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meba Ownd

アプリで簡単、無料ホームページ作成

Yokohama Glory Church

요한복음 7장25-36절

2018.02.14 15:15

~ 예루살렘 사람 중에서 어떤 사람이 말하되 "이는 그들이 죽이고자 하는 그 사람이 아니냐? 보라 드러나게 말하되 그들이 아무 말도 아니하는도다 당국자들은 정말로 이 사람을 참으로 그리스도인 줄 알았는가? 그러나 우리는 이 사람이 어디서 왔는지 아노라 그리스도께서 오실 때에는, 어디서 오시는지 아는 자가 없으리라 하는지라." 예수께서 성전에서 가르치시며 외쳐 이르시되, "너희가 나를 알고 내가 어디서 온 것도 알거니와 내가 스스로 온 것이 아니니라. 나를 보내신 이는 참되시니 너희는 그를 알지 못하나 나는 아노니, 이는 내가 그에게서 났고, 그가 나를 보내셨음이라" 하시니 그들이 예수를 잡고자 하나 손을 대는 자가 없으니 이는 그의 때가 아직 이르지 아니하였음이러라. 무리 중의 많은 사람이 예수를 믿고 말하되 "그리스도께서 오실지라도 그 행하실 표적이 이 사람이 행한 것보다 더 많으랴?" 하니, 예수에 대하여 무리가 수군거리는 것이, 바리새인들에게 들린지라. 대제사장들과 바리새인들이 그를 잡으려고 아랫사람들을 보내니,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너희와 함께 조금 더 있다가, 나를 보내신 이에게로 돌아가겠노라. 너희가 나를 찾아도 만나지 못할 터이요, 나 있는 곳에 너희가 오지도 못하니라." 하시니 이에 유대인들이 서로 묻되, "이 사람이 어디로 가기에 우리가 그를 만나지 못하리요, 헬라인 중에 흩어져 사는 자들에게로 가서, 헬라인을 가르칠 터인가? 나를 찾아도 만나지 못할 터이요, 나 있는 곳에 오지도 못하리라 한 이 말이 무슨 말이냐?" 하니라 ~

지금 초막절의 축제가 한창입니다. 모두가 예수님은 누구인가? 엘리아인가, 예언자인가 혹 가짜인가, 사단의 쓰임인가, 그렇지 않으면 하나님을 모독하고 있는 것인가, 하나님의 천사인가, 라고 모두가 수군거리고 있을 때에 예수님은 계속 말씀하시고 있는 것입니다. 빨리 잡아서 사형을 하는것이 능사라는 소문을 듣고 있었는데도 아무도 예수님을 잡을 수도 없고, 예수님은 성전 뜰에서 외쳐 큰 소리로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이 때, 예루살렘 사람 중에는 이렇게 말 하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이 사람이 사람들이 죽이려고 하는 그 사람이 아닙니까? 그러나 보라 그가 당당하게 사람들 앞에서 말 하여도 사람들은 아무도 이 예수그리스도를 멈추지 않고 붙잡지도 못한다. 혹시 지도자들도 이 사람을 그리스도(Christ)로 알고 있는 것이 아닌가? 이렇게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말씀하시자마자 붙잡힌다고 생각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예루살렘 성전에 예수님께서 들어가서 말씀하기 시작한 순간, 예수님이 죽음을 당한다고 말하는 소문을 듣고 있었는데도, 죽음을 당하지 않았으며, 붙잡히지도 않았다. 라고 바리새인들, 대제사장들 율법학자들에게 이 메시야,구세주, 하나님의 아들로 인정합니까? 라고 말하고 있는 중입니다.

<br /더

그러나 히브리어의 원본에는, 그리스도인 줄 알았는가? 로 끝나고 있지 않습니다. "아니, 그리스도인 줄 알고 있을 리가 없다." 라고 하는 부정 문장으로 끝나고 있습니다. 일본어에서는 그리스도인 줄 안 것일까? 라는 애매한 말로 끝나고 있지만 본문은 "아니, 알 리가 없다."라고 하는 뉘앙스로 이야기 하고 있는 것입니다. 왜 알 리가 없는가?라고 말하고 있는가 하면,

~그렇지만, 우리들은 이 사람이 어디에서 왔는가를 알고 있다. 그러나 그리스도(Christ)가 오실 때, 어디서 오시는지 알고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는 것이다.」~

유대인속에서 메시야 구세주가 오는 것을 알고 믿고 있었던 것입니다. 예언도 읽고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이 오는 것은 소문이라도 알고 있었고 성경에서도 알고 있었다. 그러므로 메시아가 오는 것은 의심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그 메시아가 돌연 드러나셨습니다. 이 지상에 혹은 천국에 혹은 어딘가에 처음부터 하나님과 함께 계셨지만 돌연 사람 앞에 나타나 돌연 기적을 행하고 모세나, 엘리아, 엘리사에게 돌린 것 같은, 그 이상의 기적을 하는 것이 메시아라고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의 출신지는 갈릴리이고, 아버지는 요셉이며 어머니는 마리아로, 목공의 아들이고, 그리고 그는 어디에서 왔는지 누구나가 알고 있었습니다. 그의 형제들까지 알고 있다. 그러므로 그가 메시아가 아니다 라는 판단을 하는 것입니다. 그가 메시아라면 이런 일상을 보낼 리가 없다. 메시아라면 더구나 목공의 일을 할 리가 없다. 메시야라면 이런 밥을 먹거나 남들 앞에서 뭔가 일상의 생활을 보낼 리가 없다. 라는 그들의 판단으로 메시아 아니다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메시아가 아니고, 하나님도 아니고, 하나님이 이런 일상을 보낼 리가 없고, 그 이상으로 갈릴리 출신 일리가 없다. 라고 하는 판단하므로, 그들은 예수그리스도를 하나님으로 인정한 것인가, 아니 그럴 리는 없다. 라고 군중은 지금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 목소리를 듣고 있습니다. 거기에서 말씀중에 예수님은 돌연 큰소리로 외치셨다고 말씀하십니다.

~큰소리로 외쳐 말씀하셨다. "너희는 나를 알고 있고 또 내가 어디에서 왔는지도 알고 있다. 그러나 나는 스스로 온 것이 아니다."~

라고 계속되는 것이지만, 여기에서 예수님은 "너희는 나를 알고 있고, 또 내가 어디에서 왔을지도 알고 있다"라고 쓰여져 있지만, 히브리어의 원본은 이렇지 않습니다. "너희들은 나를 알고 있는 것인가? 그럴 리는 없다." 입니다.

존 칼빈는 여기를 이렇게 번역을 하면서, 예수그리스도는 "여러분들은 나를 알고 있다고 생각하는 것인가?" 의 다음, 코로 비웃는다 까지의 표현을 합니다. 그 정도로 예수님이 너희들이 나를 알 리가 없지 않은가, 라고 하는 표현을 해 버리는 것입니다, 번역할 때에 일본어로는 이런 식으로 예쁘게 번역되고 있지만 진실의 원본은 여기는 부정 문장입니다. "너희들은 나를 알고 있다고 말하는 것인가?" 내가 말하는 것은, 예수님이 지금 반론한 것은, 나는 갈릴리 출신 하나님이 아니고, 요셉과 마리아가 등록했을 때에, 마구간에서 태어난 장소는 베들레헴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은 정말로 베들레헴에서 태어났기 때문에 갈릴리 출신인 하나님이 아닙니다. 물론 갈릴리에서 자란 것은 확실합니다. 그러나 출신은 베들레헴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여기에서 말씀하시고 있는 것은 나는 갈릴리 출신 하나님이 아니고 베들레헴 출신의 하나님이다 라고 말하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런 대답을 예수님은 하지 않고 있습니다. 다음 읽으면 알수있다.

~그러나 나는 스스로 온 것이 아닙니다. 나를 보낸 분은 진실입니다. 여러분들은 그분을 모릅니다.~

갈릴리라든가 베들레헴이다든가의 변명을 예수님이 하고 싶은 것은 아닙니다. 나는 어디 출신인가? 목공의 자식으로 보여도 정말은 성령님으로 태어났다. 처녀 마리아에게서 태어났다. 라는 설명은 하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은 그런 것을 말할 작정은 하나도 없습니다. 예수님이 여기에서 말한 것은 비웃고 있다라는 표현은 가깝습니다. 너희들은 나를 알고 있다고 말하는 것인가? 웃어버려요. 그럴리가 없지요? 왜? 나는 너희들이 모르는 하나님에게서, 보내져 왔다 •••. 천국에서 왔다고 설명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갈릴리도 아니고 베들레헴도 아니고 나는 하늘에서 내려가 왔기 때문에, 너희들이 그것을 알고 있을 리는 없다. 그리고,

~나는 그분을 알고 있습니다.~

나는 하나님을 알고 있다. 왜냐하면 "나는 하니님에게서 왔다. 하나님이 나를 보낸 것이다." 와 지금 반론하고 있는 것입니다. 갈릴리 출신이다 든지, 베들레헴 출신이나 든지, 내 부모 이름이 이렇다, 저렇다 말씀하시지 않습니다. 예수님은 "나는 천국에서 보내셔서 왔는데 너희들은 천국도 모르고 그 장소도 모르고, 하나님도 알고 있을 리가 없다. 당신이 모르는 하나님에게서 보내셔서 왔기 때문에, 너희들이 나를 알 리는 없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유대인들에게는 자존심이 용서못할 정도로 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에게서 선택받은 선민의식이 강한 유대인들은 더군다나 여기에서, 그것을 논쟁하고 있는 것은 유대인 속에서도 예루살렘 출신입니다. 이방인도 아니고, 이민자도 아니고, 해외에 떨어진 유대인이 말하고 있는 것도 아니고, 지금 이것을 말하고 있는 것은 예루살렘의 성전 속에, 다윗의 자손이라고 자랑하는 하나님에게 뽑힌 유대인 속에 유대인, 혈통 속에 혈통, 피를 계승한 뽑힌 국민이라고 하는 자존심을 가지고 예수의 설교를 듣고 있는데, 너희들은 하나님을 모른다고 말을 듣고 있습니다. 유대인들에게 있어서 이것은 분노 이외의 그 아무것도 아닌 것이라고 말을 듣는 것입니다.

왜 입니까? 하나님을 알고 있는 것은 나 밖에 없다는 자존심이 있는데 예수님이 "너희들은 하나님을 알지 못한다" 라고 하는 반론을 해 버리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때에 이들은 얼마나 화를 냅니까. 진짜로 예수를 죽이려고, 성전 경비대를 보내서 붙 잡으려고 합니다. 비뚤어 짐과 질투심으로 예수님을 붙잡으려 합니다. 그들은 여기에서 베들레헴 출신이라든지 아무 것도 말하지 않습니다. "너희들은 절대로 나를 모른다. 내가 어디에서 오고 어디로 가는지 지금 무엇을 하고 있는지 너희들은 알수가 없다."

왜? 너희들은 처음부터 하나님을 알지 못한다. 이것은 크리스찬들에게 하는 말 입니다.

우리들은 교회에 다니고 있습니다. 십일조 헌금도 하고 있습니다. 일요일 매주 예배하고 있습니다. 그 외에 기도 모임이다, 무엇이다, 또 사람들에게 예수님을 전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이 크리스찬들에게 무엇을 말하는 것입니까? "여러분들은 처음부터 나를 알 수 없다" 입니다. "성경를 읽어도 나를 찾을 수는 없다" 입니다.

~거기에서 사람들은 예수를 잡으려고 했지만 그러나 아무도 예수에게 손을 댄 사람은 없었다. 예수의 때가, 아직 와 있지 않았기 때문이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매달리시는 때가 아직 되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에 시간을 집중하고 여기에 초점 맞추어 행동을 취하고 있기 때문에, 여기서 예수님이 잡히지 않는 것은 예수님의 계획 가운데입니다. 그러므로 누군가가 죽이려고 아무리 생각해도, 힘센 로마 병사가 예수님을 잡으려고 해도 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아직이라고 말씀하시면 아직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때가 아직 오지 않왔기 때문에 어떤 인간도 얼마나 죽이고 싶어도, 얼마나 붙잡으려고 해도, 얼마나 시기해서 화를내고 있어도, 예수님의 때가 올 때까지 아무도 예수님를 붙잡을 수는 없습니다.

~군중 가운데 많은 사람이 예수를 믿고 말했다. "그리스도께서 오셔도 이분이 하고 있는 것 보다도 많은 표적이 행하여질 것인가?"~

그러나 어떤 일부분의 유대인들은 이분은 메시야이 틀림 없다. 구세주가 틀림 없다.

지금까지 이런 기적을 행하는 사람은, 어느 유대인은 안에서는 나가지 않았습니다. 무리중에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이 행하신 표적으로 정말로 그리스도(Christ)로 인정하는 것입니다.

~바리새인은 군중이 예수에 대해서 이러한 것을 수군거리는 것을 들었습니다. 그래서 대제사장들과 바리새인들이 예수를 잡으려고 아랫사람들을 보냈습니다.

드디어 예수님을 붙잡으려고 성전 경비대까지 동원하는 것입니다.

~거기에서 예수님은 말씀하셨습니다. "나는 잠시동안, 너희와 함께 있다가 나를 보낸신 분에게 갈 것이다. 너희가 나를 찾을 것이나, 찾아 내지 못할 것이며, 내가 있는 곳에 너희는 올 수도 없다."~

예수님은 이러한 것입니다. "아직 복음은 유대인에게 말해 전해지는 시간이 남아있다. 그러나 어느 때부터는 당신들은 내가 있는 곳에 올 수 없다." 이것이 어떤 의미인지 아십니까? 어느 시간이 오면, 여러분들은 죄에 의해 죽을 것입니다. 여러분들은 그 시간이 되면 재판받게 될 것입니다. 여러분들은 결코 천국을 보는 것도, 하나님을 볼 수도 없습니다. 그 죄에 의해 여러분들은 재판을 받게될 것입니다. 라고 경고를 주고 계시는 것입니다. 아직 유대인에게 복음은 전해지고 있습니다. 아직 유대인의 때는 와있지 않습니다. 그러나 때가 이른 순간에 여러분들은 반드시 죄에 정해진다. 라고 반론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 "여러분들은 결코 내가 있는 곳에 올 수 없다."라고 들은 순간,

~거기에서 유대인들은 서로 이런 말을 하였습니다. "이 사람이 어디로 가려고 하기에 우리가 자기를 찾아내지 못할 것이라고 하는가? 그리스인 중에 흩어져 사는 사람들에게로 가서 그리스인을 가르치려고 하는가? "너희는 나를 찾을 것이나 찾아 내지 못할 것이며, 내가 있는 곳에 너희는 올 수도 없다" 라고 말한 것은 무슨 뜻인가?"~

유대인들은 어차피 예수님이 무엇을 말씀하고 있는지 모릅니다. 이것은 무엇입니까? 하나님을 모른다는 증거입니다. 하나님께서 어디에서 오시고 어디로 가시는 것인가? 모른다고 말하는 것은 스스로 폭로해버린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그 때가 되면 너희들은 결코 나를 찾는 것도, 보는 것도, 들어오는 것도 내가 가는 장소에 가는 것도 절대로 할 수 없다. 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이렇게 말하는 것입니다. "이 사람은 이제부터 그리스의 여러 도시 속에 가는 것인가?"

지중해 연안에 살고 있는, 로마, 소아시아, 지금으로 말하는 터키 그리고 이집트, 그 지방에 흩어져 있는 유대인들이 있습니다. 거기에 그 흩어져 간 이민의 유대인, Diaspora에 예수는 전하려고 하고 있는 것인가? 혹은 그리스인, 이방인 속에 가려고 하고 있는 것인가? 라고 그들은 "갈 수 없다" 라고 일컬어진 순간, 천국이 아니고 그 쪽의 방향으로 생각이 가버리는 것입니다. 왜 그것을 말한 것인가 하면 진실의 예언자는 먼저 유대인에게 인정을 받는다고 그들은 그렇게 생각합니다.

유대인에게 인정을 받지 않은, 덜 익은 거짓예언자는 이방인에게 가는 수 밖에 없다 라는 판단입니다.

그리고 그들은 예수는 순수한, 혈통이 옳은 유대인 안에 있는 유대인, 예루살렘에 살고, 어디에도 이민 나가지 않은 다윗의 도시에 살고 있는 유대인들이 받아들여지지 않는 복음이라서, 이방인에게 가는 수 밖에 없다. 그리고 유대인이 이방인에게 가는 것은 더럽혀진 것으로 죄인이 이방인에게 가는 것처럼 말하는 판단까지 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들에게 받아들여지지 않은 예수는 이민, 혹은 외국인에게 전하는 수 밖에 없을 것이다. 라고 말하며 무시해 버리는 말 입니다. 그러나 이것이 무서운 예언으로 되어버리는 것입니다.

바울은 처음에 유대인에게 전하려고 노력한 것입니다. 처음에는 유대인들에게 예수그리스도를 전한 것입니다. 바울은 유대인을 구하려고 필사적이었습니다. 그러나 어느 교회도, 어느 하나님의 성전도, 어느 유대인도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바울은 이방인이 있는 곳으로 떠난것입니다. 유대인을 완고하게 하고, 이방인에게 복음을 알린 것은 성령님이었습니다. 그러나 이미 그들 스스로 예언을 해 버린 것입니다. 예수는 우리들 편이 아니고, 이방인에게 간다. 라고 하는 예언을 해 버리린 것입니다. 스스로 죄에 재판되어, 스스로 천국에 넣지 않고, 스스로 예수를 거절한 것을 폭로 해버리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지금 예수님과 유대인과의 논쟁입니다. '메시아' 라고 하는, 이 홀연히 사람 앞에 드러나는, 그 전에는 가려져 있었다. 라고 말합니다. '메시아'론은… 소위 하나님이라고 말하는 것은 모세라든가 엘리아라든가 엘리사에게 보여준 그 기적, 대단한 초자연적인 초월적인 위대한 능력을 가져서 인간에게 드러나는 것도 있지만, 성령님이 안에 계시는, 생활 속에 숨어져 있는 예수라는것이 존재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 메시아를 진지하게 바라며 기다리고 있으면, 생활 안에서 메시아를 찾을 수 있는 것입니다. 목공의 아들이더라, 요셉의 아들이라든지, 누가 어느 출신이든 진짜 메시아를 바라고 있는 사람이라면, 듣고 구별할 수 있고, 그 생활 속에서 예수그리스도를 분별할 수 있습니다. 이것이 진짜 메시아의 모습입니다. 교회안에서 형제,자매라고 말합니다. 이 형제,자매라고 말해지는 원인는 형제나 자매의 뒤에 예수가 있고, 그들의 모습 안에 예수가 있고, 사람안에 예수가 있고, 버림 받은 사람안에 예수가 있고, 무시받는 사람안에 예수가 있고, 그러니까 우리들은 그 형제,자매를 섬기자 라는 것이 형제,자매라고 말해지고 있는 원인입니다. 이것이 메시아를 찾는다고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생활 속에서 예수그리스도를 찾는다고 하는 것입니다. 우리들의 일상, 우리들이 평범한 시시한 나날, 회사나 집이나 전차 안에서나, 버스 안에서, 길가에서 예수를 찾을 수 있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이 진짜로 메시야와의 만남입니다. 돌연적으로 암이 낳아지고, 돌연적으로 기적이 행하여지고, 자기가 하나님께 기도한 기도가 전부 이루워지고, 생활이 지켜지고, 모든 것들이 지켜졌을 때, 대단한 기적만을 일으키시는 하나님이 아닙니다. 그런 것들이 일어나지 않아도, 아무 것도 보이지 않아도, 아무 것도 들리지 않아도, 그런 평범한 매일의 생활에서 그 현장에서 하나님께서는 일 하시고 있습니다. 인간 속에서, 혹은 인간의 세계 속에서 이 것이 정말로 메시야를 바라며 기다리는 사람이 기독교인의 모습입니다. 이 겸손성이 필요합니다.

그럼에도 유대인들은 이 겸손성이 없었습니다. 왜? 모세 오경을 읽고, 아브라함을 읽고, 다윗을 읽고, 엘리야, 엘리사를 읽으면, 유대인에 나타나는 하나님은 굉장한 능력을 가져서 나타나고 그리고 그런 힘이 있고, 이방인의 하나님에게는 흉내도 낼 수 없는, 위대한 이 창조의 힘 하나님은, 유대인만을 선택했다. 라고 말하는 감각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들에게 메시야가 나타난다면 당연히 모세나 다윗이나 엘리야나 엘리사에게 나타난 그 하나님의 모습으로 올 것이다. 왜? 선택받았기 때문에, 이런 평범한 일상 속에서, '하나님이다' 따위는 나타날 리가 없고 그것이 유대인의 '메시아'론 입니다.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당신들은 나를 알 리가 없다." 나는 백성 속에 묻혀 있고, 사람들 속에 존재하고 있다. 이것이 메시아 하나님인데도, 당신들은 그런 것을 볼 수가 없다. 왜? 당신들은 정말로 다른 이방인과 하나도 다름없는 죄인이었는데도, 이방인과 같이 망하는 백성이었는데도, 단지 위대한 하나님의 은혜로 인해 선택해 준 것 뿐인데도 그 것을 잊어버려 '특별' '특수'하다 하나님에게 돌연, 자기만 특별히 다루어진, 그러한 크리스찬이기 때문에 하나님이 나에게는 특별히 일하는 것이 틀림 없다. 그 하나님이외 인정하지 않는 그 하나님이외는 모른다 라고 말하고 있는 이 크리스찬들의 태도입니다.

존 칼빈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우리 인간들이 하나님을 아는 것은, 예수그리스도를 따르지 않고서는 하나님을 알 수가 없다." 만일 예수그리스도를 지나지 않고, 그것을 지나지 않으면서도 하나님을 안다, 알았다고 하는 것은 우상의 하나님이다. 라는 것입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우상의 하나님을 빌고 있게 됩니다. 자기 멋대로 만들어 내고, 자기에게 편리한 기적을 일으키고 힘을 주시는 하나님이 내 하나님이다. 이 유대인과 같은 감각이 크리스찬들 입니다. 그러므로 일상 속에서 형제,자매를 무시하고, 일상 속에서 형제자매 안에 예수님이 함께하시는지 느낄 수도 없고, 일상 속에서 예수님을 완전히 무시를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사람을 정죄하고, 사람을 전도하지 않고, 자기한테만 일하는 하나님을 단지 일생 그냥 가민히 입을 벌리면서 기다리고 있습니다. 그러나 평생 만날 수가 없습니다. 그러면 천국에 들어갈 수 없고 한 평생 예수를 찾을 수도 없습니다. 한 평생,이라고 하기 이전에 하나님의 때가 이르렀을 때에 재판받게 될 것입니다. 돌연 버림받는 것입니다. 돌연 잘라지는 것입니다.

끝없이 기회를 주시는 하나님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때와 그 기간까지 입니다. 복음이 전해져 우리들이 하나님의 은혜, 허락을 받을 수 있는 기간은 주님이 오실 때까지 입니다. 그 이후는 재판이 있습니다.

그러나 유대인와 같이 크리스찬들은 그저 계속 기다리는 것입니다. 기적을 일으켜 주시는 하나님, 나를 특별히 취급해 주시는 하나님, 내 소원을 들어 주시는 하나님, 나를 누구보다 높혀 주시는 하나님, 사람보다 힘을 주는 하나님을 기다리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일상으로 일하시는 하나님을 완전히 무시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때가 올 때까지 입니다.

바울이 아테네에서 죽은 사람의 부활 이야기를 했을 때에, 아테네의 사람들은 이렇게 말하는 것입니다. "그 이야기는 나중에 듣자' 라고 말하며 예수그리스도를 받아들이는 사람이 아테네에서는 적었습니다. 나중에, 좀 더 하면, 내일부터는 열심히 한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정말로 다음이 있습니까? 나중에 언젠가 열실히 한다고 말하는 사이에 하나님의 때가 끝나고 있는 것입니다. 이 경고는 정말 엄격한 경고입니다. 우리들이 상상하는 더 이상으로 두려워하며 긴장하지 않으면, 하나님의 은혜는 지나가 버리는 것입니다.

유대인이 그랬습니다. 하나님의 자비는 있는 때까지 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하나님 스스로 유대인의 마음을 완고하게 하고, 보이지 않는 것 같이, 들리지 않도록, 깨닫지 않도록 한 것입니다. 왜? 그 들이 회개해서 하나님에게 되돌리게 하기 위해서 였다. 라고 성경에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은 때가 오면 그 사람을 회개시키는 것도 용서하지 않지만 더 두려워하는 것은 에서는 팥죽 한 그릇으로 장남의 권리를 야곱에 팔아 버렸습니다. 에서는 나중에 후회합니다. "아 팥죽 한 그릇으로 이런 축복을 그는 놓친 것인가?" 울면서 이를 갈면서 어떻게 하나님께 한번 더 탄원했습니까? "제발 되찾아 주세요. 나야말로 장남이기 때문에. 나야말로 하나님께 선택받았기 때문에. 나에게 장자의 권리를 되찾아 주세요" 라고 말했을 때, 그 아버지인 야곱은 에서를 사랑하고 있었지만 이러한 것입니다. "너에게 줄것은 아무것도 없다. 이제 축복은 남동생 야곱에게 갔다." 하나님께 울어도, 발을 굴러도, 이를 갈아도, 분해도, 슬퍼해도, 두 번 다시 당신에게는 되돌아오지 않는다. 이것이 오늘 경고입니다. 두 번 다시 돌아가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전능하신 능력을 우습게 본 유대인은, 2천년동안 복음이 들어오지 않았습니다. 처음에 유대인에게 복음이 전해졌는데도 처음에 예수그리스도가 온 것은 예루살렘이었는데도, 처음에 들은 유대인이 이것은 하나님이 아니다고 말한 순간에 2천년이나 유대인에게는 복음이 되돌아 오지 않았습니다. 유대인은 나치스 히틀러에게 죽음을 당하지만, 온세계에서 유대인은 구박당하게 되고, 선민이다 한들, 힘이 있다고 한들, 지금도 유대인이 세계를 지배하고 있어도, 복음은 유대인에게 되돌아오지 않습니다. 2천년이나 말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때" 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나중에 다시 유대인에게 기회가 온다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지금이 그 때입니다. 복음은 한번 더 유대인에 되돌아가는 것입니다. 그리고 복음은 한번 더 유대인 속에 들어가는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계획입니다. 하나님은 선택한 백성을 한번 더 불쌍히 여기십니다. 한사람도 지옥에 가는 것을 바라시지 않기 때문입니다.

유대인에게 전해진 예수님은 이방인에게 전해지고 우리들 이방인, 외국인이 구원된 것입니다. 지금 기독교는 유대인이 아니고, 전세계로 퍼진 것입니다. 그러나 유대인에게 복음이 되돌아왔을 때, 이번에는 버림받는 것은 주인을 따르지 않는 완고한 이방인 쪽입니다. 그 때 유대인이 버림받은 것처럼. 아무리 울고 아우성쳐도 이제 예수님은 이 회개를 듣지 않습니다. 그리고 일본에는 아직 은혜가 남아있고 일본에는 크리스찬이 적기 때문에 지금, 하나님께서 이 일본에 새 부흥을 일으키시지만 그것이 끝나면 이것은 유대인에게 되돌아가 버리는 것입니다. 순식간입니다.

우리들은 이 때에 하나님을 만나지 않으면 안되며 이웃 사람도, 지금 서둘려 예수님을 알도록 하지 않으면 안됩니다. 이제 시간이 없습니다. 그리고 이 세상 자체에 시간이 없습니다. 그리고 여러분들 크리스찬이 교회에 다니고, 십일조 헌금을 하고, 기도모임에 나가고, 성경를 읽고, 로이드 존스의 책을 읽은 곳에서, 예수님과 만날 수 없습니다. 그런 것으로 예수님을 만나는 것은 아닙니다. 삶에서, 정말로 평범한 매일 삶속에서 예수님은 숨고 있는 것입니다. 교회 안에서만 예수님이 있는 것은 아닙니다. 교회를 통해서 하나님의 영광이 드러나지만 여러분들 한명 한명이 교회가 아닙니다. 하나님의 영역만이 교회입니다. 그것은 건물 안에서 납부할 수 없습니다. 자만하고 있는 사이에 이 기회를 놓치고 '아 ―나는 예수님을 믿고 교회를 다녔기 때문에 천국에 간다' 라고 폼잡고 있고, 오히려 안주해 버리면 안됩니다. 먼저, 하나님의 집에서 심판이 시작된다고 베드로가 말 하고 있습니다. 논 크리스찬쪽에게 은혜가 가는 것입니다. 우리 크리스찬은 그 거만과, 하나님에게 대한 정말로 실례한 그 태도, 그리고 이웃 사람에 대한 사랑이 없는것, 이웃 사람을 위해서는 아무 것도 하지 않는것, 자기밖에 생각하지 않는 이러한 태도를 서둘러서 고치지 않으면 안됩니다. 오늘 이웃 사람속에, 사회 속에, 회사 속에 있는 예수님을 찾을 수 밖에 없습니다. 그리고 그것을 예배한다고 말하는 것은 이웃 사람에게 헌신했을 때, 이웃 사람에게 예수를 전했을 때, 우리들은 처음으로 하나님 나라에 백성이 된다는 표시가 됩니다.

우리들이 종교인으로 전락한 순간, 당시의 유대인과 같습니다. 하나님 앞에서 겸손하며 두려워하는 사람이야 말로 기독교인이라고 불리는 것입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