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스라엘 역사
「그 때에 가이사 아구스도가 영을 내려 천하로 다 호적하라 하였으니 이 호적은 구례뇨가 수리아 총독이 되었을때에 처음 한 것이라 모든 사람이 호적하러 각각 고향으로 돌아가매 요셉도 다윗의 집 족속이므로 갈릴리 나사렛 동네에서 유대를 향하여 베들레헴이라 하는 다윗의 동네로 그 약혼한 마리아와 함께 호적하러 올라가니 마리아가 이미 잉태하였더라 거기 있을 그때에 해산할 날이 차서 첫아들을 낳아 강보로 싸서 구유에 뉘었으니 이는 여관에 있을 곳이 없음이러라 」 누가 2장 1-7절
성경 누가복음2장에 씌여진 이날이 여러분이 아시는 크리스마스 날입니다. 그리고 서기(西暦)1년의 시작이었다. 이 기원 원년(元年)은 이스라엘의 땅에서 시작된것입니다. 그러면 이스라엘의 역사를 보아갑시다.
이스라엘이 이스라엘이란 나라가 되는것은 기원전 995년경 다윗왕에게 따른 것입니다. 다윗은 두왕국의 중심에 위치하는 엘루사렘의 에브스인을 쓰러뜨려 이스라엘 왕국을 통일합니다. 기원전963년에 솔로몬이 왕국을 이어갑니다. 이때가 이스라엘에 있어서 더 없는 영화(栄華)를 누리며 나라를 번영해가는 역사의 무대에 등장하는 시대입니다. 그러나 솔로몬이 죽은 이후, 북과 남으로 이스리엘이란 나라가 나뉘어지게 되어버린다. 그리고 십부족이 이스라엘의 왕국, 북쪽 왕국으로서 독립하고, 남쪽의 엘루사렘을 중심으로 유대왕국, 남쪽 왕국과 분렬되어갑니다. 이후 두 나라가 활발한 싸움이 일어나, 그 전쟁에 의해 국력이 약해져 갑니다.
북쪽왕국의 수도 사마리아는 기원전 721년에는 앗시리아 의해 함락해 갑니다.
이 땅에서 떼여 놓아진 이스라엘인들은 뒤에 < 상실된 십부족 >이라고 불리우게 된다.
이스라엘국에 남은 이스라엘인과 이민들사이에 태여난 사람들은 사마리야인이라고 불리우게 된다. 이것은 성경에도 자주 나오는 사람들이다. 사마리아인은 피를 섞이거나 이민들의 신앙을 유대교와 혼합해 온것으로, 후에는 유대인들로 부터 차별을 받게 되어 갑니다. 그러나 이스라엘의 평안도 계속되지는 않습니다. 신바빌로니아의 네브카데네자루가 엘루살렘에 침공해 오는것입니다. 그리고 기원전 597년에는 1만명정도의 이스라엘인을 바빌론에 데려가 포로로 합니다. 이것을 첫번째 포수라고 부릅니다. 그리고 두번째의 포수로 기원전 586년에는 다시 바빌론의 왕 네브가데네쟈루에 의해 엘루살렘의 성벽이 무너지고 성전은 완전이 붕괴 되어버린다. 그리고 유대왕국은 완전한 멸망을 겪는것이 였다. 이때도 바빌론의 많은 사람들이 포로로서 잡혀 데려가게 되지만, 이것을 두번째의 포로라고 부른다. 그러나 시대가 바뀌고 신바빌론을 멸망시키려는 페류사야가 역사의 무대에 등장해나온다. 그리고 기원전 538년에 이스라엘인을 석방하게 됩니다. 그리고 엘루살렘의 귀환이 시작되어 가는 것이다. 페르시야왕 다리요스1세 밑에서 기원전 515년에 유대인이 많이 엘루살렘에 되돌아와서 성전을 재건(再建)시킵니다. 제루바베루의 지도밑에 에스라에 인하여 성전을 세우게 된다. 이 시대에 유대교의 모양, 원형이 다지게 되고, 현대의 유대교, 또 유대문화에 직접 영향을 미치게 된다. 그러나 이 엘루살렘의 자유도 다시 상실되어버린다. 기원전 333년에는 마케도니아왕국의 알렉산더로스3세, 소위 여러분이 아시는 바아 그 유명한 알렉산더왕이 베르사야를 타도해간다. 베르샤의 지배는 여기서 종말을 고하고 유대지방도 기리시야인의 지배하에 들어간다. 그러나 알렉산더왕의 기리시야의 자유정책밑에 유대인에 의한 자기의 정치와 종교의 자유는 지켜져 국내의 상업도 왕성해 간다. 이 알렉산더왕의 역사를 살펴봅시다. 그는 기원전 359년 기리시야 북부의 마케도니아에서 태여납니다. 그리고 왕으로서 즉위(即位)되어 가는것입니다. 그리고 혼란히 계속되는 기리시야세계에 큰 개혁의 파도를 불러일으키게 된다. 마케도니아왕국은 기리시야의 아테네에 비교하면 시골이다. 변경<지방의 마을>의 땅이라고도 말해지고 있다. 그러나 거기에서 20살의 알렉산더로스3세가 즉위합니다. 여러분들께서 아시는 바 같이 알렉산더대왕입니다. 하지만 그는 33살때, 열병으로 죽습니다. 그의 왕위는 13년간 계속되는 것이였다. 알렉산드러스는 힐립포스2세의 이남으로서 태여납니다. 그리고 기리시야의 철학자 알리스트텔레스를 가정교사로 맞이한다. 그 유명한 이리스트텔레스는 기리시야의 천문학, 천동설을 세우고, 1500년 지구를 중심으로 태양이 돌고 있다고 하는 틀린 천문학을 내세운 사람이다. 그러나 그 천재 철학자에게 가정교사로서 배운 그는 군인적인 이미지가 강하지만, 그후 죽을때까지 학문을 좋아하고 잘 여겻다고 한다. 같은 년령의 젊은 귀족들과 함께 젊을 때는 공부를 열심히 했다. 무엇보다도 아버지가 나라 조직의 대부분을 만든것으로 알렉산드로스는 매우 혜택을 받은 환경에 있었다고 할수 있다. 그리고 기원전 333년에 그 베루시야에 압승합니다. 게다가 332년에는 애굽에도 원정, 베루시야에 억압되고 있었던 애굽인들은 이것을 크게 환영하고 알렉산드로스는 애굽을 순식간에 점령하고 있었다. 그리고 나일강의 하구에 알렉산드리아란 대도시를 건설해 간다. 그후 알렉산더대왕은 북상하고 바빌론, 스사, 베르시야의 중요한 도시를 함락시켜 간다. 기리시야, 애굽, 소아시아의 광범위를 지배지역에 지배해가는 것이다. 그리고 그후도 아시아, 인도, 중국까지 침공하고 점령해간다.
물론 먼 원정이 되였으므로 처음부터 따라 온 군인의 대부분은 전사하거나 도중에서 놓치거나 한것은 말할것 없는것들이다. 아마 알렉산드로스의 주변에는 베르샤인들이나 애굽인들이, 가득했던 것이지요. 또 알렉산드로스는 인종융합을 목표로 한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우선 반란을 일으키게 해서는 안되였다. 스스로 베르시야의 습관을 따르고 부하들에게도 그것을 강제했다. 이러한 생각을 가진 지배자는 진귀한것이다. 그것은 알렉산드로스의 이상, 기리시야인들에게 있어서는 고통으로밖에 없었던것이다. 베르시야인의 귀부인은 마케도니아의 귀족과의 집단결혼이 행하여져 그가 죽자마자 결혼한 대부분 사람들은 이혼하고, 인종융합의 꿈은 사라지고 말았다. 33살의 젊음이로 그는 역사의 무대에서 종적을 치우게 된것이다. 13년동안 세계의 대부분을 지배한 위대한 왕으로서 지금도 역사에 이름을 남기고 있다. 이스라엘은 이 기리시야의 영향을 아주 크게 받는것이다. 알렉산더왕이 죽자마자 영토는 장군들에 의해 분할되고 그 지배를 둘러싼 싸움이 벌어진다. 유대를 포함하는 시리야지방의 남부를 비롯해 애굽을 지배하고 있었던 프트레마이오스조의 지배를 받게 된다. 기원전 3세기 중반쯤, 애굽의 알렉산드리아에 있어서 성경이 기리시야어로 번역되어 간다. 그리고 이 프토레마이오스조, 이 왕조가 클레오파트라의 선조가 되는것입니다. 알렉산더대왕이 아세아, 아프리카, 유랍을 정복했을 때, 식민지의 각국에 기리시야어의 사용을 강제한것으로써 지중해 세계전체의 공통어로서 기리시야어가 일반화 된다. 덧붙이자면 신약시대에는 이스라엘지방에서 아람어가 채용되어 있었다. 또 신약성경도 기리시야어로 씌여진것에 의해 기독교의 복음은 전 세계로 퍼져갈 계기로 되였다. 이 알렉산더대왕의 지배로 말미암아 전 세계의 기리시야어가 공통어로 되여간것은 역사적으로도 큰 영향을 초래하고 있다. 기원전 175년에 급속히 세력을 확대한것이 공화제 로마이다. 로마가 중동에 있어서의 거대한 세력의 탄생을 우려해서 중동세력에 개입한 탓으로 허약해진 프트레마이오스왕조, 클레오파트라의 선조들은 멸망을 모면하는 것이다. 그러나 유대인도 그냥 지배밑에 가만이 있지는 않했다. 기원전 167년이 되면 제사(祭司)마타티아와 그 아들들이 반란을 일으킨다. 이 싸움을 마카바이 전쟁이라고 한다. 기원전 143년에는 유대인에 의한 독립국가가 회복됩니다. 그 유대의 땅에 엣세네파, 파리새파, 사도가이파가 노하고 그후 역사의 무대에서 유대인속에서는 사도가이파, 파리새파와 대립이 심하게 되어 간다. 그러나 이스라엘이 독립국가로서 역사에 오르는것은 불과 얼마밖에 없었다. 기원전63년에는 로마의 폼페우스가 중동(中東)으로 원정해나간다. 그리고 유대는 이렇게 해서 어느정도 자치(自治)를 인정하면서도 로마의 시리야속주의 일부분으로 되어가는것이다. 여기서 부터는 로마의 지배가 전세계로 시작되어 가는것이다. 그리고 헬로데라는 유대인의 왕으로 칭호가 인정받지만 그것은 기원전 37년에 헬로데가 개조(開祖)되는 헬로데조가 성립되어간다. 헬로데가 기원전4년에 피투성이가 된 평생을 마치고 그 아들에 의해 유대는 또다시 분할통치 된다. 그리고 로마는 유대왕의 칭호를 헬로데의 아들에게는 안주고 결국 다시 유대는 로마의 총독에 직할 지배되여간다. 로마제국이 유대에 종교적권위를 인정하면서도 정치적권위를 부여하지 않했다. 유대는 총독의 지배에 놓여있었다. 그 동안 헬로데대왕의 손자 아그릭파1세가 유대의 통치를 한적도 있지만 그것은 머지 않아 그가 죽은 후, 다시 로마의 총독직활로 되돌아가고 말았다. 역사는 점점 로마로 기울어 간다. 큰 반란이 속발하고, 유대인의 통치의 곤란함에 손을 구운 로마인은 유대지방에서 유대일색으로 일소하려고 꾸미고 유대인이 몹시 싫어하는 베리시테인이라고 이름을 붙이고 그 지방의 파레스타인이라고 이름을 만든다. 그리고 지금 이스라엘의 북쪽에 있는 파레스치나지방의 이름이 여기에서 시작하는것이다. 여기에 많은 유대인은 다시 이산을 할수 밖에 없어, 긴 디아스포라, 이민의 시대가 시작되였다. 로마에 인하여 엘루살렘성전 붕괴의결과 성전중심의 고대유대교는 끝이고 이 후 유대교의 학문의 중심은 갈릴리지방에 옮겨지고, 파리새파의 전통을 기초로, 오늘의 현대유교로 발전하고, 유대교의 원형은 여기서 시작됩니다. 이 로마의 지배가 시리야지방에서 시작될 때, 클레오파트라의 선조, 마케도니아의 귀족이며 알렉산더대왕과 함께 원정에 참가하고, 대왕의 후계자의 한 사람으로 된, 시리야왕 세레우코스, 이것이 같은 대왕의 후계자로 애굽의 왕이 이미 되고 있었던 프토레마이오스에게 프토레마이오스5세의 시대에 시집가게 되었다. 이후 프토레마이오스가는 근친상간을 되풀이 하고 왕은 프토레마이오스, 녀왕아내는 클레오파트라라고 자칭하게 된다. 유명한 프토레마이오스조 마지막의 녀왕이 된 클레오파트라7세이다. 애굽 마지막의 녀왕이 크레오파토라7세인것은 아마 모든 사람들이 아는 사실이다. 그 클레오파트라7세가 속하는 프토레마이오스왕조, 애굽의 고대왕국의 역사의 마지막에 위치하는 왕조이고, 알렉산더대왕이 사망 후, 그 후계자에 속한 대왕의 어리 시절부터 친구였던, 프토레마이오스1세가 알렉산더의 제국가운데, 애굽을 영지로서 택한 것으로, 이 왕조는 시작하여 간다. 프토레마이오스는 이름을 보아도 알렉산더대왕의 후계자로 속한것으로서 아는것처럼 애굽인이 아니라 마케도니아계의 기리시야인이다. 즉 애굽마지막의 여왕은 애굽인의 피줄이 섞여있을지도 모르지만, 선조를 더듬어보면 외국인이었다.
알렉산더대왕이 죽은 후, 장군의 한명이였던 마케도니아지방출신의 그리스인이였던 프토레마이오스와 기원전 306년에 애굽의 왕조를 창시했다. 프토레마이오스는 애굽의 전통을 거두거 혈족혼인을 반복하였기에 200년이상 애굽을 지배하면서도 애굽인의 피줄이 섞이지 않고 그리스인의 피줄를 지켰다.
크레오파트라―세계를 꿈꾼 비국의 여왕의 모습은 어떤 모습이였을까―미녀의 대명사로 오래오래 전해지고 프랑스의 철학자 파스칼도 <크레오파트라의 코가 좀더 낮았으면 세계의 역사는 변했을 것이다>고 말했다. 반면 크레오파트라는 그다지 아름답지 않았는것이 아닐가고 기록되어 있다고 한다. 로마의 지배가 시작되는 그 시대, 크레오파트라는 기원전 69년 1월에 태여났다. 어머님은 그 녀를 출상한 직후 세상을 떠났다. 그녀는 일족과 토착의 애굽이 아니라 마케도니아의 피줄을 이은 기리시야인이였다. 근데 크레오파트라는 기리시야어로 <아버지의 영광>을 의미하는 것이다. 그 녀에 속하는 프토레마이오스가와 왕가의 순수한 피줄을 지키기 위해 계속 근친상간을 하였다. 알렉산더대왕이 이땅을 정복하고 대왕의 후계자인 장교었던 프토레마이오스1세가 통치한 이후 250년간 계속된 습관이다. 이러한 근친상간은 몸매나 성격에도 나쁜 영향을 끼치고 그 원인때문에 한 가족간에서 전간(癲癇), 이상성격(異常性格), 뚱뚱한 비만체(肥満体)가 적지 않았다. 크레오파트라의 아버지였던 프토레마이오스12세는 언약한 국왕으로써 모든 사람들한테서 「피리부는 사람」 이라고 바보취급 당하였다. 머지 않아 대증세나, 기프로스도를 로마인이 팔아 돌리고 민중의 분노가 폭팔하고, 바보왕은 로마로 망명했다. 그러나 크레오파트라는 말할것없이 지성이 높은 여성였다. 식민지내의 모든 언어도 다 알고 여러개 나라 언어를 제맘대로 할수가 있었다. 또 애굽어를 할수가 있었던것은 그 녀 혼자뿐이 였다고 한다. 그 녀는 군사, 정치등 비범한 지도력을 발휘할 정도로 다재다능한 천재여였다. 크레오파트라는 아버님의 유언상(遺言状)에 씌여졌던 말씀을 지켜, 남동생과 함께 애굽전토를 통치하기로 했다. 크레오파트라18살, 그녀의 남동생 프토레마이오스13세는 아직 10살이었다. 승기로 여왕기질이었던 크레오파트라는 왕좌에 앉았을 때부터 통치할 예정이였다. 그러나 정치를 보좌하는 3명의 후견인(後見人)이 자기들의 야심과 리익만을 생각하고 아무것도 모르는 철없는 어린 동생을 자기 마음대로 조종시키려고 꾸몄다. 거기에 의지가 강한 크레오파트라가 방해가 되고 그들의 음모때문에 그녀는 알렉산드리아에서 내쫓기게 된다. 사막의 비밀장소에 숨어서 어려움을 피하였지만 바다너머에 있는 로마제국에서 독재자가이쟐이 알렉산드리아에 도착했다. 이 분이 바로 그 유명한 시저이다. 로마제국의 권력투쟁에 모든 나날들을 보냈던 끝에, 라이벌이였던 폼페이하우스를 전쟁에서 물리치며, 폼페이스를 나가, 이 애굽의 땅으로 왔던것이다. 기원전 48년10월중순, 가이살에게 여왕한에게서 전언을 헌상하고 싶다는 한명의 기리시야인이 융단같은 것을 들고 왕궁에 찾아왔다. 그 안에서 한명의 작은 몸짓의 여성이 드러누어 있었다. 그때 크레오파트라21살, 너무나 가날프고, 고수머리는 공손히 모으고 목덜미에서 단정히 묶어있었다. 가에살은 위엄에 차넘친 여왕이라 하기보다 요신처럼 보인것이 아니였을가. 본적도 없는 젊은 여성에게 가에살은 처음은 놀랬지만 곧 그여의 고묘한 회화, 깊은 지성과 화려하게 띄는 위트, 마음을 돋구는 겉과 같은 연애의 흥정에 로마제국의 53살의 위대한 독재자의 마음은 금방 완전이 매료된것이다. 크레오파트라에 있어서는, 시저에게 아첨하고 그의 권력밑에 자기를 추방한 동생과 그 부하들을 물리치는가, 아니면 자신이 이제 죽을수 밖에 없었던것이다. 그리고 그녀는 독재자 가에샬의 마음을 곧 바로 잡는것에 성공했다. 동생은 프토레마이오스13세는, 미워했던 누나가 어느새 궁전에 다시 되돌아와, 깊은 관계에 빠진것을 보고, 13살인 어린 국왕은 짜중을 내고 방에서 쫓아가며 혼란했다. 이 국왕의 모습은 머지않아 애굽을 사랑하는 군중의 동정심을 권했고, 폭도화되여 궁전에 밀어닥쳤다. 그후 가에샬은 두 사이에 주선하고, 우선 화해하고 또다시 둘이서 애굽 통치를 높이 선언했다. 그러나 무대뒤에서는 은근히 프토레마이오스13세의 후원인들이, 가에샬과 크레오파트라를 때려려 눕히기 위해 군대를 동원시켜 전쟁의 준비에 서들렀다. 가에샬이 그것을 알아차리자. 곧 프토레마이오스13세를 왕국내에 감금해서, 시리야의 주둔하는 로마군의 응원군을 요청했다. 이윽고 왕궁에서 추방된 프토레마이오스13세는, 반란군을 사용하고 로마군이 마지막 전쟁일 임하서 물리치며, 나일강에 몰아내고 결국 배가 가라않고 빠져 죽어버렸다. 크레오파트라는 실질상 애굽의 여왕이 되였다. 가에살은 힘이 뒷받침으로 촉구하고 있었다. 크레오파트라는 그때 6개월의 아기가 배속에 있었다. 가에살은 로마 총독으로서 임무를 수행하기 위하여 크레오파트라와 헤여지고 소아시아, 아프리카에 붙은 폼페이으스는 남은 당을 물리치고 로마에 개선했다. 가에살의 개선식은 아주 큰 장대한것으로 했다. 전리품이 몇대나 차에 쌓여 로마까지 실어왔다. 한편 크레오파트라는, 가에살사이에서 태여난 가에사리온을 키우면서, 다시 만날 그날을 고대했다. 그리고 드디여 로마에서 그녀와 가에사리온을 선님으로써 마중한다는 소식이 들어온다. 그것은 3년후에 일이였다.
로마에 올라타고 대환영을 받아 가에살택에 침착했다. 그러나 가에살이 독재성을 뿌리니까 공화제붕파의 위기의 념을 품은 일부의 전노원의원들에 의해 암살당했다. 3월 15일이였다. 가에살은 실질적으로는 황제로 되고 공화제부터 제국주의 정치로 이행을 계획했다. 그러나 비록 그것이 시민들로 부터 지지를 받았던 선한 정치였다한들 공화국의 전통을 지키려는 전노원에게는 허락되지 못할것이였다. 가에살은 그 독재를 허락하지 않는 자식, 오그타비아스 란 가에살의 양자에 의해, 그리고 브르타스의 탓으로 암살당한다. 그때, 가에살이였던 시저는 <브르타스 너까지도>라고 웨쳤다고 하지만, 이것은 셰크스피아의 대사였지, 역사의 사실이 아니라고 합니다. 이것으로 크레오파트라의 야망은 가에샬의 죽음때문에 잃어버리게 된다. 게다가 가에살의 유언으로는, 로마제국의 후계자는 그의 양자였던 옥다비아느스로 되고있었던 것이다. 가에사리온이야말로 후계자로 생각했었던 크레오파트라는, 생각지도 못하는 이 사실로 그녀가 실의에 로마로 달아나지 않으면 않되였다. 로마에서는 가에살이 죽은 후 옥타비아느스와 안토니으스의 파벌로 갈라지고 권력투쟁이 생겼다. 그때 크레오파트라에게 안토니으스부터 소환을 받았다. 그러나 그때 크레오파트라는, 이것이 하나의 구실이였다는것을 알아차렸던것이다. 이전에 기병대장였던 안토니으스의 뇌리에는 아직 소녀였던 크레오파트라의 모습을 잊을수가 없었던것이다. 크레오파트라는 소아시아의 달소스로 향했다. 안토니우스는 이처럼 크레오파트라와 둘만의 시간을 알렉산드리아에서 보냈다. 그러나 41살의 그는 가에살처럼 그녀에게 맞서는 머리좋은 생각을 안갖고 있었던것이다. 시골내기로 후하하지만, 생각이 단순한 아토니으스는 아주 쉽게도 크레오파트라의 매력에 빠진것은 지극 당연한 결과였다. 이때 크레오파트라28살, 그녀의 배속에는 안토니오으스의 쌍둥이가 있엇다. 로마에서 아내 흘비아가, 라이벌 옥타비아느스에게 전쟁을 건드린 알림이 갑자기 왔다. 안토니으수는 다짜고짜, 전쟁을 그만두고 알렉산드리아를 뒤에 해야 했었다. 크레오파트라에게 제 정신을 잃은 안토니우스의 마음을, 자기에게 돌릴려고 싶다는 일심으로 했다. 결국 흘비아는 안토니우스가 격렬하게 공격하니, 그후 피로가 쌓여 병들고 쓰러지고 죽고 말았다. 옥타비아누스는 라이벌이였다 한들, 아직은 안토니우스와 전쟁하는 작정이 없었으므로 화해를 자청하고, 그 화해를 표하고, 안터니우스는 옥타비우스의 누나를 새로운 아내로 맞이했다. 3년이 지나, 안토니우스는 파르치아 원정에서 대손해를 내고, 궁지에 빠져버리고, 클레오파트라가 원군을 보내여 구조로 달려가, 안토니우스를 무사히 구원했다. 이렇게 안토니우스는 클레오파트라에게는 하나도 대등이 맞설수 없었고 그 여과의 결혼을 승낙하며, 게다가 옥타비우스의 누나였던 아내와 이혼시켜버렸다. 이것들은, 옥타비우스가 안토니우스에게 선전포고하려는 좋은 구실로, 사실 둘 사이에 권력다툼이 정점으로 달해, 언젠가 싸우지 않으면 않될 정도로 기회는 무르익고 있었다. 옥타비아우스는 그의 누나가, 인영시켜진 사실을 잘 이용했다. 원로국회의의결원 안토니우스를 지지하는 사람은 상당한 수가 있었던 셈이지만, 옥타비아누스측에 대해서버린 탓으로, 그는 로마제국의 모든것을 원수로 하지않으면 않되게 되였다. 이것은 크레오파트라에 있어서도 큰 전망을 잃어버리릴수 밖에 없는것이라고 말할수 있었다. 안토니우스의 진영은 비참할수밖에 없었다. 군대의 의기는 떨어지고, 탈주하는 사람은 사라지지 않고 결과적으로 안토니우스는 간신이 거기를 탈출했지만 함대(艦隊)는 점멸 해버린것이다. 안토니우스는 허둥지둥하게 궁전에 도망쳐 오지만 거기서 클레오파트라가 자살했다고 소식을 들어 안토니우스도 자결을 결의했다. 그녀곁에 간 안토니우스는, 그녀의 팔안에서 숨을 거둬 싸움은 끝났다. 로마로 데려가는 운명만이 기다리고 있었던것이다. 옥타비아누스가 로마에 개선했을 때, 민주의 앞에서 전차(戦車)로 쇠사슬에 매여진 그녀를 보이고, 자기의 힘을 과시하려고 했다. 그리고 8월 12일. 로마로 출발하는 3일전을 앞둔 날, 그녀는 목욕을 끝마치고 최후의 식사를 한 클레오파트라는, 작은 벰의 독으로 꿈과 파란에 가득찬 39년의 생애에 종지부를 찍으려고 해, 번병(番兵)이 이것을 알아차려 급히 달려왔을 때, 그녀는 황금의 침대에서 여왕의 의상과 보물을 익혀서 죽어서 누어있었다. 애굽의 왕조는 종말을 고했다. 가에사르는 기원전 100년 로마의 귀족의 집에서 태여났다. 이것에는 이설도 있다. 어쨌든 예수 그리스도가 등장하는 약 100년전, 그는 이 세상에 생을 누리는 것이다. 7월 13일 태어났다고 여겨진다. 시저는 「노부나가」의 카리스마와 「히데요시」의 인망과 「이예야스」의 조직력을 겸비하고 게다가 「가쿠토」의 성적 매력과 「간디」의 자비마저 준 역사상 드문 매력을 가지는 인물로 여겨지고 구미인의 있어서는 정말로 타임지의 표지를 혼자 꾸민다라고 말해도 좋은 인물이었다고 말해지고 있다. 그 모성본능을 간지럽게 하는 룩스와 천재적인 요설의 산뜻한, 그리고 무엇보다도 빼장이 침착해진 태도에 의해 순식간에 로마에 인기있는 사람이 된것이다. 그러나 가이사르에게 안주의 나날은 없었다. 폼페이우스의 당을 쓰러뜨리고 오는 로마제국의 그런드 디자인을 작성해야 했다. 당시 로마는 유력귀족에 의한 공화국의 행하여지고 있어서 이 시스템은 로마가 아직 자그마한 도시국가의 때에 잘 기능하고 있어서도 기원전1세기의 전지중해를 지배하는 대제국을 시스탬로서는 무리가 있었던것이다. 정책,지휘,명령계통이 매우 비효률적이고,신음하며 반상회 일본전체의 행정을 하려고 했으니까 입니다. 가이살은 그것을 간파하고 있었다. 이 거대화 한 로마의 통치하기 위해 권력의 단일화, 다시 말해서 로마제국의 설립밖에 없었다. 어느새 그는 왕이 될 소망을 가지게 되었던것이다. 그러나 이전에 많은 피를 흘리고, 왕건을 쓰러뜨리고 공화제를 쟁취한 로마인에 있어서 왕이라고 말하는 이름이 악마와 같은 울림을 가지고 있다. 가이살의 의도는 아무에게도 이해 받을수는 없었다. 로마는, 왕은 필요없고 독재자는 쓰러뜨려라 이렇게 웨치면서 습격하는 암살자들, 가이살은 질릴 일 없고 손에 든 주석 하나로 직면해 간다. 그러나 그 암살자들, 무리안의 사람속에서, 한 젊은이의 모습을 보았을 때, 그는 모든 저항을 포기하고 그 자리에 무너져 혼잡한다. <브투타스 너까지도인가>. 아들과같이, 아니 진짜의, 숨긴 자식이었다라고 하는 그 아들한테까지, 그 사랑한 브루투스 그마저 자기를 죽이려고 했던가. 그때 위대한 리더, 시저는 아쉽게도 쓸어져버렸다. 그리고 그는 죽는다. 그러나 그가 그린 그란드 디자인의 확실함은 그의 사후, 양자로서 뒤를 이어받은 아들이 로마초대황제 아우그스투우스로 그후, 1000년이상 계속되는 대로마제국의 초석을 쌓은것을 보아도, 시저의 생각은 틀리지 않했던것은 명확하다. 그리고 로마의 지배가, 이 시리야, 이스라엘 및 로마의 속주가 되고 있을 때, 예수 그리스도는 탄생한것이다.
그후 예수 그리스도가 십자가에 걸치고 죽으신 후,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인 바울이 기원3년에서 62년까경지 기독교의 포교를 시작했다. 바울을 비롯한 사람들은 기독교를 유대인 이외에 포교하는 것을 국제화하고 성공 해나간다. 이렇게 유대교에서 독립한 새로운 종교가 탄생 해간다. 그러나 로마에서 우선 복음이 들어오고, 기독교가 널리 퍼짐에 따라 기원64년, 네로 황제가 기독교의 박해를 시작하였다. 당연히 네로 황제는 처음부터 폭군이었던것이 아니었다. 처음의 5년은 철학자의 세네가의 버팀목으로 훌륭하게 정치를 잡는다. 그러나 권력의 망자라고 말할수 있었던 어머니 아그릿피나와 대립하고, 그녀를 살해한 후에는 하찮은 것으로 주변의 사람을 잃는 등 행동이 이상해진다. 또 계위후계자로 되는 인물을 모조리 죽여버린다. 이처럼 세네가는 은퇴하지만 결국 죽음을 당해버린다. 로마에서 대화재가 있었을 때 네로가 방화한것이 아닐까라고 의심되어버린다. 급히 네로는 집을 잃은 사람들을 구제하거나 구경거리 오두막집을 만들거나 필사적으로 대책을 세우는 한편에서 조금씩 신자를 늘이기 시작하자마자 기독교의 교도에게 모든 책임과 죄를 뒤집어 씌워 박해를 하였다. 이미 네로에게 대한 불만스로운 소용돌이를 억제할수는 못하고 원로원에 의해 국가의 원수라고 상표로 불리우고 68년에 자살했다. 이때 역사가 또 바뀐다. 네로가 다른 최상위황제후보를 죽이고 있었던것도 있어서 시저, 카에사르에서의 아우구스토스의 혈통의 황제는 여기서 종언을 맞이한다. 모든 길은 로마에 통한다고 칭해진 로마도 쇠퇴버려간다.
기원전313년에 곤스탄티누스가 기독교를 보호하고 349년9월6일에 동서에 분열되어 있었던 로마제국을 통일하고, 혼자 지배한 최후의 황제로 된 테오도시우스가, 388년에는 원로국회의 의결원에 대하여 고대로마 종교의 페절을 추구하고, 결의를 정의 했다. 원로국회의는 거의 전원 일치로 찬성했다. 이것으로 말미암아 기독교는 사실상 로마제국의 국교로 되어간다. 기리고 기독교는 로마에 들어가 유럽에 들어가고, 그 후 로마에서 로마카돌릭이 탄셍했다. 그때부터 기독교는 1500년 유럽에 들어가, 16세기 마루틴루타의 종교개혁으로 부터 프로테스탄트교회가 출현해 복음서의 가르침에 되돌아 권력남용을 멈추려고, 사회와 종교에 격동을 초래했다. 그리고 18세기의 프랑스혁명을 일으켜려고 하는 유럽에 새 시대의 혁명으로 연결되여 영국에서의 독립으로 미국대륙까지 변혁이 이루었다. 그리고 지금 기독교의 선교는 아시아에 선포되고, 이스라엘로 되돌아 가려고 한다.
이처럼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은 이스라엘에서 역사가 시작된다. 이스라엘이 로마지배를 허락하신것은 하나님이시다. 그리스도 아닌 애굽도 아닌, 하나님은 로마에 기독교복음을 넓히는 것을 결정하고 있었다. 그리고 바울에게, 아시아가 아닌, 로마로 들어가도록 명령하셨다. 그리고 기독교는 전세계를 돌고 또다시 이스리엘로 되돌아왔다. 그 시작은 기원1년. 그야말로 예수 그리스도의 역사의 첫시작이다. 그 역사는 이스라엘의 자그마한 마을 베들레헴에서 태어났다. 크리스미스는 이 역사의 첫 시작이었고 새로운 시간의 시작이었다. 우리들이 이 마지막시대를 지금 마주나오고있다.
그리고 기독교는 다시 이스라엘로 돌아옵니다. 지금 역사는 바로 그대로 움직이고 있다. 경제도 힘도 아시아쪽을 향하고 있다.
이렇게 해서 역사는 한바퀴 한것이다.
His Story 그의 이야기는, History역사로 되었던것이다.
그 역사는 이미 종말을 고하려고 하고있다.
기독교가 2000년 포교가 계속되어지는 것은 하나님에 따르는것이다.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는 전세계를 구원하려고 이천년전에 이 땅에 오시고 그리고 또다시 오십니다.
메리 크리스마스!!!