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한복음 8장12-20절
~예수께서 다시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나는 세상의 빛이다. 나를 따르는 사람은 어둠 속에 다니지 아니하고, 생명의 빛을 얻을 것이다." 바리새파 사람들이 예수께 말하였다. "당신이 스스로 자신에 대하여 증언하니, 당신의 증언은 참되지 못하오." 예수께서 그들에게 대답하셨다. "비록 내가 나 자신에 대하여 증언할지라도, 내 증언은 참되다. 나는 내가 어디에서 와서 어디로 가는지를 알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너희는 내가 어디에서 왔는지도 모르고 어디로 가는지도 모른다. 너희는 사람이 정한 기준을 따라 심판한다. 나는 아무도 심판하지 않는다.
그러나 내가 심판하면 내 심판은 참되다. 그것은 내가 혼자 있는 것이 아니라 나를 보내신 아버지께서 나와 함께 하시기 때문이다. 너희의 율법에도 기록하기를 두 사람이 증언하면 참되다' 하였다. 내가 나 자신에 대하여 증언하는 사람이고 나를 보내신 아버지께서도 나에 대하여 증언하여 주신다." 그러자 그들은 예수께 물었다. " 당신의 아버지가 어디에 계십니까? " 예수께서 대답하셨다. " 너희는 나도 모르고, 나의 아버지도 모른다. 너희가 나를 알았더라면 나의 아버지도 알았을 것이다. " 이것은 예수께서 성전에서 가르치실 때에 헌금궤가 있는 데서 하신 말씀이다. 그러나 그를 잡는 사람이 아무도 없었다. 그것은 아직도 그의 때가 이르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전에 이야기한 요한복음 7장53절-8장:11절의 [ ]소괄호를 표시한 부분은 요한이 쓰지 않았습니다. 그 후에 5세기경에 삽입된 또 하나의 다른 이야기라고 말했습니다. 왜 다른 이야기가 삽입되었는가 하면 그 후 오늘 읽은 말씀에 "나는 아무도 정죄하지 않는다" 라고 하는것과 간음하다 잡힌 여인를 보고 "나도 너를 정죄하지 않는다" 라고 하신것처럼 예수님이 똑같은 일을 말씀하셨으니 여기에서 삽입되었다고 말하는 설(說)도 있습니다. 그러므로 [ ]소괄호로 표시한 부분이 다른 곳에서 들어왔다 한들 이 초막절의 축제가 지금 마치고 있다고 합니다. 그리고 또, 예수님이 초막절이 끝나고 또 미야(宮)에 들어가고 배우고 있다고 말하는 먼 장래 주님만의 말씀의 다음에, 이것에서 초막절의 끝 있는 곳이 또 시작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 ]소괄호를 표시한곳은 나중에 삽입되고 있으므로 실제는 초막절이 아닙니다.
그리고 오늘 읽은 곳에서 또 초막절이 끝난 후, 라고 말하게 되어있는것입니다. 그리고 초막절의 제1일째라는것은 기본적으로는 큰 촛대를 세우고 밤에 그 촛대에 불을 켜는것입니다. 그 불을 켜는것도 제사장이 사다리에 올라가서 촛대에 불을 켜는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은 보통 평민,국민들은 그 뜰안에는 들어올수 없습니다. 제사장이나 율법학자나 주된 사람들이 거기에서 찬양하고 예배하고 기뻐하면서 춤추는 것입니다. 그것을 모든 이스라엘의 이 초막절에 온 사람들이 전원 보고 즐깁니다. 밤은 그렇게 초막절를 지나치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 밤은 빛이 고오(煌)들로 빛나는 것입니다. 그러나 초막절이 끝난 후, 드디어 그 빛이 없어졌을 때에, 완전히 이제 촛대에 불이 꺼져있을때 예수님이 또 일어서서 "내가 세상의 빛이다" 말씀하시는것입니다.
이전에도 그랬습니다. 물의 축제에서도 그러했습니다. 그리고 초막절의 물의 축제가 끝난 후에 예수님은 이러한 말씀을 하시는것입니다. "내가 저 광야에서 40년간, 모세와 그 백성들을 바위로 물을 먹인 사람이다." 그리고 초막절의 축제가 끝나고 물의 축제가 끝났을 때, "누구든지 목마르거든 내게로 와서 마셔라. 나를 믿는 사람은 성경이 말한 대로, 그 배에서 생수의 강이 흘러나올 것이다." 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리고 그 앞에 오천 명에게 빵을 먹였을 때도 그랬습니다. "내가 하늘로부터 만나를 내리게 한, 내가 살리는 하나님의 빵이다, 나는 생명의 빵이다." 라고 말했을 때에도 그랬습니다. "내가 40년간 너희에게 하늘로부터 내린 만나를 준 사람은 모세가 아니고 본인이다." 라고 예수님은 선언하시고 있는 것입니다.
계속 의도적으로 그러했습니다. 의도적으로 요한은 쓸 때에, 예수님이 왜 그것을 초막절의 축제때, 혹은 오천명을 먹였을 때에, 혹은 그것이 끝났을 때에, 이 말씀이 나온 것인가는 요한이 의도적으로 모두에게 알도록 쓰여진 것입니다. 다른 복음서와 요한복음서는 거기가 압도적으로 다른것입니다. 왜냐하면 1세기가 마칠 때, 요한은 되돌아보고 예수님이 오신 이유를 잘 이해한 후에, 이 복음서를 썼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초막절의 밤을 인도하는 빛이 끝난 후에 "나야말로 내가 정말 세상에 이른 빛, 바로 그것이다." 라고 예수님이 선언하시는 것입니다.
이 세상이 캄캄해졌을 때에 예수님이 일어서서 이 말씀를 이야기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은 의도적으로 이것을 하고 있습니다. 의도적으로 초막절의 축제에 가신것입니다. 그리고 빛이라고 하는것은 기본적으로 여호와(Jahvah), 기다리고 기다린 "메시야" 를 말하는것입니다. 그러므로 지금 예수님이 말하고 있는 "내가 세상의 빛이다." 는 "내가, 여호와(Jahvah)다." 내가 모세에게 만나를 먹인, 물을 먹인 그리고 저 40년간 낮에는 구름기둥, 밤에는 불기둥으로 인도한 그 불빛이 바로 나다." 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그 밤의 불, 40년간 한번도 빛을 지운적 없는 40년간 광야에서 인도한 여러분들이 존경하는 모세가 아니고 그것을 상회하는 하늘로부터 내린 불의 본인 바로 그것에서 그 때 모세의 장작 있는 곳에 내려 올수 있었던 여호와(Jahvah) 하나님, 스스로 존재하는, 스스로 있는 에고 에이미이다 라고 지금 또 여기에서 요한은 에고 에이미를 사용하는 것입니다.
내가 바로 그 다. 내가 하늘에서 만나를 내리고 당신의 조상들이 빌고 바라며, 기다리고 기다린 "메시아" 이다. 내가 여호와 하나님 이다" 라고 지금 선언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스라엘 백성들은 이것을 듣고 모독이라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왜 입니까? 지금 내가 여호와(Jahveah),구세주,메시아 이며 모세이상의 위대한 사람이다고 말 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여기에는 겸손성은 하나도 없습니다. 권위적인 에고이스트(egoist)적인 표현을 하고 있습니다. 권위적으로 일방적인 어조로 예수님은 여기에서 말씀하신 것입니다. 여러분은 성경을 읽을 때 "예수님이 세상에 빛이다" 말씀에 의문을 가지지 않습니다. 네 예수님은 세상의 빛 입니다. 라고 합니다. 그러나 유대인에게 있어서는 다릅니다. "빛" 이라고 말 한 순간에 이제 "나는 하나님이다" 라고 말하고 것으로 이해하는 것입니다. 그들은 예수님에게 당신이 "나는 하나님이다" 라고 말해도 당신의 아버지는 요셉이며, 당신의 어머니는 마리아 아닙니까? 당신의 남동생,여동생은 갈릴리에 살고 있고 당신은 갈릴리 출신이 아닙니까? 왜 그런데 당신은 자신을 하나님이다 라고 말하는 것입니까? 그리고 왜 여호와, 모세 이상의 위대한 사람이다 스스로 자랑하는지 말하고 반론하는 것입니다. 바리새인들의 말은 다른사람 두 사람 이상이 증언 할 때 참 되다고 말할수 있는데 예수님은 스스로 증거 하시기 때문에 그것을 인정할수 없다고 발론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권위적인 에고이스트(egoist)의 어조로 말씀하십니다.
불교가 만든 부처이나, 유교가 만든 공자나, 이슬람교가 만든 모하메드나, 그들은 말하기를 "그는 빛을 구하는 사람" 그리고 그들은 구도하는 자다. 그러므로 여러분 함께 갑시다. 여러분도 빛을 구하십니까? 라고 겸손하기 짝이 없는 말로 시작합니다. 다른종교, 다른 교주들은 모두 겸손한 말, 나야말로 빛이 아니지만 빛을 찾읍시다. 생명이 길로 갑시다. 라고 이끄는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이런 겸손성은 없습니다. 그러면 지금 압도적인 거짓말쟁이인가?, 아니면 압도적인 하나님인가? 라는 그럼 어느쪽인가로 되버리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애매하게는 한마디도 말하지 않고 있습니다. "내가 하나님. 나는 여러분들과는 다르다." 라고 말해버리는 것입니다. 나야말로 세상에 들어온 빛, 바로 그것이다. 여호와(Jahvah) 바로 그것. 말그대로 하나님이다. 당신은 왜 스스로 자신을 증언을 하는것입니까? 당신을 하나님이다 증언해줄 다른 사람들 두 사람은 어디에 있는 것입니까? 라고 하는 반론이 당연이 나와있는것입니다. 왜? 여기에서 에고이스트(egoist)적인 말로 지금 예수님이 아무런 겸손없이 단언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유대인으로 보면 대 거짓말쟁인지, 진정 메시아인지 어느 쪽인지 판단을 할수 밖에 없습니다. 그 중간에 그것을 인도한 예언자인 한 명이라고는 말하지 않고 있습니다. 지금 예수님은 그 중간을 인도하는 사람이 아닙니다. 하나님인가?, 사탄인가? 라고 말하는 판단을 지금 하지 않으면 안됩니다. 교회에 가면 예수그리스도는 하나님인가, 그렇게 믿지 않는다면 교회에 올 필요는 없어집니다. 이렇게 강하게 예수님은 지금 말씀하고 있는것입니다. 여기에서 말하는 예수님의 에고 에이미는 에고이스트(egoist)적으로 말하고 있는것입니다. 나 이외는 없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증인을 내놓으라고 하는것입니다. 율법을 인용하는 것입니다. 또 이 사람들은 증인이 없다면 당신의 증거는 거짓말이다. 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나는 나를 증언하고 있으면 이것으로 충분하다" 라고 대답하십니다. 유대인들은 율법에서 말하는 증인을 세우지 않고 있는데 자신을 하나님이라고 말하는 이 사람은 도대체 무엇인지 이해 할 수조차 없었습니다. 거짓말쟁이인가 속임수인가 악령인가. 그들에게 보이는 것은 이러한 종류인것입니다. 혹은 이 분이야말로 권위있는 가르침을 하는 메시야인가? 두 종류로 분열되어 있는것입니다. 지금 유대인 속에서 그리고 예수님이 여기에서 반론해 가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은 나에게 증거을 요구하지만,
∼"나는 내가 어디에서 왔으며, 어디로 갈지 알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너희는 내가 어디서 왔으며, 어디로 가는지를 알지 못한다. 너희는 세상의 표준을 가지고 판단하지만, 나는 아무도 판단하지 않는다." ∼
여기에서 예수님께서 대답하십니다. 당신은 내가 어디에서 오며, 어디로 가는 것을 모른다고 말한 것은 무엇을 말하고 있는 것입니까? 여기에서 권위적인 선언을 해버리는것입니다. 하나님을 믿고, 율법학을 배우고 대부분 하나님을 알고 있다고 생각하고 있는 율법학자. 자신들이야말로 하나님을 공부해 온 자. 자신들이야말로 하나님을 예배해온 자. 부족한 점이 없다고 생각하고 있는 사람을 향하여, 이렇게 말해버리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은 하나님을 모른다. 왜냐하면 내가 어디에서 오고, 어디에 가는지, 여러분들은 하나도 모르기 때문이다." 라고 예수님이 권위적으로 증언해버리고 있는것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이 하신것은 인간에 있어서 언제나 이러한 것입니다.
사사기 13장 6절
"미노아의 아내는 자기가 겪었던 일을 남편에게 말했습니다. "하나님께서 보내신 사람이 저에게 오셨는데, 그분의 모습은 하나님의 천사와 같아서 너무나 두려웠습니다. 그래서 나는 그분이 어디서 오셨는지 감히 묻지도 못하였고, 그분도 나에게 자기 이름을 알려주지 않았습니다."
이 이야기에 나오는 사람은 삼손의 어머니입니다. 삼손이 태어나기 전에 천사가 마노아와 그의 아내에게 나타나서 "당신에게서 하나님께 바쳐진 나실인이 태어나고 그것이 삼손이다." 라고 지금 예언하고 있는것입니다. 그리고 그 여인이 본 그분의 모습은 하나님의 천사와 같아서 너무나도 두려워서 어디서 왔냐고 물어 보지도 못했고 그분이 나에게 이제 임신하여 아들을 낳게 될 것인데 포도주나 독주를 마시지 말며 어떤 부정한 것도 먹지 말며 그의 머리도 깍지 마라 하셨습니다. 라고 남편에게 지금 말하는것입니다. 그 말을 듣고 마노아는 여호와께 기도드립니다. "주여, 주께서 보내셨던 하나님의 사람이 저희에게 다시 오기를 바랍니다." 라고 기도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마노아의 기도를 들으시고 하나님의 천사가 마노아의 아내에게 다시 나타나신 것입니다.그래서 마노아의 아내는 남편에게 달려가 "그 분이 오셨습니다." 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마노아는 여호와의 천사에게 말합니다. "당신의 이름이 무엇인지 알고 싶습니다." 라고 마노아는 부탁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과 같은 분이 드러났다면 들으면 좋겠다. 어디에서 왔는가? 그리고 마노아는 듣는 것입니다.
사사기 13장 17-19절
"마노아가 여호와의 천사에게 말했습니다. "당신의 이름이 무엇이지 알고 싶습니다. 이름을 알아야 당신이 말씀하신 것이 이루어질 때, 당신께 영광을 돌릴 수 있지 않겠습니까?"
여호와의 천사가 말했습니다. "왜 내 이름을 묻느냐? 내 이름은 기묘이다."
그 후에 마노아는 한 바위 위에서 염소 새끼와 곡식을 여호와께 제물로 바쳤습니다. 그 때, 여호와께서 놀라운 일을 하셨는데, 마노아와 그의 아내는 그것을 지켜 보았습니다."
인간은 모릅니다. 어떤 예언을 받아던지, 어떻게 실제로 하나님들의 모습을 보고도 "그 분이 어디에서 왔는지 나는 모르겠습니다." 그리고 "그 분의 성함도 모릅니다." 이것이 정말 인간의 모습입니다. 우리들은 하나님이 어디에 있고, 어떤 모습을 하고, 어떤 분인가? 전혀 모릅니다. 그리고 하나님도 인간에게 대답할 때, "나는 신기한것이다" 라고 대답하는 것입니다. 인간에 있어서는 신기하다, 신기한 분입니다. 그러므로 지금 예수님도 "당신들이 나를 알리가 없다." 이라고 대답하고 있습니다. "당신들은 내가 어디에서 오고, 또 어디에 가는가를 하나도 모르기 때문이다." 라고 예수님의 대답하셨던 것입니다.
요한복음 8장16절
"만일 내가 판단하여도 내 판단이 참되니 이는 내가 혼자 있는 것이 아니요 나를 보내신 이가 나와 함께 계심 이라."
본래의 의미는 "재판하는것이기 때문입니다."가 아니고 "함께이니까" 입니다. 하나님과 내가, 보낸 사람과 나, 언제나 함께있으니까, 라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너희의 율법에도 두 사람의 증언이 참되다고 기록되어 있다." 라고 예수님이 이번에는 말씀을 인용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지금 말씀을 인용할 때, 구약 성경에 씌어져 있는 "증인" 이라고는 말하지 않고 있습니다. 여기서 예수님은 단어를 갑자기 바꾸고 인용은 했지만 정확하게 구약성경을 말하지 않습니다. 예수님은 이렇게 번역해버리는 것입니다. "당신의 율법에도 두 사람의 인간들의 증언은 ∼" 라고 여기에서 이야기합니다.
증언이라든가 하는 말씀을 사용하지 않고 여러사람들이라는 복수를 사용합니다. 예수님은 굳이 여기에서 사람들이라는 단어를 넣고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내가 자신의 증인이며 또 나를 보낸 아버지가, 나에 대해서 증언하십니다. 」 ∼
예수님의 대답은 이렇습니다. "당신들은 내가 어디서 오며, 어디로 가는지 조차 모른다. 내가 누군지 모른다. 그러므로 그런 사람들의 증언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 입니다.
여러사람들속에서는 사람의 증언이 필요할지도 모르지만, 나 하나님에 있어서는 인간의 증언은 필요없다고 말하고 있는것입니다. 오히려 거짓말쟁이로 위증하는 이 사람들간의 증언은 나에게는 통하지 않는다고 말씀하시고 있습니다. 여기에서 예수님은 율법을 율법으로 돌린것입니다.
당신들은 이전에도 간음한 여자를 데리고 왔을때에, 가짜의 증언과 가짜의 증인을 데려오고, 예수님을 고소하려는 구실을 사용해서 그들은 그때부터 위증을 하는 것에 익숙해져 있는것입니다. 자기의 형편에 따라 거짓말의 증언을 하고 자기의 형편에 따라서는 당연하게 거짓말을 해서 재판에 참석하고 있는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도 당신들은 나를 모르는데 이런 인간의 증언을 왜 내가 필요해야 하느냐? 또 여기에서 에고 에이미적인 발언을 하고 있는것입니다. 당신들의 증언은, 나에는 팔요없다. 게다가 가짜의 증언등은. 당신들은 나를 모르지 않은가? 라고 예수님은 여기에서 대답하고 있는것입니다. 율법학자들이 예수님의 압도적인, 권위적인 어조에 화를내는 것입니다. 그리고 다른 종교인이나 예언자와 같은 겸손성을 여기에서 예수님은 보이시려고 하지 않습니다.
그러자 그들은 예수께 물었다. "당신의 아버지가 어디에 계십니까?" 예수께서 대답하셨다. "너희는 나도 모르고, 나의 아버지도 모른다. 너희가 나를 알았더라면 나의 아버지도 알았을 것이다." ∼
그리고 마지막으로 유대인들은 자기들이 하나님을 모른다고 노정(露呈)해버리는 것입니다. 여기에서도 또, 자기에게 믿음이 없는 것을, 하나님을 하나도 모른다는것을. 완전히 하나님을 모른다고 자기의 말로 증언해버리고, 자기말로 증명해버려, 그 믿음이 없다는것을 노정해버리는것입니다. 자기들이 하나님을 모릅니다. 결국 이 신기한, 불가사의해서, 인간에게는 도저히 이해가 할수없는, 그리고 인간의 증언으로 하나님을 증언할 수 없다라는 것을 정말로 노정해버리는 것입니다.
우리들은 아무리 성경을 이것 저것 읽어도 하나님 그 분을 단지 신기한 분이라고 고백할수 밖에 없습니다.
저는 다윗의 말 하나하나를 상기할 때, 다윗이 한 말 "달과 별을 볼 때, 사람이란 도대체 무엇인가? 이것을 만드신 분이 왜 인간을 돌볼수 있는것인가?" 라고 하는 말에 나 자신도 실감된 느낌입니다. 왜 이런 전능하신 분이 우리인간, 쓰레기 같은 인간을 뒤돌아 보시는 것인가. 전혀 이해를 할수가 없습니다. 왜 그런 것을 하나님은 하시는 걸까. 이것이 우리들이 하나님을 알수 없는 이유입니다. 그리고 또 그런데도 자기들은 증언을 세우고 있다. 당신도 증언을 세워라. 그러나 결국 하나님을 모른다는 것을 노정하는 것입니다. 이 인간의 어리석음을 요한은 지금, 함께 이야기 하고 있는 것입니다. 당연하게 하나님을 예배한다고 말하면서, 하나님의 율법을 지킨다고 말하면서, 성경을 가르치고 있는 교사들까지 하나님을 모르고 있다는것을 지금 노정하고 노출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님도 당신들의 증언을 나는 믿지 않는다 하셨습니다. 그리고 어떤 신학자는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기독교는 압도적으로 일방적으로 예수그리스도가 일방적인 자신의 자기의식의 원래 증언외에 의지하는 사람은 없다." 예수그리스도가 복음서에서 말씀한, 예수그리스도의 대사외에, 말씀외에, 우리에게 따로 부탁한 것이 없습니다. 예수님이 하나님이라고 말하면 믿는것 외에 없습니다. 예수님이 "내가 빛이다. 생명의 빵이다. 내가 길이고, 내가 진리다." 라고 말하면 그 외에 하나님을 아는 기술도 수단도 방법도 없다고 신학자가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기독교라는것은 예수의 증언에 매달리고 의존하고 그것이 믿음의 용기, 믿음의 영웅 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거기까지 표현할 정도, 예수의 증언외에, 예수가 증인으로 되지않으면 안되는것이고, 하나님을 이해한다라고 말하는 것 그 외에는 아는 수단, 방법이 없다. 그러므로 복음서에 쓰여져 있는 예수의 말씀만이 "하나님" 이다. 라고 말하면, 네 그렇습니다 아멘, 이라고 말할수 밖에 없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이 하나님이다." 이것이 명령입니다. 아멘 대답외에 없습니다. 애매함이 없습니다.그것을 믿지 않는다면, 크리스찬이 아니고 크리스찬으로 있을수가 없어집니다. 교회에 올 필요도 없습니다. 어떤 위대한 사람이라도 예수가 말한것 외에 하나님을 아는 기술도 수단도 없다고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그리스도의 말씀에 매달리고, 철저하게 완전히 의지 할수 밖에 없습니다. 그것이 하나님이라고 한다면, 그렇습니다. 아멘. 그것밖에 우리들은 응하는 방법이 없습니다. 왜? 하나님 바로 그것이 신기하기 때문입니다. 인간이 예수님께 "당신은 누구세요, 설명해보세요?" 라고 말할수 있는 상대가 아닙니다.
그리고 그것을 말하니까 예수님에게 "당신의 아버지가 어디 계십니까?" 라고 말해버리는 것입니다. 발론하고 하나님에게 반항하고 아무것도 회개하지 않고 기계와 같이 단지 행동만 하고있는 사람들은 결국 예수님의 재판하시는 날에 뭐라고 말듣게 됩니까? "내가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한다." 라고 말듣는 결과가 초래하는 것입니다.
인생 모든것을 걸고 예수님이 말씀하신것은 "그대로다" 라고 생각하고 그대로 실천하는 행동, 실천하는 순종, 실천하는 것이 필요로 되어버리는것입니다. YES와 NO밖에 없습니다. 예수그리스도가 "이것이다" 라고 쓴것에 "그렇습니다" 라고 말하는수밖에 없습니다. 예수그리스도의 증언이외 하나님을 설명하는 수단도 기술도 없습니다. 그러므로 예수그리스도야 말로 하나님의 형태, 하나님을 나타낸 특질로, 그러므로 이것을 "하나님이다" 라고 말하면 "아멘. 주님은 주인이십니다." 라는 대답밖에 없습니다.
하나님은 정말 불가사의한 분 이십니다. 우리들이 머리로 이해할수 있는것 같은 분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머리로 예수그리스도를 알았다고 한 사람이 하나님을 아는 것과는 다릅니다. 예수님께서 "하나님은 그렇다" 라고 말하면 이것에 의존하는 것외에는 없습니다. 삼손의 아버지와 어머니가 "내가 본 분은 정말 신기한 분이었습니다. 우리들은 그 분이 어디에서 오고 어디에 가는지를 모릅니다." 라고 하는 고백외에, 우리들은 하나님에 대하여 알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모르기 때문에 알지 못하기때문에 예수님이 말한 성경에서 쓰여져 있는 이 복음을 그대로 실천하는수 밖에 그외에는 없습니다.
화내지 마라 하시면 화내서는 안됩니다. 간음하지 마라,우상숭배하지 마라, 사람을 정죄하지마라, 미워하지 말고 내 이웃을 사랑하라 하시면 네, 그렇습니다 순종해야 합니다. 그것뿐입니다.
순종이야말로 예배입니다. 그것을 지금, 율법학자나 바리새인들에게 예수님이 그렇다고 대답하시는 것입니다. 당신들의 인간의 증언은 나는 필요하지 않다. 그리고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나를 보내신 아버지도 나를 위하여 증언하시느리라" 라고 말씀하십니다. 결국 무엇입니까? 예수님은 두명의 증인이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과 하나님. 결국 두명의 증인을 율법의 명령을 지키고 있는것입니다. 예수님은 율법을 안 지키신적이 없습니다. 당신들은 거짓말쟁이의 인간 증언이 필요하지만 나는 나를 보내신 진실한 하나님이 나의 증언을 해주신다. 예수님도 증인을 데리고 오셨다는 것입니다. 나는 언제나 아버지와 함께 있다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사랑의하나님 만이라고 생각하면 큰 잘못입니다. 오랜 세월 그렇게 메시아를 기다리고 형식으로 예배를 하고, 자신의 몸을 다 헌신했다 하지만 결국 예수님은 "나는 너희를 모른다." 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러나 아무도 예수님을 잡지 못했습니다. 아직 예수님의 때가 오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이 지금, 여기에서 가장 말씀하시고 싶은 중요한 곳은 "나는 보내져 왔다" 입니다. 사명이 붙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세상의 빛으로서 이 미션을 행하기 위해서 오신것입니다. 인간에게 모습을 나타내고 싶으셔서, 인간에게 하나님의 모습을 보여주고 싶어서도 아닙니다. 예수님이 이 세상에 오신것은 단지 한가지 미션 때문에. 사명 때문에 보내져 오신 것입니다. "보내졌다" 는 파견입니다. 파견에는 반드시 미션이 붙어서 들르는 것입니다. 미션이 없는 파견은 없습니다. 그러므로 이 일 때문에 왔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일이 끝나면 돌아가는것입니다. 이 일 만이 예수님의 목적이었던것입니다. 여기에 온것은 무엇때문입니까? 십자가에 못박혀 죽으시고 부활하시고 승천하셔서 성령을 보내신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하나님 아버지에게서 나는 이것을 하기 위해서 그 것 때문에 왔다. 나의 미션이며, 파견 된것이다. 그리고 하나님 아버지는 지금도 나와 함께 계신다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인간들은 이해를 못합니다. 왜 그렇습니까? 인간은 태어난 것과 미션이 동등하지 않습니다. 인간은 화려함 자기가 하고싶은 일을 맘대로 하고 아무런 미션도 없이, 사명도 없이 살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인간에 있어서 존재=미션으로 되지않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명함이 필요합니다.
그러므로 나는 도쿄 가스배달원 입니다. NHK인 입니다. 나는 어느 회사에 회사원입니다. 라고 말하는 명함이 필요합니다. 왜냐하면? "살아있다=미션" 이 안되면 인간은 그런것을 신용하지 않습니다. 살아 있는것만으로 나에게는 미션이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다른 것입니다. "존재=미션" 입니다. 인간과는 전혀 다른 것입니다.
이 미션 때문 입니다. 우리들은 무엇인가 사랑으로 위로받고 격려받으려고 예수님에게 달려가서 붙잡는지도 모르지만 예수님에게 있어서는 미션입니다. 존재 바로 그것, 임재 바로 그것 입니다. 모든 것에 있어서 미션으로 오신것입니다. 하나님 아버지에게서 보내진 일을 위해서 오신것입니다. 성령님도 그렇습니다.
우리들 안에 함께 거하시고 계신 성령님은 당신을 격려하기 위해서 온것이 아니고 예수그리스도의 미션에 부족한 곳을 다하시기 위해서 오신 것입니다. 하나님의 나라 일, 하나님의 일. 진리의 일을 하기 위해서입니다. 예수님이 오셨던 이유도, 성령이 오셨던 이유도 그렇습니다. 매우 인간 중심으로 하나님을 생각해서는 안됩니다. 피조물은 예수님이 선택한 하나님의 영광 그릇이었을지도 모르지만 하나님이 인간과 동등한 것은 하나도 없습니다.
예수님은 자신이 구원한 사람을 결코 버리지 않습니다. 그 책임을 절대로 지키시는 분입니다.하나님에 있어서 피조물의 운영은 미션입니다. 인간이 생각하는 애정과는 다릅니다.
처음부터 우리는 은하가 무엇인지 태양계가 무엇인지 잘 모른다. 다크매터(Dark matter)따위는 들어도 실제로는 그 힘이 무엇인지 잘 이해 하지 못한다. 우리들이 살고 있는 은하는 은하수의 은하입니다. 그러므로 때때로 여름에 보는 은하수는 은하의 끝(가장자리)를 보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태양계라고 하는 우리들이 살고 있는 태양을 중심으로 달과, 또 화성, 수성, 목성, 금성, 토성, 지구, 해왕성, 명왕성, 몇가지의 행성이 태양계 중심으로 돌고 있는것을 은하라고 말합니다만, 이것은 은하가 중심이 아니고. 은하의 끝(가장자리)입니다. 이러한 태양계가 무수해지는 것이 은하입니다. 그리고 은하라고 말하는것은 우리들이 살고 있는 이 태양계조차 화성에 도달하는 것이 일년이라고 하는데, 로봇이 가는것도 일년이 걸린다고 하는데, 인간의 다리로서는 화성에 도달마저 할수 없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가장 가까운 화성이 그 정도 상태이지만 은하라고 말하는것은 이 우리들이 살고있는 태양계가 끝(가장자리)에 있다고 하는 크기로. 은하라고 말하는것은 결국 별의 쓰레기, 행성들의 소용돌이치는 상태입니다. 그리고 우주에는 그 은하가 몇 천만개 있다고는 합니다.
그 은하는 우리들이 살고 있는 가장 가까운 안드로메다 성운, 그 은하조차 아득히 저멀리 있는것입니다. 전자망원경으로 보아도 아주 멀리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자세한 소용돌이나 타원형이나 여러모양이 모든 은하에 있지만, 모든 은하는 운동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상대성 이론 라고 하는 것은, 이러한 은하와 우주로부터 생겨나게 되어 있는것입니다. 뉴턴이나 아인슈타인이 발견한 운동법칙도 여기에서 온것입니다. 그리고 그 은하는 모든 별들이 운동하고 있는것입니다. 가속화되고 있는 것입니다. 소용돌이상에서 돌고 있는것입니다. 그리고 그 중심은 태양이 아니에요. 낡은 별들이 둥글고 빙글빙글 주변, 그 다음에 새로운 별이 끝(가장자리)에 있는, 그리고 빙글빙글 돌고 있는 것이 은하입니다. 그러나 최근 다크매터라고 말하는 것이 각국 서로 경합하고 이것을 찾고 있습니다. 왜? 은하의 별수를 세우고 그 질량과 가속화되고 있는 속도를 계산하면 맞지 않습니다. 질량과 속도라는 것은 일정하지 않으면 안됩니다. 중력과 가속은 일정하지 않으면 안되는데 맞지 않습니다. 그 10배의 질량이 충분하지 않습니다. 별의 수보다도 거기에서 다크매터가 있다고 말하는것을 아는것입니다. 암흑물질. 빛도 발하지 않고 있기 때문에 전자파에서 우리들이 눈으로 보이지 않는 물질이 은하에 70%을 지배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 다크 매터가 중력을 만들고 있는 것입니다. 그 다크매터가 없으면 이 은하의 운동법칙은 일어나지 않습니다. 그 다크매터는 그림자도 없는 모양도 없는 빛도 발하지 않는 그리고 어떤 물질인지 모릅니다. 어떤 성질인지 모릅니다. 어떤 소립자인가 알지 못합니다. 어떤 원자를 가지고 있을지 알수 없습니다. 인간과 지구와 우주에서 본것도 생각한적도 없는 소립자입니다. 그러므로 이것을 발견하면 우주를 아는 것입니다. 그 다크매터가 중력을 대부분 만들고 있어서 은하를 운동법칙에 가져가서 가속화되게 하는것입니다. 그래도 다크매터가 70%라고 말하지만 그것보다 더 경악의는 다크매터는 은하와 은하의 사이에도 있는것입니다. 이라고 하는것은 무엇입니까? 은하와 은하의 사이 중력도 담당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다크매터는 빛도 없는 모양도 없는 그리고 어떤 분자일지도 알지 못하기때문에 인간이 그것을 보려고 해도 볼수 없다. 그러므로 암흑물질입니다.
그리고 그것이 어떠한 물질인가 찾고 싶은것이 지금의 지구인이 정말로 가장 요구하고 있는것입니다. 그러나 결국 모릅니다. 그것이 모양인가 빛을 발하지 않는 별인가, 혹은 다른 우리들이 모르는 물질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 다크매터가 결국 중력을 만들기 때문에 우주를 확장시키고 있다고도 알수있는 것입니다. 우주를 지금도 넓히고 있는 활동은 이 다크매터가 하고 있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막대한 중력을 만들어 버리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것은 시공을 파괴해 버리는 정도, 삐뚤어지게 해버리는 정도의 중력입니다.
그러므로 빛이 똑바로 투과하지 않습니다. 다크매터에 만나면 빛은 완곡하게 움직여 버리는 것입니다. 빛은 곧바로 밖에 안 갑니다. 그러나 물리적으로는 다크매터에 부딪치면 빛은 뒤틀리는 것입니다. 왜? 다크매터의 중력으로 빛이 뒤틀리는 것입니다. 다크매터가 우주의 질서를 지키고 있다고 생갹됩니다. 중력으로 입니다. 중력으로 운동법칙을 어느 은하도 다크매터가 돌리고 있는것입니다. 그리고 은하와 은하가 부딪치지 않도록 그리고 지구와 태양이 부딪치지 않도록 그리고 화성과 목성이 부딪치지 않도록 완전한 이 질서를 만들고 있는 것이 다크매터입니다. 우주의 대부분을 지배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인간에게는 이러한것을 모릅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천지를 만드신 분은 하나님입니다. 하나님은 그 천지를 하루에 만드신 것입니다. 말씀으로. 이 다크매터를 사용하고 있는 것, 바로 하나님 이십니다. 이 우주의 질서를 하나님의 말씀이 지금도 계속해서 운영하시고, 예수님이 다크매터를 지우는 순간에는 요한 계시록에는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태양은 빛을 없애고 별들은 이 땅에 떨어진다고 말하는것은 다크매터가 없어지면 중력이 불규칙하게 움직이면 이번에는 운석이 부딪치는것만으로 폭발이 일어나고 지구의 폭발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다크매터는 가스인 가능성도 있다. 그러나 이 가스조차 이외에 충만하고 있는 우주에서 돌과 돌이, 별과 별이 부딪친 순간에 핵폭발에 몇백배도 큰 폭발이 일어난다고 말하는것은 우주의 괴멸 상태입니다. 다크매터가 작용하지 않게 된 순간 이라고 하는것은 하나님의 말씀이 끝난 순간에 이제 우주마저도 대폭발을 일으킨다고 합니다. 지구의 붕괴명산지가 아닙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활동입니다. "말씀" 입니다. 그리고 창세기에 하나님은 우주만물을 태초에 창조하셨다 라고 유대인은 쓰여져 있지만 고대유대인이라고 하는 것은 제1일째의 1일째라고 하는것은 빛나서 말하는 의미도 가지고 있고 빛나서 말하는 것은 하나님의 활동 장소라고 하는 것도 가지고 있고 하나님의 빛, 하나님의 활동, 우주 바로 그 것입니다. 그러나 고대유대인은 이 다크매터 포함시킨 모두 단수에 한개로 표현하는것입니다. 우주모두를 단수에 한개 모두 이어서 표현하는것입니다. 이 셀수없는 별들. 한개를 표현하는 것입니다. 무엇을 말하는 것입니까? 촛대라고 말하는것입니다. 빛을 넣는 그릇에 지나치지 않는다. 게다가 단수형입니다. 이런 우리들이 상상할수 없는 우주가 방대한 넓이, 깊이, 무한함 이라는 것을 유대인은 대단한 가치로 하지않습니다. 고작 촛대조차 말하는것입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싣는 고작 도구에 지나치지 않는다. 라는 표현을 하고있는 것입니다. 이 천지는 그 정도 가치가 없다. 가치가 있는것은 하나님의 말씀이며 하나님의 빛이며 하나님의 활동이다고 하는것이 고대유대인의 사고방식입니다. 무슨 한개 천지를 칭찬는 견디지 않고 있다. 다른 종교, 다른 고대인, 다른 모든 사람은 달이나 별을 하나님으로 부르고 있는것입니다. 모두 태양이 하나님이며 달이 하나님이었던 것입니다. 어느 나라도 어느 인종도 그러 했습니다. 유대인만 믿지 않았습니다. 그런것은 촛대에 한개에 지나치지 않고 하나님의 도구 한개에 지나치지 않고 어떤 우상도 이루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은 영령이라고 해서 말하는것이 유대인이 철저한 관념입니다. 유대인에게만 우상의 하나님을 만들지 않습니다. 하나님에게서 만든 순간에 멸망 시키십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빛라고 말하는 의미합니다. 지금 나는 세상의 빛 이다 말씀 하십니다.
지금의 우리들에게는 다윗이 말한 "왜 나를 뒤돌아 보는 것일가?" 라고 말하는 저 신기한, 불가사의한, 왜일가 하는 물음(question)이 아닙니다. 나를 보아 주세요. 나를 위로해 주세요. 나에게 뭔가 없습니까? 나에게 뭔가 일을 주세요. 라고 하는 요구만입니다. 하나님을 알지 못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율법학자와 같이 아는척 해도 "당신들은 나를 모른다" 라고 대답밖에 돌아오지 않습니다.
우리들이 살고 있는 은하계따위, 우주의 끝의 끝(가장자리)입니다. 어떤 위대한 과학자조차도, 죽을 때에는 모른다고 대답합니다. 괴테조차 말합니다, 나는 허무하다고. 철학자도 모른다고 말합니다. 이것이 인간의 모습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말씀에 "그렇습니다" 라고 말하는수밖에 없습니다. "예, 그렇습니다. 당신은 나의 주인입니다. 하지만, 당신은 하나님이시고 나는 피조물입니다" 라고 말하는 태도를 취할수밖에 없습니다. 이외에 하나님과 접촉하는 방법이 없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이 함께 말씀한 이 말에 압도적인 전체적인 의존을 하는것입니다. 예수님의 말씀에 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하나님을 모르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은 우리들을 구원해주셨습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