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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esus Christ Glory Church

요한복음 7장53-8장11절

2018.02.14 15:25

∼ [다 각각 집으로 돌아가고 예수는 감람 산으로 가시니라. 아침에 다시 성전으로 들어오시니, 백성이 다 나아오는지라 앉으사 그들을 가르치시더니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 음행중에 잡힌 여자를 끌고 와서 가운데 세우고 예수께 말하되 "선생이여 이 여자가 간음하다가 현장에서 잡혔나이다.

모세는 율법에, 이런한 여자를 돌로 치라 명하였거니와 선생은 어떻게 말하겠나이까?" 그들이 이렇게 말함은, 고발할 조건을 얻고자 하여 예수를 시험함이러라. 예수께서 몸을 굽히사, 손가락으로 땅에 쓰시니, 그들이 묻기를 마지 아니하는지라. 이에 일어나 이르시되, "너희 중에 죄 없는 자가 먼저 돌로 치라." 하시고 다시 몸을 굽혀 손가락으로 땅에 쓰시니, 그들이 이 말씀을 들고 양심에 가책을 느껴 어른으로 시작하여 젊은이까지 하나씩 하나씩 나가고 오직 예수와 그 가운데 섰는 여자만 남았더라. 예수께서 일어나사 여자 외에 아무도 없는 보시고 이르시되, "여자여, 너를 고발하던 그들이 어디에 있느냐? 너를 정죄한 자가 없느냐?" 대답하되, "주여, 없나이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도 너를 정죄하지 아니하노니 가서 다시는 죄를 범하지 말라" 하시니라 ]~

지금 읽은 요한복음서에 7장 53절에서 8장의 11절에는 [ ] 소괄호가 붙여져 있습니다. 이 [ ] 소괄호가 왜 여기에 있는가 하면 이것은 처음부터 요한의 복음서에 씌어져 있었던 이야기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5세기경부터 요한의 복음서에 삽입된 이야기가 넣어진 곳입니다.

그러나 그렇다해서, 이 이야기는 역사상의 역사적 사실이 아니고 거짓말의 이야기인가고 하면 그렇지 않습니다. 2∼3세기경에 이 이야기의 중요성이 인식되어 성서본문에 채택되기 시작했던 것이며 5세기경부터 전 교회적으로 받아들어진 이야기이며 요한복음서 여기에 삽입되어 있는것입니다. 여기에 삽입되고 있는 이유라고 말을 추가하자만 그 전의 초막절의 축제 때에 예수를 잡기 위해서는 2~3명의 증인이 필요했으며 더 조사하지 않으면 안되는 상황에서 니고데모는 "확실히 조사한 후에 재판한다고 말하는 것이 율법이 아닌 것인가"? 라고 말했을 때에 율법학자,바리새인, 모든 의원들이 "당신도 갈리리에서 왔습니까? 찿아 보라 갈릴리에서는 선지자가 나지 못합니다?" 라고 말하고 증인도 세우지 않고, 조사도 하지 않고 증인을 세운다는 것은 율법을 어기고 있는것에 대해 말하고 있습니다. 그 다음 여기에 삽입되고 있는 말씀입니다.

왜냐하면 지금 간음의 현장에서 잡힌 여자를 예수님앞에 데리고 올수 있었다고 삽입된 곳은 그들은 멋대로 증인도 세우지 않고 죄를 심판하고 있다고 말하는 증인설을 빈정거리며 여기에 넣어져 있다 하는것 부터 이해 해야합니다. 그러나 이것은 요한이 쓰지 않고 있는 것은 기본적으로는 밝혀져 있는 것입니다. 이것은 요한이 쓴것이 아니고 삽입된 것입니다. 그러나 요한복음서에 삽입된 이 말씀은 중요성과 진실의 실화었던 것은 대부분의 학자가 인정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여기에 이렇게 [ ] 소괄호가 쳐져 있지만 요한복음서를 읽을 때에 아무런 지장도 없습니다.

그리고 오늘 간음하다 현장에서 잡힌 여자를 잡아 결국 『간음을 했다』라고 이 죄를 지금 예수가 있는곳에 데리고 온 것입니다. 먼저 간음이라는 죄에 대해서는 확실히 모세율법에는 쓰여져 있는것을 그들은 알고 있는 것입니다. 모세의 율법에는 이렇게 쓰여져 있지 않습니까? 라고 그들은 또 그 때와 같이 니고데모와 다투고 있었던 바리새인들이 같이 성경을 인용하고 있는것입니다. 베들레헴에서 태여났다고 하는 인용을 이전에 한것처럼 또 여기에서도 모세의 율법은 이렇게 쓰여져 있다고 그들은 인용해오는 것입니다.

확실히 모세의 율법에서는 "간음을 범한 사람은 돌로 쳐라"라고 쓰여져 있습니다. 그럼 당시의 유대인은 이것을 정말로 지키고 있었는가 하면 이제 그리스의 문화가 다헤치고 들어가 있어서 유대교라고 말하면서, 모세의 율법을 믿는다고 말하면서, 그리스의 풍습이 대부분이 유대인 안에는 들어가 실제로 정말로 간음을 범해서 돌로치고 있다고 말하는 예가 대부분은 없어져 그렇게 철저해서 사형으로는 되지 않고 있었습니다. 남자가 멋대로 여자를 이혼하는 것은 이 시대 이제 일어나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 때에 간음을 범해도 죽음을 당하는것은 없었습니다. 그러나 확실히 유대인에 있어서 이 법률은 적당히 끝나는 문제도 아닙니다. 율법을 지키는 것은 바리새인 그리고 율법학자, 그 권위를 주장하는 사람들에 있어서는 역시 룰, 훈계를 지키는것은 당시 조차 엄격하게 처벌를 받아야 했습니다. 그리고 이 여자가 현장에서 범한 죄로 데리고 와서 말하는 것은 2∼3명의 증인이 있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고소하는 것은 용서 될수 없습니다. 여기에서 말하는 모세의 율법이 명하고 있는 것은 같은 이불에 자고 있으면 이제 안됩니다. 이것은 이제 정말로 현장을 확보한 것이라고 하는 증인이 2~3명 있지 않으면 쓰는 것을 불가능합니다. 그러므로 이것은 의도적인것들이 자주 있었던 것입니다.

왜냐하면 이혼은 자유롭게 하고 있었을지도 모르지만 이혼할 때에 재산을 나누지 않으면 안된다. 라는 법을 명령받았기 때문에 이혼을 해도 남자도 여자도 재산은 반으로 나누어야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것을 피하기 위해서 남편 혹 아내가 짜고 그 2~3명의 증인을 새우고 준비하며 그것을 고소하고 돌로 처서 죽인다고 말할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여자의 경우도 예수님에게 데리고와 고소하기 위해서 짜진 것은 충분히 있을수 있었던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 현장을 잡는다고 것은 간단한 것이 아닙니다. 남편이 그것을 계획하지 않고 있으면 이 여자에게 간음의 죄를 씌우고 그리고 그 재산을 전부 받으면서 이혼을 한다고 말하는 것을 완수하기 위해서는 이 2~3명의 증인을 처음부터 의도적으로 숨기고 그 목격 증인을 시킨다고 하는 것이외, 간음의 현장에서 잡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그러므로 이것은 어디까지나 그 남편이 계획한 것이며 그리고 당연히 예수를 고소하기 위해서 데리고 온것이 틀림이 없습니다.

그러므로 여기에서 증인라고 말하는 것도 옳은 증인이 아닙니다. 악인의 편을들고 위증하면 안되다, 라는 율법의 명령이었는데도 불구하고 그들은 이 율법의 명령을 지키지 않고 단지, 간음의 현장에서 잡힌 간통사건은 모세율법 에서는 그것은 돌로쳐도 된다 라고 말하고 있는것은 여기에만 인용해 오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아까 초막절에서 논쟁했을 때도 베들레헴에서 태여나다를 인용하고 다른 부분 갈리리로부터 영광이 나타날수 없다 라고 비난하고 증인 2~3명을 서지 못하면 재판해서는 안되다는 증인설도 지키지 못하고 있는것입니다. 그러므로 여기에서 또 그들은 증인설을 범하고 있으며 모세의 율법이다라고 말하면서 그들은 처음부터 계획하고 위증하는 점에서 하나님앞에서 그들은 정확하게는 옳바르지 않았습니다.

그러한 꾀로 그녀는 데리고 온것입니다. 그리고 그녀를 고소하는 구실로서 그들이 이 여자를 사형으로 할것인가, 사형으로 하지 않는것인가 라고 단순하게 말하는것이 아니었습니다. 왜냐하면 아까도 말한것 같이 이혼은 횡행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이 케이스뿐만 아니라 다른 케이스라도 이혼은 정당화 되지는 않습니다. 지금정도 정당화 되지는 않지만 율법대로 돌로치지 않는채, 이혼은 성립해버리고 그리스의 풍습은 유대인속에서도 상당히 만연 되어있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이 현장에서 잡혀있을 때도 그것만으로 고소하기 위해서는 지나치게 약했던 것입니다. 이 여자는 돌로 칩니까? 그렇지 않습니까? 라고 예수에게 고소해 오고 있는 것이지만 게다가 결혼전의 여성이 간음했을 때에는 돌로쳤지만 결혼한 후의 간음은 돌로치는 것이 아니고 기본적으로는 사형이라고 말해지고 있는것입니다. 그래서 돌로치기가 가벼운 형입니다.

그래서 이 여자를 지금 사형으로 할것인가 아닌가가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그들 유대인은 지금 로마의 지배하에 있어서 사형을 하는 권리를 가지고 있지 않다. 그러므로 예수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매달리게 할때 조차도 "당신들이 좋을대로 하라, 당신의 율법대로 하면 좋다."라고 말하고 비라토에 일컬어졌을때도 "우리들은 사형으로 하는 권리는 없습니다."라고 대답하고 그들은 자유자재로 아무리 율법이라도 해도 유대인이기 때문에 우리들의 종교이기 때문에라고 말하고 로마의 지배속에서 대중들이 보는 앞에서 사형으로 하는 권리를 가지고 있지는 않습니다.

그러므로 여기에서 그들이 예수에게 고소하고 있는 것은 그녀를 사용해서 예수그리스도를 실추시키려는 것입니다. 이것은 로마의 풍습에서는 사형에 정해지지 않고 있기 때문에 현대적이어서 이혼하면 좋은 것이 아닙니까? 그런 형식으로 로마에 항의할수도 없었습니다. 또 예수가 말했다 라고 하면 이 예수그리스도가 지금 성경를 이야기하고 하나님을 이야기하고 하나님의 권위를 함께 이야기 하고 하나님이 보냈다고 자신을 증명하고 있고 그 하나님에게서 보내진 사람이다 하는것에 예수님을 추시키려고 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백성이 예수그리스도에게서 떨어지게 백성이 이제 더 이상 예수그리스도의 이야기를 들을수 없도록 하는것이며 그리고 누구에게서도 신뢰받지 않도록 하는것이 그들이 쓰는 첫째의 구실로 사형이 되면 좋을거라고 생각하고 있었을지도 모르지만 트집잡기에는 아직 불충분했습니다. 단지 간음을 했기 때문에 돌치기다, 돌치기 아니다라고 대답하는것만으로 예수그리스도를 죽이기에는 불충분하기때문에 그래서 실추 하게 하는것입니다. 충분히 이 예수그리스도의 명예를 욕보이는것 그리고 백성에게서 떼어 놓는 것은 가능했으므로 그들은 그래서 이 간음의 현장에서 잡고 의도적으로 증인을 서라, 위증시켜 이 예수그리스도쪽에 데리고 오고 있습니다. 그러한 상황에서 젊은이부터 노인까지 여자와 어린이까지 모두가 모여서 이 여자를 예수 앞에 데리고 오고 큰 소동을 피우는 가운데 예수는 땅에 글씨를 쓰고 계셨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을 고소할 구실을 얻기위해 큰 소란을 피우고 있어도 예수님은 땅에 글을 쓰셨습니다.

예수님께서 무엇을 땅에 쓰고 계신지는 몰라도 중요한 것은 예수님이 이런 쓸데없는것을 상대하지 않으셨다. 라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처음부터 위증하고 있는것을 알고 처음부터 거짓을 세우고 이렇게 모세의 율법이다라고 말하면서도 그들 자신이 이런 식으로 계획하고 있는것을 알고있는 예수님은 분명히 그들에게 세세하게 대답할 가치도 상대 할 가치도 없었다. 라고 칼빈(Calvin)은 그렇게 설명하고 있어서 많은 학자가 칼빈 이후, 이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은 상대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매우 시끄럽고 끈질기게 계속해서 묻자 예수님이 드디어 "죄가 없는 사람이 그녀에게 돌을 던져라" 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이 말씀을 하시고 땅에 글을 쓰시고 이제 자세하게 그 것에 대해서 죄가 없는 사람이 누군가, 바라보는 것도 내지 누가 돌로 처음에 칠 것인가 그러한 흥미도 내지 감탄도 내지 이런 위증의 호소에 아무런 흥미도 가지지 않고 예수님은 또 여자에게도 눈도 주지 않고 땅에 또 글를 계속 쓰는 것입니다. 그 정도로 이런 내키지 않는것에 눈을 올리는것 조차 가치가 없다. 라고 하는 태도를 취하고 있는것입니다. 그러니까 나이 많은 사람들로부터 시작하여 하나둘씩 떠나 갔다 라고 쓰여져 있습니다.

그리고 땅에 글자를 썼다고 말하는 부분에서 학자들은 이 말을 쓴 것이 아닐까 말합니다. 예레미야서나 빌립보서에 간음을 범한 사람이 어떤 벌을 받을 것인가 혹은 위증의 죄 심판이나 등등. 사랑은 관대하다 라고 쓰고 있었던것은 아닌가 라고 가지각색으로 재미있고도 우수운 이러한 의미가 아니었는가? 라고 말하고 혹은 로마의 습관에 따르고 죄상을 쓰고 그것을 증거로 해서 서류로 하자고 하고 있다든가, 여러가지가 말해지고 있지만 그 지면에 씌어진 글자가 어느 성경구절인지 그런것이 중요하지 않다고 존 칼빈(Calvin)은 말하고 있습니다. 칼빈는 여기에서 중요한 것은 무슨 말씀이 씌어져서 어떤 로마의 습관에 따른 재판의 기록을 하고 있었는가 그런것이 중요하지 않고 여기에서 중요한 것은 예수그리스도가 그들을 상대하지 않았다. 그들을 무시하고 있었다. 그들의 주장을 듣지는 않고 있었다. 그들에게 세세하게 대답할 가치도 찾아낼수가 없었다. 이것이 중요하다 예수님께서 무엇을 땅에 쓰고 계신지는 몰라도 중요한 것은 예수님이 이런 쓸데없는것을 상대하지 않으셨다. 라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처음부터 위증하고 있는것을 알고 처음부터 거짓을 세우고 이렇게 모세의 율법이다라고 말하면서도 그들 자신이 이런 식으로 계획하고 있는것을 알고있는 예수님은 분명히 그들에게 세세하게 대답할 가치도 상대 할 가치도 없었다. 라고 칼빈(Calvin)은 그렇게 설명하고 있어서 많은 학자가 칼빈 이후, 이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은 상대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매우 시끄럽고 끈질기게 계속해서 묻자 예수님이 드디어 "죄가 없는 사람이 그녀에게 돌을 던져라" 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이 말씀을 하시고 땅에 글을 쓰시고 이제 자세하게 그 것에 대해서 죄가 없는 사람이 누군가, 바라보는 것도 내지 누가 돌로 처음에 칠 것인가 그러한 흥미도 내지 감탄도 내지 이런 위증의 호소에 아무런 흥미도 가지지 않고 예수님은 또 여자에게도 눈도 주지 않고 땅에 또 글를 계속 쓰는 것입니다. 그 정도로 이런 내키지 않는것에 눈을 올리는것 조차 가치가 없다. 라고 하는 태도를 취하고 있는것입니다. 그러니까 나이 많은 사람들로부터 시작하여 하나둘씩 떠나 갔다 라고 쓰여져 있습니다.

라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9절

~이 말씀을 들은 사람들은, 나이가 많은 이로부터 시작하여, 하나하나 떠나가고, 마침내 예수님과 거기 홀로 서 있는 여인만 남게 되었다.~

예수님과 거기 홀로 서있는 여자만 남게 되었다. 가 진실한 이유입니다. 그리고 이 "남겨졌다" 는 성경에서는 더 엄격한 말로 "버릴수 있었다" 라고 하는 표현이 상당히 가깝다고 말해지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여자 한사람을 버릴수 있었다. 라고 말하는 상황입니다. 그러므로 다만 한명 남겨진 것이 아니고 군중은 이 여자를 이용해서 데리고 온것에도 관계되지 않고 마지막으로는 이 여자는 이 군중에게서 버려져 있는 것입니다.

왜? 양심의 가책 때문입니다. 여기에서 "듣다" 는 그들이 말씀을 듣다 이지만 진실의 이유는 "양심을 엄하게 추궁할수 있어" 입니다. 그들은 자신의 양심에 다그칠 수 있어서 양심의 가책으로 여자를 거기에 버리고 갔습니다. 그리고 이 양심의 가책을 느낀것이 노인부터 시작했다는 것입니다.

괴테의 명언에 이러한 것이 있습니다. "만일 관대해지고 싶으면 나이를 먹으면 좋다." 왜냐하면 그것은 전부 자신이 범한 죄를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노인은 살아있을 때에 그 범한 죄를 기억합니다. 혹은 노인들에게는 기회만 있으면 그 옛날 상황으로 돌아가서 환경을 바꾸고 싶고, 자신이 지은 죄를 알고 있기 때문에 노인은 거기를 떠나가고 싶은것입니다. 젊은이는 혈기왕성해서 끝까지 있었을지도 모르지만 노인부터 떠나갔습니다. 왜? 그들 자신도 그 죄를 지였기 때문입니다. 그것이 양심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인간속에 있는 양심이라고 하는것은, 믿고 있는 사람도, 믿지 않고 있는 사람도 누구나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 양심이 대부분 마비되고 지금 이 시대에 누가 양심에 호소하기 시작할 수 있고, 누가 양심의 가책을 느낄것인가 라고 말할 만큼 양심의 마비는 훨씬 심각한 상태에 빠져 있을 지도 모르지만 그러나 이 시대의 양심도 노인에게서 부터 시작하였습니다. 왜? 양심이라고 하는 의미는 "자기 자신을 잘 아는 사람"이라고 하는 의미입니다. "양심"이라는 진실의 의미는 자기를 알고 말하는 사람, 알고 있는 이제 한사람이 자신을 말하는 의미합니다. 자신이 그 죄를 범한 적이 있어 그러한 자신의 거짓말을, 자신이 범한 죄를 알고 있는 이제 한사람의 자신이 양심입니다. 어떻게 마비되고 있었다고 한들 그것은 존재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지금의 범죄자들은 대체로 부정합니다. 자신은 하지 않았다. 증거가 드러나지 않는 한 죄를 모면하는 것은 당연하다고 합니다. 높은 변호료를 지불하고 돈이 있는 사람은 미국에서는 정당하게 감옥에서 나오고, 재판에 이기고 우수한 변호사를 고용하면 살인을 해도 이길수 있는 정도까지 와 있습니다. 그러나 양심만은 어쩔수 없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처음에는 범죄를 하지 않았다. 자기는 죽일 계획은 없었다. 죽였다고 한들 그것은 과실이었다. 라고 하는 그러한 재판이 많이 있고 그리고 시간을 끌고 혹은 형사나 주변의 가족, 남겨진 사람, 그리고 피해자의 가족들을 정보나 설득을 가지고 그 사람의 양심은 마지막으로는 굴복하는 것입니다.

왜인가? 이 세상에서는 양심의 가책에 의해 그렇게 된것을 정상적으로 돌아갔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결국 한 명 더 알고 있는 것입니다. 죄를 한 명 더 그 현장에 있었던 숨길수 없는 이제 한사람도 나에 거짓말은 붙이지 않습니다. 어떻게 마비되고 어떻게 망상으로 망신 당하고 거기에서 떠나지 않는 인간이라도 설득되어 현실을 보여줄수 있어 현실을 추궁할수 있어 증거를 들이대어지면 그 양심은 드디어 정상적으로 돌아가는수밖에 없어지는 것입니다. 정상적으로 되돌아온 인간에게 무엇이 있는 것입니까? 죄의 의식이에요. 죄의 자각합니다. 드디어 어떤 범죄자에서도 상당한 환자, 이상자가 아니면 반드시 언젠가 시간이 흘러가면 누구보다도 자신을 알고 있는 이제 한사람의 자신 이제 한사람의 양심이 호소해 오는 것입니다. 그 가책에 의해 다그칠 수있는 것에 의해 죄의 의식이 생기고 죄의 자각이 생겨나게 되는 것입니다. 그것은 정상인 상태입니다. 드디어 정상적으로 되돌아온 것입니다.

그리고 정상적으로 되돌아온 노인에게서 젊은이까지 떠난것입니다. 그들은 자신들이 죄가 없다고 생각하고 있었기 때문에 이 여자를 데리고 올수 있었던 것입니다. 자신에게 그런 적합한 죄는 없다. 자신은 그런 간음을 한 적은 없다. 그들은 돌로 쳐서 죽여도 되는 하나님앞에서 심판되는 죄도 없다고 당당하게 이 여자를 데리고 온것입니다. 그러나 "죄 없는 사람이 돌을 던져라" 라고 말한 순간 아무도 죄가 없다고 하는 자신만만하게 손을 드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그 안에서 예수를 재판하고 죽이고 잡으려고 거짓말을 해서라도 율법의 그 증인을 무시해서라도 잡으려고한 율법학자, 바리새인, 의원 마저도 떠난 것입니다.

사람들은 죄가 없는 예수를 고소하려고 하고 자기들에게는 죄가 없고 이 예수에게는 하나님을 모독하고 죄가 있다. 그들은 하나님을 모독하지 않았다고 말 하지만 예수님이 "죄가 없는 사람이… 라고 말씀하신 순간 그들은 떠나지 않고는 있을수 없었습니다. 그들 또 한 자기자신의 양심이 죄가 없다고 말하는 것은 절대로 말할수 없었습니다. 그런대 그들은 예수를 고소하려고 한 것이 무엇입니까? 예수에게 고소 할 것을 있져버린 것입니다. 이것이 양심입니다.

그러나 칼빈(Calvin)은 여기를 이렇게 해설하고 있습니다. 『죄의 의식, 죄의 자각과, 죄의 회한은 하늘과 땅만큼 다르다. 』 고 그들은 죄의 의식, 죄의 자각이 있었을 지도 모르지만 그 끝에 무엇을 했는가? 하나님에게서 벗어나 떠나갔습니다. 의기 소침하고 낙담하고 자신의 죄 때문에 떠나간것입니다. 이것이 죄의 의식이며 죄의 자각입니다. 그러나 죄의 회한이 아닙니다. 회개가 없어습니다. 만일 회개하고 있다면 그들은 거기를 떠날수는 없을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드디어 양심이 정상적으로 되돌아오고 현실이 보이고 진실이 보이고 자신의 죄가 보인 것입니다. 그러나 의식은 했지만 하나도 회개하는 의향이 없으므로 거기에 머물지는 않았습니다. 왜? 그들은 거기에서 하나님부터도 사람들로부터도 벗어나고 싶은 선택을 한것입니다.

자신의 죄를 숨기고 자신의 죄가 드러나오는것을 피하고 그리고 하나님앞에서도 사람앞에서도 자신의 죄를 인정하는것을 피하기 위해서 숨기기 위해서 현실로 부터 도망쳐 간것입니다. 그래서 칼뱅(Calvin)은 이렇게 말합니다. 「죄의 의식과 죄의 회한은 하늘과 땅만큼, 천국에 가고 지옥에 갈 만큼의 차이가 있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 여자는 이곳에 남겨진 것입니다. 이 여자만이 남겨진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이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여자여, 너를 고소하던 사람들이 어디 있느냐? 아무도 너를 정죄하지 않았느냐?" 라고 말씀하셨지만 이 여자는 이제 "아무도 없습니다". 라고 합니다. 이 여자 한 명 남겨 진것입니다.

이 여자를 처음에는 강제적으로 데려온것입니다. 압박을 줘서 범죄자 처럼 빼 올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그녀를 묶고 있었던것은 율법이며 그녀를 묶고 있었던 것은 모세의 가르침으로 유대인의 율법이었던 것입니다. 그녀는 그 율법에 붙들어 매여서 여기에 데리고 올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양심의 가책 어쩔수 없어진 노인에게서 부터 시작하여 떠어나간것입니다. 이 여자도 절대로 도망칠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보통 인간은 여기서 도망칩니다. 왜냐하면 자신을 이제 아무도 재판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아무도 자신을 심하게 정죄하지 않고 있고 이제 이 여자를 사형 하라고 말하는 사람도 없습니다. 그래서 여자가 여기에서 도망치는 것은 전혀 문제가 없었습니다. 왜 여자는 거기에 남겨저 있었다고 성경에 씌어졌는가? 이제 이 여자에게 관련하여 사람들은 이 여자의 죄를 세세하게 다루고 조사하고 그리고 재판이 결여되는 정도의 여유가 없어진것입니다. 왜? 자신의 죄로 힘겨웠습니다. 자신의 죄가 힘겨워서 이 여자에게 상관할수 없게 되고 그만큼 양심의 가책이 있어 양심적으로 이제 이 여자를 사형을 정할수도 없을 정도로 낙담하고 상관할수 없게 되고 이 여자를 버린것입니다.

이것이 지금 버렸다는 표현입니다. 그리고 이 버려진 여자는 율법에 붙들어 메이지 않고 사람에게서 호소 할수 있었기 때문이 아니고, 죄의 재판을 하기 위해서 무리하게 데리고 온것이 아니고, 자신의 의지로 여기에 남아 있었던 것이지만, 이것은 이 여자가 자신의 죄의식을 자각해서 여기에 있었던 것이라고는 생각되지 않습니다. 이것은 예수 그리스도가 호소하는 측으로 변한 것입니다. 인간이라고 생각해서 오고, 재판관의 한사람이라고 생각해서 오고, 예언자의 한사람인가라고 생각하고 예수앞에 온 사람들은 예수를 고소해서 죽이려고 한것입니다. 그러나 오히려 반대로 예수에게 호소 받아버린 것입니다. 반대로 예수가 심판하는 측에 가버린것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권위가 나타난 것입니다. 인간의 상식이라든가, 인간의 룰이라든가, 인간의 무엇인가로는 없습니다. 이제 이 여자는 붙들어 있는 상태입니다. 자신의 죄를 본 순간 하나님앞에 나타나서 꼼짝도 못하는 상태입니다. 이 여자 스스로 회한의 생각을 가져서 여기에 있었다고 하는것 보다는, 죄를 가진 사람이 하나님 앞으로 나갔을 때에 결코 달아날수 없는, 결코 심판을 모면 할수없는 정도에 이 여자는 이제 심하게 붙들어 꼼짝도 못합니다. 왜? 여기에 있는 것이 갑작스럽게 하나님의 권위, 하나님의 힘을 느껴 버리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이 무엇을 말할 것인가, 어떠한 심판을 내릴 것인가? 이 여자는 단지 그것을 기다리는 이외에 도망갈 길이 없는 정도에 심하게 붙들어 매여 하나님앞 심판에서 도망칠수 없는, 하나님과 1대1로 마주 향해버린 그러한 인간은 가령 어떤 죄인 이라도 도망칠수 없습니다. 왜? 거기에 하나님의 힘이 일하시기 때문에 하나님의 힘이 억지로 얽매여버리는 것입니다. 여기는 죄를 재판하는 그 현장에 가버리는 것입니다. 이 여자는 양심이 다 넘어버리고 있는것입니다. 이제 하나님의 앞에서 도망칠수없는 상태입니다. 왜? 1대1로 만나버렸기 때문입니다. 인간 예수가 아니고 하나님께서 죄를 심판하시는 편에 계신 하나님의 권위앞에서 이 여자는 일절의 꼼짝도 못하게 된것입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 "아무도 너를 정죄하지 않았느냐?" 여인이 대답하되, "아무도 없습니다". 예수께서 "나도 너를 정죄하지 아니하노니 가서 다시는 죄를 범 하지 말라". 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나 여기에서 중요한것은 예수님이 이 여자의 죄를 용서하신 것은 아닙니다. "나도 너를 정죄하지 않는다".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리고 다시는 죄를 짓지 마라". 예수님은 정확하게는 이렇게 말씀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당신의 죄가 용서되였다고는 말씀하시지 않으셨습니다. 『지금은』입니다. 『나의 때가 오지않고 있기 때문에』입니다. 이것이 정확한 대답입니다. 예수님에게서 용서된 것이 아닙니다, 이 여자는 유예가 주어진 것 뿐입니다. 집행 유예를 붙여진 것 뿐입니다. 시간을 연장시켜진 것 뿐입니다. 그리고 그 집행 유예의 기간에「죄를 범해서는 안됩니다. 」라는 조건입니다. 계속해서 이 죄를 범한다면 집행 유예는 없어지기 때문입니다. 당연한 일입니다.

감옥에서 나가서 가석방된 사람이 죄를 지면 이제 두번 다시 가석방은 없습니다. 유예가 없어지는것과 같습니다. 이 여자는 가석방이었던것입니다. 석방되어서 완전히 죄를 용서되어, 천국애 간다는 보증을 받은것은 아닙니다. 가석방, 유예가 주어진겄입니다. 그 동안 죄를 범하지 말라고 이것이 예수님이 이 여자에게 알려주신 말씀이었던 것입니다.

이것이 지금 우리의 시대에 크리스찬에게 먼저 주어진것입니다. 우리들은 언젠가 예수님앞에서 1대1로 당신을 재판하는 사탄이나 어두움의 힘도 없고 이 세상의 율법도 없는 그런 예수님과 나만이 마주 향한 심판의 자리가 반듯이 오는 것입니다. 그때는 집행 유예는 없습니다. 지금 우리들에게 주어진 시간이 집행 유예입니다. "나는 지금 심판하지 않는다". 예수그리스도의 십자가 피는 당신을 지금 재판하지는 않습니다. 당신은 그것을 믿습니다. 그러므로 당신은 이제 죄를 범해서는 안됩니다. 이것이 지금 우리들 크리스찬이 심판의 자리에 가기 전에 주어져 있는 집행 유예입니다. 이 유예의 사이에 죄를 다시 범하면 안됩니다. 그리고 진실된 회개를 해야합니다. 바뀌는것입니다. 완전한 인격의 변화입니다. 완전한 다른사람이 되는 완전한 새로운 사람이 된다. 이것이 회개입니다.

그래서 칼빈(Calvin)이 이렇게 말하는 것입니다. "죄의 자각과 죄의 회한하는것은 하늘과 땅 만큼의 차이가 있다". 천국과 지옥의 차이입니다.이것. 이 여자가 들은것입니다. 지금은 재판하지 않습니다 지금은 교회에서 내쫓지 않습니다. 지금은 머무는것도 허용합니다. 그러나 "지금" 입니다. 그러므로 죄를 범해서는 안됩니다는 완전히 절대로 범해서는 안되다고 하는 것입니다. 회개는 완전히 다른사람이 된다는 것입니다. 이제 두번 다시 하지 않는다. 두번 다시 해서는 않된다.

죄의 의식에 시달려 다른 사람에게 지적받는것이 초라해서 이제 그만두지 않으면은 예수님에게서 떠나간 저 군중과 똑같습니다. 결코 회개한것이 아닙니다. 회개한다고 말하는 것은 아까 말한것처럼 자기를 아는 또한명의 자기. 자기를 더 알고 있는 제안에 성령님은 절대로 죄를 용서하지 않습니다. 죄와 교차하는 적이 없는 분이기때문에 제 안에 있는 성령님은 제 양심을 언제나 쓰는 것입니다. 말씀만을 가지고입니다. 성경의 말씀만을 가지고 이렇게 해서는 안된다고 하는 또 한명의 자기에게 호소하는 것입니다. 그때에 그만두지 않는 죄는 재판때에 미루어집니다. 이 집행 유예때 그만두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자신이 주춤했으니 회개했고 자신이 눈물로 울었기때문에 회개했다고 생각하는 것은 큰 잘못입니다. 그것은 여기에서 벗어나고 예수앞에서도 사람앞에서도 죄를 인정하지 않은 단지 의기 소침한 군중에 한명입니다. 왜? 아직 그 죄를 품고 그만두자고 하지 않고 있기 때문입니다. 아직 그 언어, 행동에 계속 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여기에서의 회개는 「하지 않겠습니다.」 라고 말하는 말만이 아니고 실천의 행동변화를 말하고 있는것입니다. 실제의 행동변화는 실제적인 의지, 절대적인 결심이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회한입니다. 이것이 정말로 자신의 죄가 용서 된 사람이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정말로 사막까지 떨어지고 물 한방울이 없는 어둠속으로 자신의 죄로부터 도망치지 않고 예수에게 이것을 정말로 용서 받자고 정말로 발버둥쳐 괴로워한 사람의 결과입니다. 의기 소침하고 사람들로부터 지적받지 않으면 자신의 죄도 모른다고 하는 인간은 이 회한이 있을리가 없는것입니다. 예수님쪽에 갈수가 없습니다.

이 간음하다 잡힌 여자의 현장이 요한의 복음서에 왜 갑자기 삽입되어 갑자기 요한이 안쓴 이야기가 생긴것인가? 예수님께서는 성령님께서는 우리에게 "알아라" 말씀해 주시는 것입니다. 이 집행유예의 시간에. 왜 그만두지 않습니까? 하나도 회한이 없습니다. 크리스찬에게 있어서 죄의 허락, 죄의 회개, 이것이 은혜의 교리입니다.

사도바울이 말한 이 은혜의 교리는 필사적으로 목숨을 걸었습니다. 목숨을 건 교리입니다. 그만큼 혼합물이 들어가서는 안되는 것입니다. 이 율법학자들처럼 율법에서는 이렇게 말하고 있다고 말하면서 또 한쪽의 율법을 지키지 않습니다. 이렇게 혼합물이 들어간 말씀은 아무런 힘도 없습니다. 예수앞에 데리고 온 여자가 무엇을 보는 것입니까? 하나님의 절대적인 심판이에요. 절대로 도망칠수 없는 하나님의 심판앞에 저 간음의 현장 여자는 무슨 일이 있어도 도저히 움직일수 없습니다. 이 예수그리스도만이 죄를 용서하는 권위를 가지고 그리고 죄가 없는 사람이 그녀를 죽여라라고 말했을 때, 전원 떠나가버린 것입니다. 예수그리스도만이 남은 것입니다. 왜? 나만이 죄를 용서할수 있는 절대적인 힘이라고 하는 선언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만일 예수그리스도도 죄를 범하고 있다면 자신도 떠나섰을 것입니다. 여기에 남은 것은 죄가 없는 유일한 분. 나는 성스러운 맑은사람이며 재판하는 입장에 서는것을 말하는 압도적인 "에고 에이미" 입니다. "나다" 입니다. 전지전능의 창조자 주이신 하나님의 하나님, 나야말로가 유일한 하나님이 나에게 죄가 있을리가 없다. 고 선언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이 쓰는 사람을 아니고 내가 정하는 죄를 심판하는 것이다. 여자는 움직일수 없었습니다. 절대적인 심판자입니다. 절대적으로 죄와 대립하는 이분앞에 갔을 때에는 이 여자와 같은 상태입니다. 아무도 움직일수 없는 아무도 변명할수 없습니다.

>"어쩔수 없었어요 성격이기 때문에, 감정이 끓어 올랐기 때문에." 이 변명은 심판앞에서는 변명이 안된다. 이 간음한 여자는 아무 것도 말할수 없었습니다. 예수님은 『절대적인자』 이심니다. 이 하나님의 앞에 나가면 그 누구나 피조물은 이렇게 되는 것입니다. 누구나 다 입니다. 천군천사로마저 하나님앞에서는 벌벌 떨릴수 밖에 없는것입니다. 하나님과 피조물의 차이가 얼마나 뚜렷하게 밝혀지는것인가? 하나님과 피조물의 차이가 이렇게 굉장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들은 하나님 앞에서 태연하게 경솔한 말들을 하는 것입니다. 이 율법학자들 처럼입니다.

50년전의 미국은 정말로 선교하는 나라였습니다. 그리고 다섯명의 선교사가 에콰도르에 가서 순교한 이야기는 50년전의 미국신문에 보도 되었습니다. 그들은 공통점이 있었습니다. 다섯명 모두 일류대학을 나왔고 다섯명 모두 좋은 가정에서 자랐습니다. 다섯명 모두 결혼해서 아내가 있고 아이들도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단지 창에 찔려 죽음을 당한것이 아니고 끔찍하게 몸이 잘리고 손과발이 분해되는 비참한 고문한 끝에 죽었습니다. 이것이 미국의 신문에 난 것입니다. 그리고 그들은 당연이 그 당시 에콰도르가 원주민이 기독교는 커녕 우상숭배하는 나라였기 때문에 기독교가 들어 갈수있는 상태가 아니기 때문에 언론에서는 그들의 가족에게 반대와 혹평을 한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이렇게 말한 것입니다. "영원한 것을 얻기위해, 영원하지 않은 것을 버리는 자는 절대 어리석은 자가 아니다." 라고 말한 것입니다. 그리고 그들이 죽고 아내들은 슬퍼했지만 아내들은 한 두살밖에 안 되는 어린아이들을 데리고 남편이 순교한 에콰도르에 들어간 것입니다.

지금은 여러 교회가 에콰도르에 들어가고 기독교인 크리스찬이 많이 생겼지만 50년 전에는 그러한 나라가 아니었던 것입니다. 50년전에 선교사들은 이러한 고난을 맞고 있었던 것입니다. 신체가 분해되였어도 그리고 아내들은 두려워 할것 없이 어린아이들의 손을 이끌어서 에콰도르에 들어간 것입니다.

그들은 이렇게 말하는것입니다. 마지막으로 "예수님께 받은것들을 제가 에콰도르의 원주민에게 돌려줘야 한다." 그들이 간 이유는 사는 보람 때문에서도 흥분이나 감상적인 것도 아니고 뭔가 희생정신이나 옳은 일을 하고 싶었기 때문이 아니고 내가 용서 받았다면 그들도 용서 받아야 한다입니다. 이것이 진실의 하나님의 사랑, 그리고 이웃 사랑입니다. 우리 크리스찬은 자신의 분량을 넘고 멋진 이상을 내걸어서 사는것이 아니라 생활속에서 죄가 용서된 하나님의 베품과 사랑을 감사하고 기뻐하면서 사는 것입니다. 환경이 힘들기 때문에라고 슬퍼하며 고개를 숙여서는 안됩니다. 예수님에게서 자책하는 마음에서 벗어나서는 안됩니다. 유일하게 우리들의 죄를 용서 할수있고 구원해 주시는 주인이십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