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Yokohama Glory Church

요한복음 8장21-30절

2018.02.14 15:35

~ 다시 이르시되 "내가 가리니 너희가 나를 찾다가 너희 죄 가운데서 죽겠고 내가 가는 곳에는 너희가 오지 못하리라." 유대인들이 이르되 "그가 말하기를 내가 가는 곳에는 너희가 오지 못하리라 하니 그가 자결하려는가?" 예수께서 이르시되 "너희는 아래에서 났고 나는 위에서 났으며 너희는 이 세상에 속하였고 나는 이 세상에 속하지 아니하였느니라.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말하기를 너희가 너희 죄 가운데서 죽으리라 하였노라. 너희가 만일 내가 그인 줄 믿지 아니하면 너희 죄 가운데서 죽으리라." 그들이 말하되 "네가 누구냐?"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는 처음부터 너희에게 말하여 온 자니라. 내가 너희에게 대하여 말하고 판단할 것이 많으나 나를 보내신 이가 참 되시매 내가 그에게 들은 그것을 세상에 말하노라." 하시되 그들은 아버지를 가르켜 말씀하신 줄을 깨닫지 못하더라. 이에 예수께서 이르시되 "너희가 인자를 든 후에 내가 그인 줄을 알고 또 내가 스스로 아무 것도 하지 아니하고 오직 아버지께서 가르치신 대로 이런 것을 말하는 줄로 알리라. 나를 보내신 이가 나와 함께 하시도다. 나는 항상 그가 기뻐하시는 일을 행하므로 나를 혼자 두지 아니하셨느니라." 이 말씀을 하시매 많은 사람이 믿더라. ~

21절에 "내가 가리니" 라고 예수님이 이 메시지를 하고 있는 것은 초막절의 축제가 끝났을 때입니다. 예수님은 초막절의 축제 때에, 언제나 같은 이 타이밍으로 메시지를 하고 있습니다. 처음에 기우의 축제 때 "누구든지 목마르거든 내게로 와서 마셔라." 라고 초막절의 축제 한창일때에 말씀하시고 그 후에 밤에는 빛을 켜고 불의 기둥으로 이끈 이스라엘의 백성을 애굽에서 데리고 나가시고 광야에서 인도할 때의 "내가 불의 기둥이었다" 라고 하는것을 나타내기 위해서 초막절의 축제가 끝났을 때에 "내가 세상에 있는 동안 나는 세상의 빛이다" 라고 말씀하실때는 이제 모두가 돌아갈 때입니다. 초막절의 축제가 완전히 끝났으므로 드디어 모두가 이제 자신의 고향에 돌아가려고 하고 있을때에, 이번에는 그것에 맞추어 예수님께서는 다시 사람들에게 일어서서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나는 떠날 것이다. 너희가 나를 찾겠지만 너희는 너희 죄 가운데서 죽을 것이다. 너희는 내가 가는 곳에 올 수 없다." 라고 마지막으로 섬뜩한 말씀을 예수님은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계속해서 이 초막절 축제에 맞추고 예수님은 메시지를 되풀이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말씀하고 계시는 "나는 이제 떠나 간다. 그러나 당신들은 나를 모른다." 라고 21절에 말하고 있지만 28절에는,

"그러므로 예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너희는 인자가 높이 들려 올려질 때에야 내가 곧 나 라는 것과 또 내가 아무것도 내 마음대로 하지 아니하고 아버지께서 나에게 가르쳐 주신 대로 말한다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여기에서는 당신들은 지금은 모르지만, 내가 십자가에 달려 죽음에서 부활하면 당신들은 내가 누구인지를 알게 된다. 이렇게 28절에서는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 "알게 될것이다" 라고 하는것을 어떤 사람은 이렇게 말 합니다. "십자가에 달리셔서 부활하신 예수를 보면 회개할수 있게 된다" 라고 해석하는 사람도 있지만 존 칼빈(John Calvin)은 이렇게 말하지 않습니다. "그 때에는 후회하게 될것이다" 라고 해석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나도 이 말을 지지합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은 "너희들은 죄 가운데서 죽을 것이다" 라고 21절에서는 말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28절에 "알게 된다" 라고 말하는 것을 "회개할수 있게 된다" 라고 말하면 맞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여기에서 예수님이 "알게 될 것이다" 라고 말하는 것은 당신들은 이를 갈고 후회하게 된다. 왜냐하면? 문이 닫힐수 있기 때문이라는 것과 같은 뉘앙스로 마지막 메시지를 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후회"는 칼빈(Calvin)은 유다와 같은 후회 라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가롯 유다는 예수님을 배신한 후, 회개한 것이 아니고 후회한 것입니다. 왜? 회개했다면 그도 예수그리스도의 십자가의 피로 천국에 갈 수 있는것입니다. 그러나 베드로가 말하기를 "그는 그가 떨어지는 곳에 떨어져 갔다" 라고 말하고 있는 것처럼 유다는 후회해서 자살했지만 회개는 않했습니다. 라는 설명입니다. 그것은 여기에서 유대인들을 보고 예수님이 말씀하시는 것은 "너희들은 결코 천국에 들어갈 수는 없다. 죄안에서 죽을 것이다." 왜? 회개하지 않았기 때문 입니다. 당신들은 후회는 했지만 회개는 하지 않았다. 라고 예수님은 축제가 끝나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이 회개와 후회는 완전히 다릅니다. 후회는 예를 들면 자신의 인생이 끝날 때, 혹은 실패하고 혹은 불행해져서, 혹은 좋지 않은 사건들이 일어나고, 혹은 가족이 죽었던지 여러가지 일들이 있으면 사람들은 후회합니다. 그리고 사람들은 이렇게 말 하는 것입니다. "그 때 회개한 것이 틀림없다" 이렇게 인간은 "언젠가 할것이다" 라고 말합니다. 더 견디기 힘든 경우까지 떨어지면 생활이 괴롭고 먹을수 없게 되면, 일이 없어지면 예수님이 계신 곳에 가는 것이 틀림없다. 회개한 것이 틀림없다. 그 때는 후회했기 때문이라고 하는 인간측의 해석을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때, 하면 좋을 것이 아닌가 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여기에서 그런 쉬운것을 말씀하시지 않습니다. "당신들은 반드시 죄 안에 죽을 것이다. 그리고 내가 누구인가 안 그 순간에 후회할 것이다." 무슨 말씀입니까? 후회와 회개가 이렇게 다른 천지 차이가 난다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을 예수님이 요한계시록에도 교회에게 경고를 주고 있습니다.

요한계시록 3장 14-16절

"라오디게아 교회의 지도자에게 이렇게 써 보내어라. '아멘이신 분이시요, 신실하시고, 참된 증인이시며,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모든것을 다스리시는 분의 말씀이다. 나는 네 행위를 알고 있다. 네가 차지도 않고, 뜨겁지도 않다. 네가 차든지 뜨겁든지 하기를 원하노라. 네가 이렇게 미지근하여, 뜨겁지도 않고 차지도 않으니, 나는 너를 내 입에서 뱉어 버리겠다."

이 미지근한 크리스천을 존 칼빈(Calvin)은 무감각한 사람이라고 부르고 있는 것입니다. 이 무감각적인 사람은 예수님은 "반드시 뱉어 버리겠다" 라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지금의 우리에게 대한 경고이기도 합니다. 로이드 존스는 이 성경은 크리스천이 아닌 사람에게 씌어져 있지 않다. 이것은 모두 기독교인에게 말씀하고 있고 기독교인에게 대한 경고이고 기독교인에게 주는 은혜이다 라고 동시에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요한의 복음서에서도 요한계시록에서도 말씀하고 있는것은 교회에 있는 크리스천을 말하고 있는것입니다. 그러므로 크리스천을 향해 미지근한 무감각한 사람은 나는 쫓아 버린다. 라고 분명히 예수님이 말씀하시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요한계시록 3장19-20절

"나는 내가 사랑하는 사람은 누구든지 책망도 하고 징계도 한다. 그러므로 너는 열심을 내어 노력하고, 회개하여라. 보아라, 내가 문 밖에 서서, 문을 두드리고 있다. 누구든지 내 음성을 듣고 문을 열면, 나는 그에게로 들어가서 그와 함께 먹고, 그는 나와 함께 먹을 것이다."

여기에서 말하고 있는 것은 미지근한 무감각한 크리스찬은 예수님과의 사이에 벽하나가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과 함께는 있지 않습니다. 여기에서 미지근한 크리스찬은 쫓아 버려진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님과의 벽이 존재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은 지금도 문을 두드리고 열심히 회개하라고 기회를 주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크리스찬을 향하여 "이제 다시는 죄를 짓지 마라. 열심을 내어 회개하라 하시고 내 안에 거하라 나도 너희 안에 거하리라 하시고 포도의 나무에 붙어 있으라." 라고 예수님은 충고를 계속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나 인간은 그 때에 마지못해서 내일은 꼭 회개할 거야, 혹은 인생이 곤경에 처하게 되지 않으면 회개할수 없다, 혹은 인생의 끝에 하는 것이다. 그 때에 하는 것이 틀림 없다. 라고 합니다. 그 때에는 회개하는 것은 아닙니다. 울면서 후회하는 것 뿐입니다.

왜냐하면 회개한다는 말을 잘 생각하지 않으면 안됩니다. "회개한다" 는것은 실패했다, ~해버렸다 라는 후회가 아니고 죄와 관계되는 것입니다. 회개한다는 것은 죄로부터의 허락한다는 차원입니다. 그 죄로 부터의 허락한다는 것은 이 죄 가 문제가 있는 것입니다. 이 죄가 도대체 무엇인가 하는 것에 관해서 이 후회와 회개의 차원이 바뀌어버리는 것입니다. 왜? 이 죄는 기본적으로 살인을 했다, 간음을 했다는것이 아니고 행동적인것을 말하는것이 아닙니다. 이 죄은 무엇을 했고, 꺼림칙한 일을 하거나, 마음으로 무엇인가 일어나 버린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죄는 원래 "빗나감" 이라고 하는 의미가 있는 것입니다. 빗나가다, 표적에 빠지고 있다 입니다. 기독교가 말하는 죄는 이 세상의 죄와는 다른 것입니다. 하나님과의 관계가 트러블이 생긴 것입니다. 우리들의 초점은 모두 하나님에게 있는 것입니다. 그 초점에서 벗어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과의 관계가 문제가 생기고 있고 하나님의 명령, 성경 말씀으로부터 떨어지고 있다. 라고 하는 것이 죄의 차원입니다. 아담과 화와가 정원으로부터 쫓겨난 이유는 무엇이었는가? 죄였습니다. 그러나 이 죄는 간음한것도 아니고 훔친 것도 아니고 위증한 것도 아닌, 그들은 "해서는 안된다" 라는 것을 해버렸습니다. 하나님과의 관계가 트러블이 있으며 하나님의명령, 성경 말씀에 대한 불순종입니다. 이것은 뭔가 죄짓고 실패하고 인생으로 후회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이 죄는 예수님측에서 초대하고 있을 때에, 허락되지 않으면 됩니다. 예수님이 회개하라 말씀하시고, 예수님이 명령해서 부르시고 있는 사이에, 죄가 허락되지 않으면 문이 닫칠수 있다는 것입니다. 회개는 하나님의 은혜와 부르심 없이는 할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부르실때 할 수 밖에 없습니다. 그러므로 "내일이 있을 것이다" 라고 해서 울면서 아우성치는 것은 후회이지 회개가 아닙니다. 왜? 회개는 인간측의 차원에서 하는 것은 아닙니다. 인간측의 사정으로 하는 것은 아닙니다. 인간측이 괴롭기 때문에 하는 것이 아니고 슬프기 때문에 울기 위해서 하는 것이 아닙니다. 회개는 하나님의 초대 이외에 없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부르실때에, 열심히 회개하라고 명령하실 때에 하지 않으면 내일은 무리합니다.

이것이 지금 예수님이 말씀하시는 "당신들은 반드시 죄로 죽을 것이다. 당신들이 내가 누군인지 알았을 때에, 반드시 후회할 것이다." 라고 하는 메시지가 지금, 이 교회에 경고하고 있는 메시지와 똑같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이 "내가 십자가에 달리게 되었을 때, 당신들은 알게 된다" 라고 말씀하실 때도 "나는" 이라고 할 때 "에고 에이미"를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요한복음서는 에고 에이미 라는 단어를 몇번이나 사용하고 계십니다. 에고이스트(egoist)적으로 하나님이 일방적으로 똑같게 이야기 하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만이 그 때를 알고 있고 하나님만이 이 기회를 줄수 있고, 하나님이 부르시고 계실때만 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나를 알게 된다. 내가 아버지와 함께 있기 때문이다" 라고 말하고 있는 것은 아버지와 함께, 이 함께 있는 몸 이라고 예수님은 유대인에게 말씀 하십니다, 당신들이 그렇게 존경하는 모세는, 내가 만나를 내려 먹이였고, 내가 마시게 한 것이며, 내가 광야에서 40년을 돌보왔다. 나는 모세와 같은 한 명의 예언자가 아니고 당신들이 동경하고, 존경하고, 계속해서 예배한, 저 전능한 하나님 바로 그 분이시다. 나 가운데 아버지가 있고 아버지 속에 내가 있다고 말하는 것이, 전능한 하나님이 지금 여기에 있다 라고 말하는 에고 에이미를 설명하고 있는 것입니다. 나는 아버지와 함께 있다. 내가 당신들이 예배해 온 그 자체이다.

그러므로 모세가 당신의 이름은 무엇입니까? 라고 물었을 때, 대답할수 있었던 것이 바로 "나" 입니다. "여호와"(Jahveh)입니다. 나는 여호와(Jahveh)라고 지금 설명하고 있는 것입니다. 스스로 존재하고 있는 자, 그리고 하늘에서 내려 오신 분, 이 백성을 구원하시는 분 이라고 하는 의미로 "내가 누구인지 알았을 때" 라고 할 때의 "나" 는 압도적인 전능하시는 분의 입장에서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한 명의 예언자로서의 이야기가 아닙니다. 그러니까 당신들이 그것을 알았차렸을 때에는 당신들은 후회할 것이다. 왜? 당신들은 메시야를 기다리고 있다고 말하면서 실제로 온 이 메시야를 죽이려고 하였기 때문에. 실제로 당신들은 메시야가 오면 이스라엘은 구제된다고 말하면서 지금 이 메시야를 십자가에 달아 죽이려고 하고 있기 때문이다. 라고 말씀을 하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이 이렇게 말씀했을 때, 유대인들도 이렇게 말 합니다. "그가 '너희는 내가 가는 곳에 올수 없다' 라고 말한 것으로 보아 혹시 자살을 하려고 하는 것인가?" 라고 판단밖에 할 수 없습니다. 그것은 또 잘못된 오해를 예수님에게 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이전에도 그랬습니다. 예수님이 "내가 하늘에서 내려 온 것이다" 라고 말씀했을 때 "하늘에서 내려 온 살리는 떡" 이라고 말씀했을 때, 이 사람의 가르침은 지독한 가르침이다. 이제부터 어디에 갈지 모르지만 꼭 유대인속에서는, 바리새인이나 율법학자, 율법을 아는 유대인, 택함을 받은 선민, 예루살렘의 성벽 안에 사는 그 선민들 가운데에서 선교를 할 수 없었던 것이기 때문에, 이민자들, 흩터진 그리이스인 속에 있는 유대인에게, 혹은 그리이스인이나 이국인 속에서, 선교를 시작한 것이 틀림 없다. 왜냐하면 유대인은 이제 그를 받아들이지 않기 때문에. 그의 선교는 이방인이 있는 곳에 갈수 밖에 없을것이다. 라고 소문이 난 것입니다, 이 사람들은 그러니까 공교롭게도, 예수님께서 승천하신 후, 바울은 이방나라쪽으로 그리이스인 안(속)에 가버린 것입니다. 그리고 이 요한복음서 자체도, 에베소로 씌어져 있는 것입니다. 그리이스인 안(속)에서 씌어져 있는 것입니다. 라고 말하는 것은, 그들은 지금 자신들이 어리석게도 말해버린, 그 말이 그 대로 되어버린다 라고 하는, 어리석은 대화를 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들은 지금, 그가 자살을 하려고 하는 것인가? 라고 말하는 것 처럼 보이게, 비웃고 있는 것입니다. 왜? 유대인들에 있어서 자살은 살인보다 무거운 죄였기 때문입니다. 모세의 십계 율법 안에서, "죽여서는 안된다." 그러므로 피를 흘린 사람은 피의 보복을 받는다. 목숨은 목숨으로 구입하지 않으면 안된다. 라고 하는 율법 안 에서도 자살은 가장 비열한 행위이며 살인보다도 가장 낮은 어둠에 떨어지는 죄 라고 하는 이해를 하고 있었으므로, 예수님이 만약 자살을 한다고 하면, 정말로 어둠속의 어두움, 지옥속 지옥에 떨어질 것이다. 라고 지금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그렇게 예수님을 비웃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 후에, 뭐라고 말씀한다고 생각하십니까? "나는 나의 목숨을, 나 에게서 버렸다" 라는 말씀을 지금 하신다. 자살이라고 하는 단어는 사용할수 없지만, 예수님은 자신의 목숨을 자신에서 버리고 있다고 설명합니다. 또 그들은 모르고 스스로 말하고 있는 것이, 뒤에 현실이 되어버리는 것입니다. 그리고, 결코 당신들은 여기에는 들어갈 수 없다라고 말해져버리는 것입니다.

이렇게 해서, 말씀을 인용하면 할수록, 율법을 인용하면 할수록, 예수님에게 재판받는 것입니다. 그 말씀들이 그들을 재판한다고 합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나를 알게 될 때에는, 내가 아버지와 함께 있는 것을 알게 될것이다." 라는 마지막 말씀을 남기시는 것입니다. 바울이 말한, 영광에서 영광으로 우리들도 바꿀수 있다는 의미는 예수그리스도의 성질에 닮아 가지 않으면 안된다, 라는 것입니다. 예수그리스도와 같이 살지 않는다면, 아버지와 함께 산다고 하는 것이 익숙해지지 않습니다. 예수님이 아버지와 함께 있다고 말하는 것은, 아버지가 이야기하고 싶은 것을 이야기하고 아버지가 말씀하신대로 행동하고 아버지가 말씀하셨기 때문에 십자가에 달리시고, 아버지의 명령이였기 때문에 죽음까지 순종하고 아버지의 힘으로 부활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이 아버지에게 절대복종을 하신것 처럼, 예수님이 그렇게 하신것 처럼, 이번에는 우리들도 예수님에게 절대복종을 해야 합니다. 그것이 예수님을 닮아 가는 것입니다. 우리들의 인생이 유대인의 양이 아니고 이 형식주의자들 처럼 하지 않고, 예수님 같이 순종하지 않으면 안됩니다. 예수님과 같은 성질, 성격, 품성을 가지지 않으면 안된다. 그렇다면 내가 누구인지, 십자가에 달려 죽고 삼일 후에 부활했을 때에, 당신들은 나를 알게될 것입니다. 그러나 그 때 후회하고 울어도 결코 당신들은 구원되지 않습니다 라고 경고를 받는 것입니다.

우리들은 다음 주는 고난주이고, 그 다음은 부활절 입니다. 이 경고를 받지 않으면 안됩니다. 나중에 얼마 지나서 회개할 것이다. 좀더 하면 인생이 더 엄격하게, 더 대지진 재해에서도 일어나고 모두가 주변이 죽어가면, 꼭 회개할 것이다. 그 때는 확실히 회개할 것입니다. 에서는 그렇게 한 것입니다. 에서는 배가 고프다고 장남의 권리를 야곱 쌍둥이 동생에게 팥죽 한 그릇으로 팔아버렸습니다. 그리고 후에 아버지에게서 축복을 한번 더 받으려고 울고 회개한 것입니다. 그러나 아버지는 "결코 너에게 축복은 없다" 라고 말을 듣는 것입니다. 울면서 회개하는 것은, 인간측의 사정이 아닙니다. 확실히 인간은, 후회해며 울면서 회개합니다. 인생의 끝에, 혹은 엄격한 시대, 혹은 그러한 엄격한 것이 일어났을 때, 그러나 언제든지 예수님에게 받아들여진다고 생각하면 큰 잘못입니다. 회개는 구원과 같이 예수님이 부르고 있을 때입니다. 이 때에 회개하지 않으면 우리들도 얼마 지나서 예수님은 떠나 간다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복음도 얼마 지나서, 사라져 가는 것입니다. 그 잠시 동안이라고 하는 시간은 언제인지는 모르지만 우리들에게 은혜와 유예가 주어져 있는 시간에 하지 않으면 안됩니다. 그 것은 전도도 마찬가지 입니다. 우리들이 이웃 사람에게 복음을 전하는 것도 내일 하면 좋다. 혹은 그 사람의 장례식의 앞에서 하면 좋다. 혹은 그가 병이 났을 때 전도하려고 하면 이젠 늦습니다. 예수님이 지금 전도하라고 말씀하시면 지금 하는 것입니다. 지금 그들에게 예수를 전하라고 말하면, 내일로 미루면 안됩니다. 그들의 내일 목숨을 누가 보증합니까? 내일의 목숨은 예수님이 쥐고 있는 것입니다. 내 생명, 이웃사람의 생명도 예수님이 쥐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오늘 따르라고 하면 오늘 따르지 않으면 안됩니다. 그리고 오늘 전도하라고 말씀하시면 오늘 하는 것입니다. 내일의 목숨은 아무도 자랑할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오늘 하루의 노고로 충분합니다. 여러분들은 오늘 내 명령에 "예" 아니면 "아니요" 이 것만 대답하면 됩니다. 뜨겁든지 차겁든지, 그 어느 쪽에 있습니까? 그 중간에 있다면 예수님은 내 쫓아 버리신다고 이것을 지금 예수님이 경고하시는 것입니다. 누구에게 경고 하십니까? 우리 크리스찬에게 입니다.

저는 이것이 물론, 처음 믿는 신앙자에게는 엄격하다고 생각합니다. 아직 믿음이 약하고 성경을 모르는 사람에게는 예수님은 이러한 것을 엄격하게 요구할 것인지 아닌지는 잘 모릅니다. 그러나 우리 교회는 적어도, 어제오늘 구원받은 갓난아기의 크리스찬이 아닙니다. 우리들의 가족은 논 크리스찬이며, 우리들의 친구는 예수를 모른다. 우리들이 아는 사람들은 이제 점점 나이가 들어가는 것입니다. 그리고 미야기(宮城)에서 일어난 지진이, 언제 여기저기에서 일어날지도 모릅니다. 그러한 때에, 우리들이 전도는 내일 할 것입니다. 모레 하겠습니다. 좀 더 내가 훈련받고, 좀 더 성숙된 크리스찬이 되면 하겠습니다 이면 늦습니다. 예수님의 문을 닫으신 순간에, 이제 우리들에게는 내일은 없습니다. 오늘이라고 하는 날은, 단 하루 만입니다. 오늘 기도는, 오늘 하지 않으면 안된다. 그리고 오늘 미지근하다면, 내일도 바뀌지 않습니다. 이것이 요한복음서에서 몇번이나 말하는 경고입니다.

지금 우리들은 이 요한복음 8장을 계속 배우고, 이제 다 알고 있습니다. 유대인이 얼마나 거역하고 둔한가? 예수님이 몇번이나 말씀하셔도 그들은 모릅니다. "얼마나 지독한 가르침인가" 라고 거역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지금 우리들의 모습입니다. 말씀에 반항하고 말 들은것이 자기감정에 어울리지 않으면 만지작 거릴수 있고, 화내고, 반발하는 이 모습이, 지금 우리들의 모습입니다. 그리고 내일 하면 좋다, 라는 비겁한 이 사고방식도 지금 우리들이 주님앞에서 하고 있는 태도입니다. 저는 적어도 이 교회에서는 그런 갓난아기의 크리스찬으로서는 있고 싶지 않습니다. 싫습니다. 저는 이런 갓난아기의 크리스찬으로 울고, 히스테리 내고 자신의 인생이 괴롭다고 해서 예수님앞에서 이런 태도밖에 못하는, 저는 그러한 교회에서 있고 싶지 않습니다. 여러분은 어떻게 생각합니까? 그런 갓난아기의 크리스찬으로서, 전도도 할수 없고 조금 괴롭다고 울고 있을수 밖에 없다고 말하는 갓난아기로 있고 싶습니까?

우리들은 다음 주 부활절를 맞이합니다. 저는 역시 단단한 음식물을 먹을수 있는, 언제까지나 달콤한 밀크(우유)밖에 마실수 없는 교회가 아니라 정말로 예수님의 부활을 기뻐하고 감사하고 그리고 이 기쁨을 논크리스찬에도 그 다음 세대들에게도 흘릴 수 있는 어른의 크리스찬이 되도록 기도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