로 고백할 수 없습니다. 『믿어서 의롭다 하심을 받을 수가 있다』. 이것은 기독교 교리, 진리입니다. 그리고 일어나는 불행은, 미래를 위해서, 하나님의 영광 위해서 유익으로 되는 것이며, 우리가 죄를 범하고, 자신의 실패나 미스로 뿌린 씨앗에 의한 불행은, 하나님이 무엇이든지 해주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에게 하나님의 영광이 나타납니다.

우리가 깨져서, 죄를 회개한 사람의 눈이 보이게 되는 것입니다. 정말로 자기 죄를 고민하고, 후회해서 슬퍼하고, 가난해진 사람이 예수그리스도가 보이게 되는 것입니다. 그 사람이 하나님 나라를 상속받는 것입니다. 천국은 보지 못한 사람이, 그러한 소경이었던 사람들이, 보이게 되어서 들어가 가는 곳입니다.

나는 소경이 아니고, 보이는 사람이며, 죄를 범하지 않으며, 열심히 살아 나쁜 일은 하지 않고 남을 아프게 한 적은 없다, 좋은 일을 해 왔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오히려 소경인 것입니다. 소경은 천국으로 못 간다. 예수를 모르기 때문이다. 평생 불평불만 하고 타락한 그대로 있는다. 「저는 약하기 때문에」「제 환경이 이랬기 때문에」 「처음부터 크리스천이 아니었기 때문에」 「가르치는 사람이 없었기 때문에」 모든 인간은 비겁합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은혜를 모른다. 이것을 오늘 우리가 이해하지 않으면 안됩니다. 배우지 않으면 안된다. 그리고 이것을 아멘이라고 받아들이지 않으면 안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거기에서 아직 거절한다면, 이제 두 번 다시 회복할 수 없는 밤이 오는 것입니다. 이것이 오늘 테마입니다. 밤이 이르기 전에 회개하고, 주님께 영광을 돌려야 합니다. 그리고, 이것이 죄인의 눈이 보이게 된 진실의 행복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